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우리 몸을 멋대로 조종하고 있습니다.” 젓가락질을 멈추고 뇌 ‘음모론’을 꺼낸다. “맛있는 음식은 왜 계속 먹게 되죠? 손이 움직이니까? 혀가 원하기 때문에?” 잠깐 뜸을 들이며 반찬을 집었다. “뇌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죠. 아닌가요?”
생쥐를 사랑한 뇌 박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신희섭 박사(55)는 ‘뇌 박사’로 통한다. 2003년은 그에게 ‘기적의 해’였다. 한 해에 3편의 논문을 ‘네이처’ ‘사이언스’ 등 세계적 학술지에 싣는 기염을 토했다.
생체리듬을 알려주는 ‘생체시계’의 작동 과정을 처음으로 밝혀냈고, 유전자를 조작해 ‘똑똑한 쥐’를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통증을 감소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는 유전자와 통증억제 메커니즘도 알아냈다.
덕분에 유난히 상복이 많았다. 지난해 ‘호암상 과학상’ ‘듀폰 과학기술상’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KIST인 대상’ 등 큰 상을 휩쓸었다. 상금만도 2억원이 넘는다. 올해는 ‘대한민국 최고 과학기술인상’까지 거머쥐었다.
“모두 생쥐 덕분이죠.”
그가 뇌과학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의과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어느 날 회진 중 아픈 환자를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진심으로 그 아픔을 동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 의사가 생계수단은 될 수 있겠지만 천직은 아니겠다고.
그때부터 그의 유일한 ‘환자’는 생쥐였다. 의사라는 ‘달콤한’ 직업을 버리고 생쥐의 뇌와 씨름을 시작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관장하는 뇌는 항상 궁금했던 분야였다.
유전자를 조작해 돌연변이 생쥐 한 마리를 만드는 데 꼬박 2년이 걸린다. 짧아야 1년 6개월이다. 궁금한 내용은 산더미지만 칼자루를 쥔 것은 돌연변이 생쥐. 생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조작한 유전자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길고 지루한 작업이다. 신 박사는 벌써 14년째 그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연구할수록 신비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재미있어요.”
아직 뇌과학은 밝혀지지 않은 것이 태반이다. 그는 이 미스터리를 푸는 일이 즐겁다. 힘들고 지칠 때도 있다. 하지만 재밌다. 신 박사는 “즐기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2001년 포항공대 교수를 그만두고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도 이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정년이 더 길고, 월급도 더 많은 자리를 스스로 관두다니. 사람들은 ‘외도’(外道)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정도’(正道)였다. 연구에 더욱 집중할 수 있고 공동연구를 하기에 편리한 것이 즐기기 위한 최우선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요가는 기본, 음악 미술은 필수
“아침마다 ‘난다 신’과 요가를 합니다.”
그는 3년 전부터 요가 삼매에 빠져있다. ‘난다 신’은 그의 애완견 이름. 코미디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난다 김’에 그의 성을 붙여 ‘신난다’라는 유쾌한 이름을 지었다. 그가 요가 동작을 할 때면 가끔 옆에서 난다 신이 앞발을 쭉 뻗어 그에게 완벽한 개 자세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에게는 요가도 뇌 연구의 연장이다. 요가를 하면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움직이게 되고 이 때 뇌에 자극이 가해진다. 그래서 그는 요가를 “뇌에 힘을 주는 운동”이라고 부른다. 뇌 연구자가 자신의 뇌를 단련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
음악과 미술도 마찬가지다. 요가가 육신을 움직여 뇌를 자극한다면 음악을 듣고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생기는 예술적 감흥은 마음을 움직여 뇌를 자극한다.
그의 연구실 한쪽에는 음악 CD가 수십 장 꽂혀 있다. 집에 있는 것까지 합치면 수백 장이 넘는다. 한국의 창부터 바흐 같은 클래식까지 음악은 가리지 않고 즐긴다. 초보 수준이지만 직접 알토 색소폰을 불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록 가수 전인권의 콘서트에도 다녀왔다.
붓과 캔버스 대신 마우스와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서양화가 김점선 씨와도 친분이 있다. 책상 위에는 화투 그림이 그려진 그녀의 개인전 초대장이, 연구실 벽 한쪽에는 큼지막한 포스터가 붙어있다. “모두 뇌 연구와 일맥상통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
그가 이렇게 부지런히 뇌를 움직이는 데는 어머니의 영향도 있다. 내년이면 여든 살인 어머니는 지금도 주부대학에서 한국무용을 배우고, 서예와 요가까지 섭렵하는 정력가다. 뇌 박사인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뇌를 돌보는 셈.
네이처보다 너처가 중요
“타고난 것(nature)보다는 노력으로 얻는 것(nurture)이 훨씬 큽니다.”
뇌를 다루는 그는 누구보다도 뇌의 잠재력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직접 겪기도 했다. 그는 초등학생 때 성적이 평균 100점이었을 정도로 ‘극단적 모범생’이었다. 어머니는 ‘공부하라’ 대신 ‘빨리 자라’고 잔소리했다. 동네에서 ‘천재’ ‘신동’ 소리를 달고 살았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신화는 깨졌다. 처음으로 받은 성적은 반에서 겨우 중간 정도였다. 충격이 컸을 법도 한데 그는 방황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두 가지 마음 때문이었죠. 원하고 믿는 마음입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았고,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그리고 거기에 몰두했다. 자신이 노력하는 만큼 현재는 새로운 미래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대통령과학장학생 장학증서 수여식에 초대받아 갔을 때도 그는 학생들에게 그 얘기를 들려줬다.
“똑똑한 생쥐는 미로를 금방 빠져나와요. 하지만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보통 생쥐도 결국에는 미로에서 길 찾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계속 훈련을 시키면 걸리는 시간은 차츰 줄어들어 똑똑한 생쥐와 차이가 없어지죠.” 그는 실험이 안돼 힘들어하는 연구원에게는 이렇게 다독인다.
그의 연구실 문에는 아직까지 몇 년 전 달력이 붙어있다. 좋아하는 글귀가 적혀있어 일부러 떼어 내지 않았다. ‘서두를 것 없어요. 천천히 걸으세요. 길은 외길입니다. 당신이 가서 이르는 데까지가 길이지요.’ 목판화가 이철수 씨의 2001년도 작품 ‘길’이다. 그는 “내 인생 철학을 대변하는 글”이라고 말했다.
올해 KIST는 ‘뇌과학연구센터’를 설립해 뇌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각종 뇌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연구를 수행할 예정이다. 신 박사가 센터의 ‘두뇌’를 맡게 된다. 국내외 뇌 전문가들을 영입해 뇌 연구의 밑그림을 그리고 하나씩 색칠해나가는 것이 그의 몫.
몸과 마음의 관계 비밀 밝힐 것
10년 뒤 그는 뇌의 비밀을 얼마나 벗겨낼까. 최근 그는 뇌에서 뜨겁다, 차갑다, 아프다 등 감각을 조절하는 기작과 이로 인해 감정이 형성되는 과정에 관한 연구 결과에 흥미가 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넘어져 아파서 울면 엄마도 똑같이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두 사람의 뇌를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해보면 아이는 대뇌피질에서 물리적인 통증에 관여하는 부분과 아프다는 괴로운 감정을 느끼는 부분이 동시에 활발해지지만 엄마는 후자만 반응한다.
그는 “도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활활 타는 불 속에서도 뜨거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며 “뇌과학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 허황된 얘기가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
“뇌는 여전히 미스터리”라고 말하는 신 박사. 그는 오늘도 복잡한 뇌의 미로에서 출구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