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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노벨상 Best3 vs Worst3 : 생리·의학 - 특정 질병에 특정 치료법, 최초이자 최고

기생충이 암의 원인, 최악의 실수

현재에도 정복해야 할 질병, 암. 1926년 노벨생리∙의학상은 기생충이 암의 원인이라고밝힌 업적에 돌아갔다. 지금 보면 당연히 잘못된 수상이자 최악의 수상. 반면 1901년 노벨생리∙의학상이 수여된 베링의 디프테리아 치료법은 최초이자 최고로 평가받을 수 있다. 서양 근대의학의 수준을 한단계 높였기 때문이다. 역대 노벨생리∙의학상 베스트3과 워스트3을 만나보자.

1901년부터 2001년까지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들의 명단을 죽 늘어놓고 보니 그 이름들 대부분이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좀 오래된 업적은 역사책에, 비교적 최근의 업적은 교과서에 실려있기 때문인 듯하다. 의과대학이나 생명과학 관련학과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 태반이다. 물론 가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름도 있지만 말이다.

베링, 서양 근대의학 수준 높여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업적 모두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업적이며 새로운 분야나 영역을 개척한 업적이다. 이 때문에 어찌어찌 골라낸 베스트3이라는 것도 주관적인 편견의 결과임을 우선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세가지 판단 기준을 세웠다. 첫째 학문적으로 수많은 분야에 파급효과를 불러왔거나 전혀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는가, 둘째 실제적인 환자 치료에 큰 도움이 됐는가, 셋째 의학사나 과학사의 진로를 바꿨거나 심지어 사회 변화를 일으켰는가 라는 기준으로 베스트3을 선택했다.

이 기준을 들이댔을 때 베스트1은 첫번째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베링(Emil Adolf von Behring, 1854-1917)이다. 그는 당시까지 대단히 흔했던 소아기 질병인 디프테리아에 대한 효과적인 항혈청요법(디프테리아 독소에 대한 항체를 환자에게 주사해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한 공으로 1901년 최초의 노벨상을 받았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질병 치료법이 등장했다는 점 외에도 커다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어느 질병에 대한 특별한 치료법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두창(천연두) 예방접종, 파스퇴르가 개발한 몇가지 백신, 그리고 말라리아 치료제 키니네 등을 제외하고는 의사가 쓸 수 있는 치료 수단이란 아편, 마취제, 소염제 등의 일반적인 약제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베링의 항혈청요법으로 인해 특정 질병에 대한 특정 치료법이 개발될 수 있게 됐으며, 그 결과 서양 근대의학이 다른 의학체계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또한 그 뒤를 이은 항혈청요법의 원리에 대한 탐구와, 부작용인 혈청병에 대한 연구는 에를리히와 메치니코프(1908년 수상), 리셰(1913년 수상) 등의 업적으로 연결됐다. 나아가 근대 면역학의 기초를 놓았으며 20세기의 과학적인 병태생리학(질병의 발생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학문)을 향한 길을 열었다.

질병 정복의 꿈, 페니실린

베스트3의 2번째는 플레밍(Alexander Flemming, 1881-1955)과 체인(Ernst Chain, 1906-1976), 플로리(Howard Florey, 1898-1868)가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대량생산한 업적(1945년 수상)에 돌아가야 할 것이다. 현대의 의료에 있어 항생제의 중요성이란 더 강조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체인과 플로리가 천연 항생물질을 대량으로 생산하는데 성공해 다른 항생물질을 탐색하고 제조하는 산업화가 촉진됐으며 다국적 거대제약회사들이 등장했다. 오늘날 의학기술과 새 치료법의 발전은 이 회사들을 제외하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페니실린과 그 뒤를 이은 다른 항생물질 덕분에 인류는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잠시나마 꿈꿀 수 있었다. 즉 20세기까지 대부분의 나라에서 최대의 건강문제였던 감염성 질병들을, 한쪽에서는 예방백신의 개발, 다른 한쪽에서는 이들을 치료하는 항생물질의 개발로 인해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것이다.

21세기가 시작된 지금 이런 기대는 결국 헛된 것으로 판명됐다. 즉 항생물질의 사용은 병원균의 진화를 불러일으켜 항생제에 견디는 ‘내성균’을 출현시켰던 것이다. 이들은 이전보다 더한 독성으로 인류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균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좀더 빠른 속도로 더 강력한 항생물질을 개발해야 한다. 물론 작은 종기 하나로도 목숨을 잃기 쉬웠던 불과 반세기 전을 돌이켜본다면 항생제에 거는 우리의 기대는 아직도 크다.

이중나선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마지막 최고의 업적은 아무래도 왓슨(James Watson, 1928-), 크릭(Francis Crick, 1916-), 윌킨스(Maurice Wilkins, 1916-)에 의한 DNA 이중나선구조의 발견(1962년 수상)이다. 1953년 4월 영국의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이에 대한 짤막한 논문은 근대생물학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으며, 분자생물학의 시대를 열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후 레더버그(1958년 수상), 오초아와 콘버그(1959년 수상), 제이콥과 모노(1965년 수상) 등의 업적을 통해 DNA의 발현과정, 합성과정, 조절과정, 그리고 단백질 합성과정 등이 밝혀졌다.

이로써 인위적으로 유전물질을 조절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21세기 최고의 유망산업이라 일컫는 생명공학기술이 가능하게 됐다. 또한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완성을 통해 많은 질병이 유전적 원인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앞으로 질병 현상을 바라보는 인류의 관점에 큰 변화를 일으킬 전망이다.

쉽지 않은 암발생 메커니즘

워스트3의 선정은 베스트3에 비하면 비교적 쉬운 편이다. 우선 수상 업적이 나중에 틀린 것으로 판명된 경우가 있다. 1926년 수상자인 피비거(Johannes Fibiger, 1867-1928)는 쥐에서 기생충인 스파이롭테라(spiroptera)가 위암을 일으킨다는 실험적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런데 후에 이런 사실이 인간의 암발생 메커니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떻게 권위 있는 노벨상에 이 같은 실수가 있었을까. 이는 당시에 비교적 새롭고 계속 증가하던 질병인 암에 대한 사회적 공포가 대단했던데 반해 암발생 메커니즘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학자들은 암이 지속적인 화학적 자극에 의해 일어난다고 봤다. 그들은 또 특정한 세균(미생물)이 특정한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하는 코흐(Robert Koch)의 전제에 의거해서 암의 원인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생각과는 달리, 암은 그 발생 과정에서 매우 다양한 인자가 작용해 여러 단계를 거쳐 일어난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또 특정원인-특정질병-특정치료법이라는 미생물 병인론식의 사고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이 알려졌다. 참고로 주요 사망원인이 되는 암의 확실한 원인으로 처음 밝혀진 것은 폐암의 원인인 담배로 1950년대 영국 의사 힐(B. Hill)에 의해 증명됐다. 이는 실험적 연구가 아닌 대규모 역학적 연구에 의해 가능했다.

질병 퇴치냐 생태계 파괴냐

나머지 두 업적은 공교롭게도 1948년과 19 49년에 연달아 수상된 업적이다. 즉 1948년 수상자 뮐러(Paul Mu촯1er, 1899-1965)에 의한 살충제 DDT의 효과에 관한 연구와 1949년 수상자 모니츠(Antonio Egas Moniz, 1874-1955)에 의한 전두엽절제수술(leucotomy)의 효과에 관한 연구다.

뮐러는 1933년 먹는 기생충약으로 개발된 DDT 화합물이 곤충의 몸에 닿으면 살상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DDT는 매우 효과적으로 곤충을 죽이는데다가 즉각적인 인체 독성이 없었기 때문에 곧 널리 보급돼 질병을 전파하는 모기, 벼룩, 이 등의 위생곤충을 방제하는데 쓰였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은 그 이전과는 달리 말라리아, 발진티푸스, 재귀열(보렐리아균에 의해 일어나는 열병)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최초의 전쟁이 됐다. 뮐러가 노벨상을 받은 후 DDT는 특히 제3세계에서 말라리아와 황열병(황열병 바이러스에 의해 일어나는 열병)을 방제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6.25 직후의 우리나라도 이런 국가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60년대가 지나면서 DDT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바로 DDT가 환경 내에서 쉽게 분해되지 않는 점이 문제였는데, 이것이 곤충의 몸에 축적돼 있다가 먹이 사슬을 통해 생태계 전역으로 퍼져나가 자연계의 모든 동식물에 영향을 주어 생태계를 파괴시킨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 미국 정부는 1972년부터 DDT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제3세계 국가에서는 값싸고 효과 좋은 DDT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장래의 생태계 파괴보다는 당장의 질병이 더 큰 문제라는 그들의 주장도 전혀 무시할 수만은 없다.
 

워스트1 요한네스 피비거. 암의 원인을 기생충이라고 밝 힌 그의 업적은 후에 커다란 실수로 밝혀졌다.


정신병을 수술로 치료한 업적?

포르투갈의 신경외과의사 모니츠는 여러 종류의 정신과 질환(우울증, 성격장애, 정신분열증 등)을 뇌 일부의 절제·절단 수술(leucotomy)로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를 정신외과(psychosurgery)라 불렀다. 여러 시술 결과는 난폭하고 도무지 통제 불가능했던 정신과 환자들이 수술을 받은 뒤 얌전해지고 일과 사회생활도 할 수 있음을 보여줬고, 마침내 모니츠는 노벨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당시까지 정신병의 원인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적절한 치료약물도 없었다(정신병 치료약물인 항정신약물 대부분은 1950년대 이후 등장했다). 따라서 뇌의 이상으로 생긴 정신병을 뇌조직을 절제해 치료한다는 정신외과의 원리는 다른 질병의 치료와 매우 흡사했으며 당시 의학의 패러다임과 잘 맞았다.

특히 이 수술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심한 충격을 받고 돌아온 상이군인들에게 남용됐으며, 다른 모든 수술처럼 점점 그 범위가 확산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 수술의 좋지 않은 후유증이 드러났다. 즉 자발성, 창의성, 독립성과 같은 고등 정신기능이 약화되고 의존적 성격이 되며 심지어 인격의 변화까지 일어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자 수술 자체가 비인도적이라는 비난이 일어났다. 때마침 효과 좋은 새 항정신약물이 도입되면서 이런 비판에 힘을 실어줬다. 그 결과 아주 극단적인 환자의 경우(매우 심하고 병소가 확실한 간질 등)를 제외하고는 1960년대 이후 정신외과 시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이 두 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시상황의 조급성, 기술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노벨상 1백주년, 지난 한세기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인류가 바로 이런 점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데 있을지도 모른다. 의학과 생리학은 계속 발전되고 이 분야에서 더욱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앞으로도 배출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업적은 좀더 겸허하고 신중하며, 우주와 자연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적절하게 제시하는, 그런 것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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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권복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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