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금세기 최악의 괴질이 발생했다. 감염된지 48시간 내에 사망에 이르게 하는 독종 바이러스가 출현한 탓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신종 뇌염으로 수십명이 사망하고 있다. 한국 역시 바이러스의 공포로부터 안전지대가 아니다.
사건 1
5월 6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아프리카 지역 콩고민주공화국에서 괴질이 발생해 63명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다고 밝혔다. 비슷한 시기에 인근 우간다의 광산지대에서 광원들이 같은 증상에 시달리다 며칠만에 52명이 사망했다. 증세의 특징은 고열과 출혈. 병에 걸린지 불과 48시간 이내에 사망하는 금세기 최악의 괴질이었다. 병은 박쥐와 쥐에 의해 전염되며, 감기처럼 공기로 옮겨지지 않고 환자의 체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건 2
5월 13일 보건복지부는 전국에 예년보다 조금 이르게 일본뇌염 주의보를 발령했다. 전남 해안에서 채취한 모기 중에서 일본뇌염을 옮기는 ‘작은 빨간 집모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본뇌염은 치사율이 30%에 달하며, 완치 후에도 기억상실이나 언어장애와 같은 심각한 후유증을 낳는다. 일본뇌염 환자는 1994년 3명이 발생한 뒤 3년 동안 발병사례가 없었으나 지난해 다시 3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병원체는 일본뇌염에 감염된 돼지의 피를 빨아먹은 모기를 통해 사람에게 옮겨진다.
사건 3
5월 26일 경기도 파주 주민 10여명이 광견병에 걸린 개에 물려 1명이 사망했다. 광견병은 개나 소, 또는 야생동물에게 발생하는데, 사람이 병에 걸린 동물에게 물리면 물을 두려워하는 증상을 보여 공수병(恐水病)이라고도 불린다. 미친 개에게 물리면 병원체가 신경줄기를 타고 하루 1cm 정도씩 뇌를 향해 이동한다. 발병 초기에는 식욕이 없어지고 불안하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나중에는 온몸이 굳고 고열이 생겨 사망에 이른다. 일단 발병하면 치사율은 100%. 1984년 이후 발생하지 않다가 올해 다시 등장했다.
지난 5월 국내외에서 치명적인 질병이 등장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바이러스(virus)라는 점이다. 일단 몸에 침투했다 하면 벗어날 방법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방이 최선’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병원체다. 더욱이 (사건 1)에서처럼 감염된지 불과 48시간 내에 사망에 이르게 하는 새로운 독종들이 등장하고 있다. 또 이 기간을 단축시킬 더욱 강력한 바이러스가 출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대체 바이러스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것일까.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존재
바이러스는 기묘한 존재다. 사람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주요 병원체 가운데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이상한 범주에 속한다. 예를 들어 곰팡이나 기생충은 진핵생물, 즉 일반 세포처럼 핵막으로 둘러싸인 핵과 여러 소기관을 가지고 있다. 결핵이나 식중독을 일으키는 세균(박테리아)은 원핵생물로서, 핵막이 없고 소기관이 다소 부족해 진핵생물보다 여러모로 격이 떨어지지만 엄연히 생물이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다르다. 가진 거라고는 유전정보를 지닌 핵산(DNA나 RNA)과 이를 둘러싼 단백질 껍질이 전부다.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거나 물질의 대사를 위한 어떤 도구도 없다. 자신의 몸을 증식할 때도 스스로를 복제할 아무런 수단이 없다. 오로지 숙주세포에 침투해 들어가 그곳의 여러 도구를 활용해 자신을 복제하며 증식시킨다. 생물로 보기에는 현격히 자격 미달인 셈이다. 하지만 일단 숙주세포만 있으면 자신과 같은 바이러스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무생물이라 말할 수도 없다.
문제는 이 볼품 없어 보이는 바이러스가 감기에서부터 에이즈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괴롭히는 지독한 병원체라는 점이다. 정상적인 세포에 침입해 자신을 무수히 증식시키고, 결국 그 세포를 터뜨리고 나가 다른 세포에 달려드는 탓에 세포들의 기능이 온전할 리가 없다. 라틴어로 ‘독’(毒)이란 뜻을 가진 바이러스라는 이름도 이런 까닭에 지어졌다. 최근에는 암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바이러스가 강력한 후보로 지목받고 있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더욱 무서운 점은 자신의 유전자를 끊임없이 변화시켜 정체를 아리송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이 백신을 개발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을 키운다 해도, 바이러스는 자신의 유전정보를 변화시켜 새로운 모양을 갖추어 출몰한다. 이 돌연변이율의 속도는 일반적인 미생물에 비해 무려 1백만배나 빠르다고 한다. 따라서 기존의 바이러스가 언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지 예측하고 대응하기란 매우 어렵다.
(사건 1)의 경우 병원체의 정체는 마버그(Marburg) 바이러스의 신종으로 알려졌다. ‘마버그’라는 이름은 독일의 마버그대학에서 따온 것이다. 1967년 이 대학의 한 연구원이 우간다에서 수입한 녹색원숭이의 조직을 관찰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한데서 유래했다. 당시 환자 31명 가운데 7명이 사망했으며, 이후 세계 곳곳에서 몇차례에 걸쳐 비슷한 환자들이 발견돼 왔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마버그 바이러스가 또하나의 치명적인 바이러스인 에볼라와 모양이 비슷하다는 사실 뿐이다. 에볼라 환자는 1976년 자이레의 에볼라강 유역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3백18명의 환자 중 2백8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환자의 상태는 참혹하다. 모세관이 죽은 혈구 세포로 막혀 곳곳에 멍이 들고, 피부는 물집 때문에 짖물러져 젖은 종이처럼 녹아버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과 귀, 콧구멍에서 피가 솟아나오고, 결국 녹아가는 내장의 검은 찌꺼기를 토하다 사망에 이른다.
세계보건기구의 경고
마버그와 에볼라는 모두 실타래처럼 생겼다. 하지만 이들에 의한 질환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을 통틀어 '아프리카형출혈열' 이라 부른다. 치사율이 80%에 이르기 때문에 일단 감염되면 손을 쓰지 못한다. 더욱이 감염된 이후 사망하기까지의 시간이 무척 짧다. 에볼라 환자의 경우 통상 감염된지 2주 내에 사망한다. 놀랍게도 이번 마버그 바이러스는 그 기간을 불과 이틀로 단축시켰다. 과학자들이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히기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금방 사망하기 때문이다. 숙주가 사망하면 바이러스 역시 죽기 마련이다.
최근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한 뇌염 역시 새로운 바이러스가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3월 26일 말레이시아 정부는 작년 10월부터 발생한 1백66명의 뇌염환자 중 6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발병의 주범은 일본뇌염 바이러스와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뇌염바이러스로 추측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일본뇌염이나 광견병이 신종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는 보고는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신종 바이러스의 위협에 대한 세계적 관심은 최근에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세계보건기구는 1996년 ‘세계보건보고서’에서 지구가 전염병으로 연간 1천7백만명이 사망하는 ‘보건위기’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에서는 20세기 흑사병으로 불리는 에이즈나 에볼라와 같은 전염성이 높은 새로운 질병들이 전례없이 빠른 속도로 생겨나고 있으며, 지난 20년동안 최소한 30개의 새 질병이 발견됐지만 상당수는 아직 치료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67년부터 1990년까지 심각한 증상을 일으키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20여종이나 출현했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는 1997년 4월 7일 ‘세계 보건의 날’을 맞아 “전염병 시대 다시 오다 - 우리 모두 관심을, 우리 모두 대응책을”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또 지난 5월 11일에 발표된 보고서에는 작년 세계에서 최소한 2백28만명이 에이즈에 의해 사망함으로써 심장병, 발작, 호흡기질환에 이어 치사율 세계 4위를 기록했다는 점이 명시됐다. 일부 학자들이 경고하듯 21세기는 바이러스에 의한 새로운 전염병의 시대가 도래할 듯한 분위기다.
비자도 국경도 없다
한국은 신종 바이러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까. 다행히 현재 한국에서만 발생하는 고유의 풍토병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립보건원 바이러스질환부의 조해월 부장은 “한국에서 발생하는 바이러스질환인 소아마비, 홍역, 일본뇌염 등은 법정 전염병으로 이미 백신이 개발돼 있어 사전에 예방하면 발병의 우려가 없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외국에서 수입돼 온 새로운 악성 질환이다. 대표적인 예가 에이즈다. 1981년 미국에서 처음 에이즈 환자가 발견된 이래 1985년 국내에서 첫 환자가 발생했으며, 지난 4월 4일 현재 그 수가 9백18명에 이르고 있다.
현재 에이즈 바이러스는 체액 접촉을 통해서만 전염된다. 하지만 만일 이 바이러스가 공기로 감염될 수 있는 새로운 변종으로 둔갑한다면 어떨까. 이에 대한 대비책이 마련돼 있지 않다면 마치 겨울에 감기가 확산되는 속도처럼 빠른 시간 안에 다수가 사망에 이를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위험의 가능성은 도처에 깔려있다. 증상이 심한 환자가 방역망을 피해 비행기에 탑승하고, 그 환자에게 많은 채액이 분비된다면 옆좌석의 승객에게 전염될 수도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문명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인간의 생활권이 확대됨으로써 세계가 더욱 가까워진 만큼 다른 나라의 바이러스와 만날 기회가 많아지고 있는게 사실이다. 세계에서 무역 10대국에 속해 있는 한국으로서도 신종 바이러스의 위협을 남의 일로만 여길 수 없는 듯하다.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은 '비자도 국경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