윙~윙~, 철커덕. 좁은 공간에 가득 들어찬 거대한 기계들이 굉음을 내며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작업복은 염료가 튀어 온통 형형색색 물들어 있다. 염료 냄새가 진동한다.
디자이너 지망생인 고준희(김민정)와 더미(이요원), 패션계의 대모 장봉실(이혜영)이 그려내는 드라마 ‘패션70s’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다. 드라마 배경인 1970년대에 디자이너들이 고안한 디자인으로 옷을 만들려면 아마도 공장에서 이런 대규모 염색공정을 거쳤을 것이다.
당시와 지금의 염색 방법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2000년대 패션계의 염색 트렌드는 다름 아닌 ‘디지털’이다.
판화에서 컬러프린터로
디지털 염색이라. 생소하다.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컬러프린터를 떠올려보자. 사용자가 입력한 문자나 그림을 화면에 띄워 놓고 키보드를 조작하면 컴퓨터에 연결된 프린터가 화면을 그대로 인쇄한다.
디지털 염색기법도 마찬가지. 디자이너는 옷이나 가방 등 각종 패션용품에 찍을 무늬를 컴퓨터로 디자인해 파일 형태로 만든다. 또는 직접 그린 디자인을 스캔해 파일로 만든다. 디지털 염색 프린터에 원단을 넣고 파일을 보내 작동시키면 원단에 그 디자인이 고스란히 찍혀 나온다.
재래식 염색공정은 화학염료를 배합해 필요한 색을 만들고 원단에 입힌 다음 열처리와 건조 등 많은 단계를 거쳤다. 때문에 주문받은 디자인을 제품으로 만드는데 몇 주씩 걸렸다. 디지털 염색기법은 이 공정을 1~2일 이내로 단축시켰다.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제품에 더 빨리 적용할 수 있게 된 것.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유행을 따라잡으려면 디지털 염색이 필수인 셈이다.
디지털 염색기법이 컬러프린터와 비슷하다면 재래식 염색공정은 판화 제작과 유사하다. 재래식 염색공정의 경우 찍어내는 사람의 노하우에 따라 같은 디자인이라도 색감이 다른 제품이 만들어진다. 이에 비해 디지털 염색기법은 디자이너가 고안한 디자인 파일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둘 수 있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디자인을 같은 색감 그대로 재현 가능하다.
다량의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폐수가 생기는 재래식 염색공정과 달리 디지털 염색기법은 환경오염 걱정이 없다는 장점도 있다. 또 디자인 파일을 만들 때 화면을 분할해 여러 디자인을 한번에 ‘인쇄’하면 원단을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만능 염색기와 나노잉크 등장 예고
“어떤 색상이든지 디지털 염색기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재래식 염색보다 색상이 선명하고 아주 섬세한 디자인도 그대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여성 브랜드에 안성맞춤이죠.”유한킴벌리 디지털염색사업부 이영우 마케팅 부장의 설명이다.
사실 디지털 염색기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대다. 현수막에 글씨를 쓰는 용도로 시작됐다고 한다. 디지털 염색기법을 처음 상용화한 회사가 바로 유한킴벌리. 전담 사업부를 꾸려 디지털 염색용 프린터와 잉크를 연구하고 있다. 스판, 메시, 러그 같은 특수 원단도 직접 넣을 수 있는 프린터, 입자를 나노 크기까지 축소시켜 원단에 좀더 잘 스며들게 하는 ‘나노잉크’가 바로 현재 개발 중인 야심작.
국내 패션업계와 의상 관련 학과에는 디지털 염색기법이 이미 상당히 ‘전파’돼 있다. 잘 알려진 패션 브랜드 ‘쌈지’의 ‘딸기’ 디자인에도 이 기법이 사용됐다. 패션업체 ‘한성’의 컬러리스트 류정희씨는 “디지털 염색 시스템으로 다양한 디자인 패턴을 시도해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디지털 염색기법은 가로세로 100~200야드(100야드=91.44m) 정도 분량의 원단으로 소량생산하는데 적합하다. 수천야드 이상 대량생산할 경우 재래식 염색공정보다 비용이나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는 게 디지털 염색기법의 향후 과제.
‘패션70s’의 속편 ‘패션00s’. 전편보다 세트가 사뭇 달라지지 않을까. 염료가 담긴 거대한 기계 대신 디지털 염색용 프린터가 설치되고, 주인공 디자이너들은 손에 초크 대신 마우스를 쥐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