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26일 영국 히드로공항에서는 4반세기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마지막 비행을 마치고 공항에 착륙했던 것이다. 2000년 7월 25일 프랑스 샤를 드골공항에서 뉴욕을 향해 이륙하던 중 활주로에 떨어져 있던 금속 조각으로 인해 왼쪽 날개에 불이 붙으면서 추락해 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은 지 3년만이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이 사건이 전 세계에 생생하게 보도된 직후 콩코드를 이용하는 승객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결국 항공사는 비행에 드는 비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됐고 콩코드는 영원히 운항을 중단하게 됐다.
초음속 여객기에 대한 구상은 1950년대 말 항공기술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룬 프랑스와 영국에서 시작됐다. 직접적인 계기는 초음속 전투기였다. 프랑스의 비행기 제작자 마르셀 다소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초음속 전투기 미라주(Mirage)를 제작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 영국 공군도 시속 1822 km로 비행하는데 성공했다.
초음속 전투기로 비행 속도가 놀랄 만큼 빨라지자 프랑스는 이를 여객기에도 적용하려고 했다. 이즈음 프랑스의 쥐 아비아시옹 사는 영국의 롤스로이스 엔진을 이용한 쌍발제트엔진 비행기 까르벨라를 개발해 여객기 속도를 크게 개선시켰다. 이런 성공 덕분에 사람들은 초음속 여객기의 시대도 곧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따로 시작된 초음속 여객기 개발은 1962년 6월 해롤드 맥밀런 영국 수상과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사인하면서 양국간의 공동 프로젝트 ‘콩코드’로 합쳐졌다. 콩코드라는 이름은 영국에서 처음에 초음속 여객기를 ‘concord’로 부른 데서 유래됐다.
콩코드 프로젝트가 탄생한 데는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경제적인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프랑스는 까르벨라 여객기로 항공 시장을 주도하던 미국 시장 진출에 자신감을 얻은 터라 초음속 여객기를 개발해 새로운 항공 시장을 개척하는 한편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했다. 영국은 미국과 긴밀한 연대로 유럽, 특히 프랑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던 차에 콩코드를 공동 개발해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과 긴밀한 연대를 모색하고자 했다.
동시에 양국은 미국과 소련이 유인우주선 개발로 우주기술을 주도하고 있다면 자신들은 적어도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여객기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양국은 해마다 프로젝트 예산에 2800만달러를 배정하면 8년 뒤 초음속 여객기가 상업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달 여행도 가까운 미래로 보였으니 도시 사이를 초음속으로 여행하는 것은 당장이라도 실현될 것 같았다. 미국의 대형 항공사 팬암, TWA 등 세계 100여개 항공사도 콩코드를 주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마침내 1969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콩코드 1호는 마하 2의 속도로 첫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1971년 콩코드는 판매를 위해 순회 비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시련을 맞았다. 1973년 소련이 개발한 초음속 비행기 Tu-114가 파리 항공박람회에서 추락한데다 석유 파동까지 닥쳤던 것이다. 마하 2에 도달하기 위해서 콩코드는 일반 여객기보다 연료를 20%가량 더 써야했기 때문에 석유 파동은 치명적이었다.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 것이 분명해지자 항공사들은 이내 콩코드 주문을 철회했다.
미국 환경단체의 반대도 거셌다. 초음속으로 비행할 때 발생하는 소닉붐 현상은 공항 인근 주민들에게 엄청난 소음 공해였다. 소닉붐 때문에 오존층이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과학자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보잉은 1971년 마하 3까지 낼 수 있는 초음속 여객기 개발 자체를 철회하기도 했다. 기술적으로 콩코드를 앞섰지만 환경 단체의 반대를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1976년 콩코드는 첫 정규 비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어떤 항공사도 콩코드를 구입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항공사만이 콩코드 14대로 상업 운항을 시작했고, 1980년 이후로는 콩코드가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다른 항공사들은 연료 효율이 높고 한번에 많은 승객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보잉 여객기를 선호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콩코드 운항을 지속한 이유는 뭘까. 결코 경제적 이윤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100여명의 승객들에게 8000달러 이상 운임을 받는 등 비행에 드는 비용을 상쇄하려고 했지만 경제적 손실은 여전히 컸다.
그럼에도 영국과 프랑스가 콩코드 운항을 강행한 것은 영국, 특히 프랑스의 국가적 자긍심 때문이었다. 툴루즈에서 콩코드의 첫 시험 비행이 있었던 1969년은 드골 정부 아래 프랑스가 한창 번영하던 시기였고, 콩코드의 성공은 프랑스가 새로운 과학기술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콩코드는 불과 몇 명의 특권층만이 이용하며 여객기 본연의 의미를 상실했지만 운항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