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부아지에가 연소 현상을 연구하기 100여년 전 영국의 화학자 메이오는 연소와 호흡이 공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메이오는 1674년 출간한 책에서 공기가 두 가지 성분의 혼합물이며 물질이 연소하면 그 중 하나를 흡수한다고 설명했다. 또 물질이 연소할 때 필수적으로 흡수하는 그 성분이 공기에 탄성을 부여하고, 이 성분이 빠져나가면 공기가 쉽게 압축돼 부피가 줄어든다고 해석했다.
1724년 영국의 식물학자 헤일스는 메이오의 실험을 재현했다. 하지만 헤일스는 메이오의 연구 중 공기의 탄성에 관한 부분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공기가 몇 가지 성분의 혼합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깊이 탐구하지 않았다. 그는 밀폐된 컵 속에서 양초를 연소시키면 공기의 탄성이 줄고 부피도 준다는 실험 결과만을 강조했다.
1774년 드디어 영국의 화학자 프리스틀리는 메이오가 설명한 연소 시 필수적인 성분과 헤일스가 강조했던 탄성을 조절하는 성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였다. 그는 지름 12인치, 초점거리 20인치인 커다란 렌즈로 빛을 모아 산화수은에 센 열을 가했다. 그 결과 물에 녹지 않는 기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기체 속에서 양초에 불을 붙이자 불꽃이 훨씬 크고 화려해졌다. 그는 직접 기체를 들이마시기도 했는데, 그 순수한 기체가 언젠가는 호사가들의 필수품이 되리라고 예견했다. 오늘날 산소를 통에 넣어 팔기도 하니까 250여년전 그의 예측이 아주 빗나간 것은 아니다.
프리스틀리는 놀라운 발견을 했지만 자신의 발견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메이오와 달리 프리스틀리는 공기가 여러 성분의 혼합물이 아니라 단일한 성분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연소나 호흡 시 공기의 성질이 변하는 것은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플로지스톤을 포함하고 있던 공기가 연소나 호흡을 거치면서 플로지스톤이 적게 포함된 공기로 바뀐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리스틀리는 오히려 자신이 플로지스톤을 제거한 더욱 순수한 공기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와 생각이 달랐다. 그는 공기를 두 가지 기체의 혼합물이라고 본 메이오가 옳다고 생각했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실험과 해석에 대해 자신은 다르게 생각한다는 논평을 내고, 연소 후 남은 기체는 공기의 3/4을 차지하는 성분으로 연소나 호흡에 필수적인 성분이 제거되고 남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험은 간단했다. 만약 물질을 연소시켰을 때 사라진 기체를 연소시킨 물질에서 다시 분리해 낼 수 있고, 그 기체를 다시 남은 기체와 섞어 공기가 되는 것을 보여주면 자신의 주장이 옳고 프리스틀리의 주장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
1777년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프리스틀리의 실험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다. 우선 그는 유리병을 준비해서 공기를 넣고 밀폐했다. 그런 다음 유리병 속에 순수한 수은 4온스(약 124g)를 넣은 뒤 유리병을 12일 동안 물이 끓는 온도에서 보관했다. 12일째 되는 날 불을 끄고 병을 식힌 다음 공기의 양을 쟀다. 공기가 1/6가량 줄어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수은의 상당량이 산화됐다는 것도 관찰했다. 산화된 수은의 무게를 정밀하게 측정했더니 45그레인(약 3g)가량 늘어난 것을 발견했다. 유리병에 남아 있는 공기 속에서 양초를 태웠지만 타지 않았다.
라부아지에가 이 실험을 한 이유는 산화수은이 공기 무게의 1/12에 해당하는 성분과 수은이 결합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와 달리 산화수은 자체가 공기 중에서 수은이 천천히 연소해서 생긴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수은과 결합해서 산화수은을 만든 성분은 공기 중에서 호흡을 돕는 성분이었고, 남은 부분은 호흡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성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산화수은에 결합한 성분을 다시 떼내 공기 중으로 돌려보내고 그렇게 얻은 공기가 보통 공기와 같은지 비교하는 것이었다. 라부아지에는 앞의 실험에서 얻은 45그레인의 산화수은을 조심스럽게 긁어모아 작은 유리관에 넣고 프리스틀리가 했던 것처럼 렌즈로 빛을 모아 가열했다.
라부아지에는 가열해서 발생한 기체를 모아 부피를 쟀다. 그랬더니 수은이 연소되면서 줄어들었던 기체의 부피와 거의 같은 것이 아닌가. 게다가 앞의 실험에서 남은 기체와 이번 실험에서 얻은 기체를 섞었더니 보통 공기와 똑같은 공기가 됐다. 그의 예측이 옳았던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산화수은에서 얻은 기체의 이름을 ‘산소’(oxygen)로 지었다. 그 기체가 산의 진정한 성질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부아지에가 어떻게 생각했든 이 이름은 조금 성급한 감이 없지 않다. ‘산소’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40년은 더 지나야 사람들이 산의 성질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라부아지에의 산소 발견 실험은 그가 연소의 원리를 밝히기 위해 노력한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정확한 측정을 통해 연소 현상을 계량적으로 연구하는데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은 실험과 동일한 실험을 수은 대신 주석을 써서 하기도 했는데, 주석을 공기 중에서 천천히 산화시킨 후 다시 산화주석을 분해해 산소를 발생시키는 실험을 하면서 산화 전과 후의 주석 무게를 정밀하게 측정해 이 때 출입한 기체의 무게를 계산했다. 현대 기준에 비춰보면 라부아지에의 측정은 그리 믿을만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산화 전후에 같은 양의 산소가 출입한다는 가설의 토대는 한층 튼튼해졌다.
라부아지에의 실험은 메이오, 헤일스, 프리스틀리와 같은 기체화학자들의 실험과 획기적으로 다르다기보다는 이들의 실험을 세련되게 다듬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적당한 평가일지도 모르겠다.
라부아지에가 산소가 공기의 탄성에 미치는 영향이 다른 성분과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을 보면 그 자신도 프리스틀리가 집착했던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사람이라고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메이오는 ‘새로운 공기’를, 프리스틀리는 ‘플로지스톤이 제거된 공기’를 발견했지만 그 이름이 라부아지에가 만든 ‘산소’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이 발견한 것이 산소가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라부아지에는 화학 현상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 안에 산소를 놓았고 이로 인해 오랫동안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플로지스톤 이론은 큰 위기를 맞았다.
결국 라부아지에가 산소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플로지스톤 이론이 붕괴되고 근대 화학이 성립하는 길목에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제공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라부아지에를 통해 ‘화학혁명’이 일어났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1743년 프랑스 파리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가족들의 바람대로 법학을 공부해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조세를 담당하는 관리가 돼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37세에는 국세청장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바쁜 공직생활 중에도 과학연구를 결코 손에서 놓지 않을 만큼 과학자는 그의 필생 업이었다. 그는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26세에 프랑스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고, 45세에는 바다 건너 영국의 왕립학회 회원이 됐다. 1771년 라부아지에와 결혼한 마리안느는 그의 연구를 영어로 번역해 널리 알렸고, 그를 위해 영국 과학자들의 저작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등 라부아지에의 과학연구에 많은 도움을 줬다. 1794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혁명 당시 구체제의 인물로 몰려 참수형을 당했다.
재현실험
라부아지에의 실험은 중학생들도 물상 교과서에 실린 대로 따라 해보면 쉽게 재현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다만 라부아지에는 산소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했지만 더 이상 산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므로 요즘에는 화학반응 전후에 질량이 보존된다는 ‘질량보존의 법칙’을 보여주는 실험으로 등장한다.
라부아지에가 수은과 주석을 산화, 환원시킨 과정을 좀 더 다루기 손쉬운 물질들을 이용해 재현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소가 들어있는 전구에 전류를 흘리면 전구 속의 마그네슘은 모두 타지만 타기 전후의 질량이 서로 같다는 것을 보이는 실험이 있다.
또 아연 조각을 묽은 염산이 들어있는 플라스크에 넣고 재빨리 고무풍선을 씌운 다음 전자저울 위에 놓으면 발생한 기체 때문에 고무풍선은 부풀어 오르지만 전자저울의 숫자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하는 실험도 있다. 두 실험 모두 산소를 주고받는 연소나 산화 환원 과정을 보여주는데, 실험에서 강조하는 것은 산소를 주고받는 것보다는 과정 전후에 질량의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