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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HS vs 베타

기술 독점보다 기술 공유가 필요하다

요즘 DVD 때문에 인기가 다소 떨어지긴 했지만 비디오 카세트 레코더(VCR)는 우리가 TV 다음으로 가장 많이 애용해온 기기일 것이다. 가정용 VCR에 쓰이는 녹화 기술은 VHS(Video Home System) 방식을 표준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JVC(Japan Victor Company)가 1976년에 개발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녹화 기술 시장의 선구자도 아니었고 대기업도 아니었던 JVC가, VCR을 개발하고 가정용 녹화 기술까지 개발한 소니(SONY)와의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점이다.

1971년 소니는 미국에서 개발된 비디오 녹화기를 개선해 카세트형 테이프로 녹화할 수 있는 VCR을 처음으로 개발했다. 이 성공에 힘입어 1975년 소니는 VCR용 녹화 기술인 베타맥스(Betamax) 방식까지 개발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소니는 가정용 비디오 레코더 시장을 선점하게 됐다.

이듬해 소니에 이어 JVC는 베타맥스처럼 테이프를 이용하긴 하지만 비디오 신호를 코드화 하는 방식이나 테이프 조작 방식 등에서 전혀 다른 VHS를 개발했다. 소니의 베타맥스와 JVC의 VHS 기술은 모두 1971년 소니가 개발한 비디오 녹화기를 토대로 한 것이었지만 호환은 불가능했다.

처음 2년 동안 소니가 개발한 베타맥스는 일본 시장의 58%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그런데 1978년에 접어들면서 베타맥스는 시장 점유율에서 서서히 JVC의 VHS에 밀리더니 1984년에는 판매량에서 4분의 1 수준도 이르지 못했다. 그 후에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고 드디어 1980년대 말 소니는 베타맥스 생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트랜지스터 비디오 테이프 레코더를 개발하면서 전자 기술의 최고봉을 유지하던 소니로서는 뼈아픈 실패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초기에 베타맥스가 성공한 것은 그동안 기술 분야에서 소니가 쌓아온 명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JVC보다 먼저 비디오 녹화 원천 기술을 확보하고, 가정용 재생기도 가장 먼저 상용화한 덕에 소니는 기술적인 명성에서 확고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또 소니는 전자 분야의 기술력도 뛰어나 베타맥스에는 일찍부터 리모트 컨트롤, 스캔 기능, 정지 기능, 하이파이 사운드 등 다양한 기능이 부착돼 소비자들의 구매욕을 자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타맥스는 이런 기술적인 우위만으로 시장에서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VHS를 택한 JVC를 비롯해 다른 회사에서도 이내 이런 기능들을 장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베타맥스와 VHS를 이용한 기기들은 가격이나 제품의 질이 점차 비슷해졌다. 그렇다고 VHS가 베타맥스보다 화질이 좋아서 녹화기 시장을 장악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기술적인 차이보다는 다른 요인이 VHS의 성공을 낳았다.

소니는 처음부터 베타맥스 기술에 대한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고자 이 기술에 대한 라이센스 교부나 주문자 생산 방식 채택을 꺼렸다. 소니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베타맥스 기술을 적용한 녹화기는 반드시 ‘소니’라는 이름으로 생산돼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라이센스를 부여받은 회사에조차 소니의 기술을 개량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하지 않았다. 만일 개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소니의 연구진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자체적으로 기술적 완성도를 높여가면서 제작까지 직접 담당해 시장에서 성공하게 되면 다른 기업에서는 자연스럽게 소니의 베타맥스를 채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소니의 생각이었다.

이에 반해 JVC는 VHS 기술에 대해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JVC는 녹화기 생산에 관심을 갖고 있던 여러 회사가 가능한 VHS 기술을 많이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디자인이 완성되기도 전에 생산 라인을 정비하기 시작한 소니와 달리 JVC는 자체 생산에 주력하기보다 녹화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마쓰시타에게 자신의 기술을 제공하고 마쓰시타 이름으로 VHS 녹화기를 생산하도록 했다.

마쓰시타가 지닌 대량 생산 기술력에 힘입어 JVC는 VHS 녹화기를 소니의 베타맥스보다 싼 가격으로 시장에 확산시킬 수 있었다. 또 마쓰시타가 직접 VHS 기술을 개선하게 해 1977년에는 마쓰시타에서 4시간용 VHS 기기가 생산됐고 미국 시장까지 진출했다.

소니가 라이센스를 받은 회사의 어려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제품 규격을 지킬 것을 요구한 반면 JVC는 이와 반대로 라이센스를 받은 회사가 VHS 기술 개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했다.

JVC의 이런 열린 경영은 점차 VHS를 택하는 생산업체를 늘려갔고, 결국 1984년 일본 녹화기 생산업체의 80%가 VHS를 택하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기술 개방과 적극적인 제휴라는 JVC의 전략은 녹화기 생산업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VHS를 선호하도록 만들었고, 점차 베타맥스를 채택한 녹화기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기술 독점을 통해 시장 석권을 노리던 소니는 결국 1989년 최초의 가정용 비디오 녹화기 베타맥스의 생산을 중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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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박진희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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