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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독감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백신은 나라를 지키는 무기

째깍째깍. 세계를 강타할 시한폭탄 같은 공포가 다가오고 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는 인체에 치명적인 독감바이러스로 전세계적인 전염병이 유행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발병하면 최소 200만명, 최대 1억명까지도 사망할 수 있다는 예상이다. WHO가 경고하는 독감바이러스는 조류에서 왔다. 조류 바이러스가 어떻게 사람에게 감염됐을까. 또 지금 조류독감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금빛으로 보이는 부분이 H5N1형 조류독감 바이러스. 사람을 공격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인체감염이 확인됐다.


마지막 빗장만 남은 판데믹

1997년 홍콩에서 18명이 조류독감에 감염돼 6명이 사망했다. 전문가들은 사망한 환자에서 독감바이러스를 분리한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이러스는 H5N1. 사람을 공격할 수 없다고 알려졌던 유형이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자칫 ‘판데믹’(pandemic)으로 확대될 위험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판데믹은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현상을 말한다. 지난 2003년 유행해 30여개국에서 8000여명 환자를 감염시킨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도 판데믹의 한 예다. 특정 지역에서 이질이나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는 현상인 ‘에피데믹’(epidemic)과 달리 판데믹은 3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먼저 바이러스의 변종이 많이 생기는 ‘대변이’(shift)가 일어나야 한다. 둘째로 변종 바이러스가 인체에 감염돼 치명적인 증상을 보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염돼야 한다.

1997년 홍콩 조류독감은 판데믹의 첫째와 둘째 조건을 만족한다. 인체가 겪어보지 않아 면역력이 없는 H5N1에 감염됐고, 환자의 3분의 1이 사망할 만큼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단 사람 간에는 전염되지 않았기에 판데믹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마지막 빗장’이 열리는 건 시간문제.

인류는 20세기에 이미 판데믹을 3번이나 경험했다. 1918년 스페인독감 때는 H1N1 바이러스가 유행했고, 2000만명 이상이 죽었다. 1957년 아시아독감의 H2N2는 100만명, 1968년 홍콩독감의 H3N2는 7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는 “20세기 판데믹은 최소 11년, 최대 39년만에 돌아왔다”며 “지금은 마지막 판데믹부터 37년이 지났기 때문에 또다른 대변이가 출현하기 직전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바이러스 유형은 H5N1이다.

정황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 5월 1일까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H5N1에 109명이 감염돼 그 가운데 54%가 목숨을 잃은 것. 최근 H5N1이 가족 간에 전염성이 있다는 논문도 발표됐다. 실제로 지난해 9월 태국에서 H5N1형 조류독감으로 목숨을 잃은 26세 여성 프라니 통찬은 조류독감 의심 증세를 보이다 사망한 11세 딸을 간호하다 감염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사례는 아직 판데믹의 셋째 조건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가족 간에는 밀접한 신체접촉이 많이 이뤄지므로 불특정 다수에게 무작위로 퍼질 수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란 얘기다.

종간 장벽 뛰어넘는 바이러스

독감바이러스는 A, B, C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 C는 사람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겨울에 유행하는 독감바이러스의 대부분은 A나 B다. 바이러스B의 경우 유전자 염기서열의 한두 군데만 달라지는 ‘소변이’(drift)를 일으킨다. 시드니독감, 파나마독감, 캘리포니아독감 등 해마다 일시적으로 겪는 대부분의 독감이 바로 바이러스B의 소변이 때문이다. 소변이는 판데믹으로 확장되진 않는다.

유전자의 많은 부분이 바뀌는 대변이를 일으키는 건 바이러스A. 물론 B보다 증상도 심하다. 바이러스A는 둥근 공 모양으로 안에는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RNA가 8가닥 들어있다. 겉은 헤마글루티닌(H)과 뉴라미다제(N)라는 단백질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헤마글루티닌은 15가지(H1~H15), 뉴라미다제는 9가지(N1~N9) 종류가 있는데, 조류는 이들 모두를 갖고 있다. 따라서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다제의 조합으로 총 135가지의 변종 바이러스가 만들어져 독감의 유형이 결정되는 것이다.

인간에게서는 헤마글루티닌은 3가지(H1, H2, H3), 뉴라미다제는 2가지(N1, N2)만이 발견됐다고 알려져 있었다. 즉 조류가 갖고 있는 135가지 바이러스 유형 중 인체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은 H1N1, H1N2, H2N1, H2N2, H3N1, H3N2의 6가지뿐이었다. 결국 최근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한 H5N1은 ‘신종’ 조류독감바이러스인 것.

인체를 공격할 수 없던 바이러스가 무슨 계기로 능력이 ‘업그레이드’된 걸까. 과학자들은 두 가지 경로를 추측하고 있다. 독감바이러스의 유전정보는 대부분 RNA가 전달한다. RNA는 DNA보다 불안정해서 돌연변이가 좀더 쉽게 일어난다. 독감바이러스도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변하는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조류가 아닌 인간에게 효과적으로 전염될 수 있는 조건을 갖게 됐고, 이 바이러스가 직접 인체로 침투했을 거라는 가설이다.

또다른 가설은 돼지와 같은 다른 동물을 매개로 한다는 것. 돼지는 조류독감바이러스와 사람독감바이러스의 수용체를 모두 갖고 있어 두 바이러스가 동시에 들어올 수 있다. 희한하게도 돼지는 조류와 달리 독감 증세가 치명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두 바이러스의 RNA는 돼지의 몸 안에서 섞여 새로운 조합의 RNA를 가진 바이러스를 만들어낸다. 양 손에 카드 한 묶음씩을 들고 섞어 새로운 배열의 카드 묶음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H5N1도 둘 중 한 경로로 인체에 침투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H5N1에 감염된 사람이 매년 유행하는 일반적인 독감에 동시에 감염될 경우다. 일반적인 독감에 걸린 경우 건강한 사람이면 며칠 고생하다 낫지만, 노인이나 어린이, 환자는 폐렴에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 H5N1은 건강한 사람조차 폐렴을 일으켜 호흡곤란으로 사망하게 한다. 인체 내에서 H5N1과 다른 독감바이러스가 뒤섞이면 치명적이라는 H5N1의 특성과 사람 간 전염이라는 특성을 함께 갖게 되기 때문에 곧바로 판데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조류독감 발생 분포도


H5N1 백신 아직 없어

H5N1형 조류독감 치료 효과가 입증된 약은 현재 스위스 제약회사 로슈의 항바이러스제 ‘타미플루’ 뿐이다. 바이러스가 인체를 공격하는 ‘무기’는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다제. 바이러스가 호흡을 통해 체내로 침투하면 헤마글루티닌이 호흡기 점막세포에 달라붙는다. 점막세포로 들어가 증식한 바이러스는 점액질에 싸여 뭉쳐진 형태로 세포를 깨고 나온다. 이때 뉴라미다제가 바이러스를 흩어지게 해 다른 점막세포를 공격할 수 있게 돕는다. 타미플루는 뉴라미다제를 방해해 바이러스가 증식 못하고 죽게 만든다. 그러나 타미플루의 효과는 현재 18세 이상에서만 입증돼 있다. 또 판데믹이 발생할 경우 한 제약회사가 세계의 수요를 감당하기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역시 예방이 최우선. 해마다 2월경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과 WHO는 분리된 독감바이러스를 모아 분석한 다음 그 해 유행할 바이러스 유형 세 가지를 예측해 발표한다. 바이러스A 중 두 가지, 바이러스B 중 한 가지가 포함된다. 그 뒤부터 제약회사들은 이 세 가지 바이러스의 백신을 제조하기 시작한다. 9~11월경 맞는 독감백신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 계속 변종 바이러스가 생기기 때문에 매년 다른 독감백신을 제조해야 한다.

조류의 135가지 변종 바이러스가 모두 들어있는 백신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백신을 만들 때는 닭이 품으면 바로 병아리가 될 수 있는 계란, 즉 유정란을 이용한다. 11일쯤 된 유정란에 구멍을 뚫고 양수 안에 바이러스를 넣어 키운다. 계란을 깨 바이러스만 분리해낸 다음 화학약품을 써서 불활성화시킨다. 이렇게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만든 불활성 바이러스 세 종류를 섞은 것이 바로 우리가 맞는 독감백신이다. 세 바이러스 중 어느 하나라도 수율이 낮으면 백신 부족사태가 빚어지기도 한다.

올해 2월 WHO는 2005~2006년 겨울에 접종할 백신으로 1999년 뉴 칼레도니아에서 분리된 H1N1 바이러스A, 2004년 캘리포니아에서 분리된 H3N2 바이러스A, 2002년 상하이에서 분리된 바이러스B를 발표했다. 올가을에 백신을 맞고 약 한달이 지나면 우리 몸에 이 세 가지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생기는 것. 결국 올해 백신은 H5N1형 독감을 예방하진 못한다. 세계적으로도 아직 상용화된 H5N1 백신은 없다. H5N1은 독성이 매우 높아 특수한 안전장치가 있는 곳에서 다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계란에 넣으면 독성 때문에 계란이 죽는 경우가 많아 증식 자체도 어렵다. 따라서 기존의 방법으로는 H5N1 백신 개발이 쉽지 않다.

연세대 생명공학과 성백린 교수는 유전공학기술로 체온인 37℃보다 낮은 25℃에서 사는 약한 독감바이러스를 만들었다. 이 저온적응 바이러스를 기관지에 감염시키면 증상을 나타내진 않지만 면역력을 길러준다. 성 교수는 “이는 인체독감을 예방하는 생백신으로 사용할 수 있다”며 “이 바이러스의 껍질을 교체해 H5N1 면역력이 생기는지 확인하는 동물실험을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성 교수는 역유전학기술을 이용한 H5N1 백신도 개발 중이다. 바이러스 RNA에서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다제를 만드는 유전자만 꺼내 이를 DNA로 바꿔 세포에 넣어 키운 다음 백신으로 제조하는 방법이다. 바이러스 자체를 직접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좀더 안전하다. 최근 다국적 제약회사 사노피-아벤티스가 이 방법으로 H5N1 백신을 개발해 건강한 자원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항체가 생겼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대량생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자카르타의 한 양계장에서 직원이 닭에게 모이를 주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지금까지 닭 수백만 마리가 조류독감으로 죽었다.


세계는 독감과 전쟁 중

9월부터 황새, 청둥오리, 갈매기 같은 시베리아 철새들이 월동을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조류독감바이러스를 옮기는 주범. 철새는 바이러스를 갖고 있어도 치명적인 증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철새와 접촉해 감염된 닭은 치사율이 90%를 훨씬 웃돈다. 벌써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철새에서 H5N1 바이러스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얼마 전 중국에서 떼죽음을 당한 철새에서도 H5N1이 검출됐다. 해마다 많은 철새가 찾아오는 우리나라도 결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독감백신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전세계 독감백신 생산량의 90%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과 북미에 집중돼 있다. 이웃 일본은 독감백신을 이미 자체 공급하고 있다. 백신 수요가 갑자기 증가하면 이들이 자국민에게 우선 접종할 것은 자명한 일. 돈이 있어도 백신을 구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에 지난 8월 정부는 전남 화순에 독감백신 원료 생산공장을 설립하는 사업자로 국내 제약회사 녹십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공장 설립을 총괄하는 엄달호 부사장은 “2007년까지 설비 구축을 완료한 뒤, 2009년부터 독감백신을 수출 포함해 5000만명분까지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세계 두번째로 수두백신을 개발한 박송용 상무는 “우리도 독감백신을 자체 생산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기술은 이미 갖췄다”며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대량생산하기 위한 기반을 확립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독감은 살아있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이다.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됐다. 김우주 교수는 “사스가 생쥐라면 인플루엔자는 코끼리 격”이라며 “조류독감 시한폭탄에 꼼짝없이 당하지 않을 길은 결국 백신 자체 공급뿐”이라고 강조한다. 이제 독감백신은 나라를 지키는 무기다. 우리가 반드시 생산능력을 갖춰야 하는 이유다.

조류독감 감염 경로

조류의 독감바이러스가 변종을 만들어내면서 종간장벽을 넘어 다른 동물까지 감염시키고 있다(보라색 화살표). 종에 따라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사람이 조류독감에 감염되는 경로는 두 가지. 조류 바이러스가 인체에 직접 침투하거나(남색), 조류와 인간의 바이러스가 돼지에 들어가 섞여 새로운 바이러스가 돼 인체를 공격한다는 가설이다(초록색). 이렇게 생긴 변종 바이러스가 사람끼리 전염되면(파란색) 판데믹이 된다.


조류독감 감염경로

 

2005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임소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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