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음식 몇 가지를 들어보라면 김치는 단연 으뜸이다. 얼큰시큼한 맛도 맛이지만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영양 공급원으로서 김치는 매력적이다. 오랜 외국 생활 중에도 김치를 직접 담가 먹으며 향수를 달래는 게 한국인의 일반적인 정서다. 한국인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김치가 뒤따른다. 2007년이면 한국인이 우주에 간다. 김치도 우주에 따라갈 수 있을까?
특명, ‘김치 맛을 사수하라’
한국원자력연구소 방사성이용연구부 변명우 박사팀은 2003년부터 우주김치를 개발해오고 있다. 변 박사는 “김치가 완전히 숙성되기 전 방사선을 쐬면 오랫동안 맛과 신선도를 유지하며 이 과정에서 방사능 피해는 전혀 없다”고 설명한다.
보통 김치는 젖산균과 효모, 기타 미생물이 서로 작용해 고유의 맛을 낸다. 젖산균은 병원성 미생물을 공격해 김치가 상하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몇 개월 이상 장기 보존해야 하는 우주식품에서 이들 미생물은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계속 발효되면서 맛이 변하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
변 박사팀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치에 방사선을 쏘아 멸균처리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강한 에너지의 방사선을 김치에 쬐어 미생물을 없애는 이 방식은 지금까지 나온 김치 보존방법 중 신선도를 가장 높게 유지해준다. 여기에는 코발트(Co-60) 같은 동위원소에서 나온 감마선이나 가속기에서 갓 나온 전자선을 사용한다.
최근 들어 방사선 처리과정이 주목받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조사에 따르면 우주인이 겪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는 것. 수면부족과 정서적인 문제는 다음 순이었다. 열흘 이상 우주에 장기 체류하는 우주인에게 음식문제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우주인이 먹는 음식이 과연 어떻길래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일반적으로 우주식품은 냉동 건조처리된 후 특수처리된 백에 진공 포장된다. 이 과정에서 수분은 거의 모두 빠져나가게 된다. 수분을 없애는 까닭은 음식을 오랜 기간 보존하려는 목적이기도 하지만 발사중량을 줄이기 위해라고 보는 게 맞다.
1kg 당 발사비용이 6000만원이 든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주인이 먹을 음식물 무게마저 최소로 줄이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다.
문제는 수분이 빠진 음식은 맛이 없고 공복감도 크다는데 있다. 가뜩이나 무중력 상태에서는 입맛도 없는데다 배고픔을 쉽게 느끼지 못해 우주인이 영양부실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보고되곤 한다. 끼니를 굶거나 편식을 하는 우주인이 늘자 NASA도 날짜별 시간별로 식단을 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NASA 소속 식품영양학자들은 최근 이점에 주목해 음식물의 수분 함량을 늘리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방사선 조사 방식이 관심을 끄는 이유도 수분이 있는 식품을 가공 처리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이다.
미-러 틈새 비집고 3위 공략
변 박사는 “김치가 한국 최초의 우주식품으로 결정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미 세계인에게 김치는 한국을 알리는 ‘코드’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변 박사는 “우주김치는 한국 우주인이 굳이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 우주인에게도 얼마든지 인기를 끌 수 있는 경쟁력을 갖췄다”고 평가한다.
우주김치의 공급 시기는 2007년쯤으로 예상된다. 러시아 소유즈 우주선에 탑승할 한국 우주인에게 우주김치를 공급할 계획이다. 우주김치 생산을 위한 준비가 이미 시작됐다. 연구팀은 지난 4월 CJ와 공동으로 한국형 우주식품을 개발키로 협약을 체결하고 6월부터 본격적인 제품 개발에 들어간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원자력연구소는 원천 기술을, CJ는 제품화에 필요한 응용기술과 시설을 각각 대게 된다. 연구소측은 “1년 10개월간 진행될 이번 프로젝트가 끝날 2007년 상반기엔 완제품 형태의 우주김치를 맛볼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우주인의 신체기능을 보호하는 기능성 식품과 약품도 함께 개발된다. 중력이 없는 환경에서 오랜 시간 체류하는 우주인들은 근무력증이나 골연하증, 면역기능 저하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선체를 뚫고 들어온 강한 우주선의 영향으로 신체 면역기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원자력연구소는 생약성분을 이용해 방사선 노출에 따른 부작용을 예방하는 방사선방호제와 기능성식품을 생산할 예정이다.
한편에서 국제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현재 우주식품 생산 능력이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미국과 러시아 단 두 나라뿐. 우주비행사를 배출한 유럽과 중국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NASA 우주식품개발센터(FTCSC)와 러시아 생화학문제연구소(IBMP)는 세계적인 우주식품연구소로 이름이 나있다. 이 중 FTCSC는 1960년대 아폴로 계획을 성공리에 추진해오면서 식품개발과 관련해 연구결과를 꾸준히 내놓고 있다. 원자력연구소는 지난해 말 우주식품개발센터와 협력 협정을 맺은데 이어 올해 초 ‘우주식품과 우주인의 생체방어시스템 국제공동연구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러시아측과 협력도 모색 중이다. 이르면 올 상반기 중 IBMP 관계자가 대덕에 있는 연구소를 방문해 우주 생활환경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설명하고 기술이전 등 구체적인 공동 연구방안을 세울 예정이다. 이처럼 변 박사팀이 우주식품의 상용화를 서두르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향후 우주개발과 함께 우주생필품 시장도 더욱 확대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원자력연구소 생명공학기술개발팀 조철훈 박사는 “NASA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경 우주를 여행하는 여행객수가 2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며 “미국과 러시아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현재 시장에서 영역을 차츰 넓혀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연구팀은 현재 김치로 한정돼 있는 우주식품의 품목을 점차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원자력 연구소 조철호 박사는 “김치 말고도 된장, 찌개류, 마른반찬 같은 우리나라의 다른 음식들도 얼마든지 우주식품으로 가공해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김치 개발이 성공하는 대로 된장 등 다음 소재를 찾아 나설 예정이다.
오는 2010년경 정읍 방사선 연구소 내에는 가상의 우주환경이 들어선다. 연구원들은 이곳에서 우주와 똑같은 조건에서 일어날 인간의 생리 변화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우주식품 개발에 실제 적용하게 된다. 특히 장거리 우주여행에 대비해 우주선 안에서 농작물을 생산하고 가공하는 방법부터 폐기물을 처리하고 재활용하는 전 과정이 세계에서 3번째로 구축될 전망이다.
우주식도 이젠 맛 대 맛~!
● NASA가 매년 개최하는 여러 경진 대회 중 유독 눈길을 끄는 대회가 있다. 우주식품개발센터가 주관하는 우주식품경진대회다. 2000년부터 열리고 있는 이 대회는 대학원 이하 식품공학 전공자나 영양학 전공자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 대회 개최 목적은 명확하다. 우주 개발에 필요한 첨단식품 가공기술의 아이디어를 얻자는 것. 장거리 우주여행에 맞는 식품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이 대회를 통해 수집된다. 이 때문에 세계적 식품생산업체들도 매년 후원에 나서는 등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 대회 참가자들은 먼저 음식물 조리부터 포장을 비롯해 장거리 우주여행에 맞는 식품처리 방법을 제출한다. 이를 기준으로 NASA와 식품산업계 대표로 구성된 심사의원단은 참가팀들의 제안과 실제 가공된 우주식품을 평가하게 된다. 평가 기준은 제법 까다롭다. 먼저 재료는 NASA가 장거리 우주여행을 위해 세운 생명지원프로그램에서 지정한 농작물이어야 한다. 또 전자레인지와 냉장고, 오븐만을 이용해 조리하고 재료 하나로 여러 음식을 만들수록 점수가 좋다. 40대 이상 남녀에게 맞는 칼로리와 영양소가 들어있어야 한다.
● 지금까지 이 대회를 통해 처음 선보인 우주식품만 수십 가지. 우주인을 위해 특별 제작한 피자, 요구르트, 고단백 우유 등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식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난해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팀이 선보인 ‘Veg@eez’가 최우수상에 뽑혔다. 3겹으로 된 이 야채스프레드는 우주인이 먹기 쉽게 다양한 야채를 한데 담았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