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네바는 각종 국제기구가 몰려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세계보건기구(WHO), 국제노동기구(ILO), 세계무역기구(WTO)의 본부는 물론 유엔(UN) 유럽사무소가 이 도시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네바는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국제적인 지위를 갖는 도시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CERN은 현대 물리학의 최대 미스터리인 우주탄생의 비밀을 파헤치는 세계 최대의 입자물리연구소다. 그 명칭에 유럽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담고 있지만 사실은 유럽의 국가나 과학자만이 참여하진 않는다. 현재 유럽을 포함, 86개국에서 1만여명의 과학자가 CERN의 연구에 동참하고 있다. 전세계 입자물리학자가 약 1만3000명 정도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CERN이 과학계에서 하나의 국제기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올해 CERN은 설립 50주년을 맞이했다. CERN은 크고 작은 기념행사들을 개최해 왔는데, 그 가운데에서 대중을 위한 최대 이벤트가 지난 10월 16일에 펼쳐졌다. ‘50주년 오픈데이, 50곳 행사’로, CERN은 이 행사를 그들의 역사상 가장 공을 들인 대중행사라고 밝혔다. 기자는 10월 중순 이 행사 취재를 위해 제네바로 향했다.
하루방문객 3만명
제네바엔 며칠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행사 당일인 16일에는 거짓말같이 구름 사이로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전날 만난 CERN의 로베르트 아이마 소장은 “오픈데이에 3만명 이상이 찾아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자는 소장이 과장을 좀 하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행사당일 오전 9시가 되기도 전에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CERN은 금세 북적대기 시작했다. 제네바 시내버스는 중고교 등굣길에 탔던 버스처럼 사람을 꽉꽉 채워 CERN에 도착했다. CERN으로 오는 길을 따라 있는 정거장에는 사람들이 한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뿐 아니라 CERN의 주변 공터에는 유럽전역에서 단체 방문객을 싣고 온 대형버스들로 즐비했다. 소장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그날 CERN의 방문객은 총 3만2000여명으로 추산됐다.
CERN은 우주탄생, 즉 빅뱅을 재현하기 위한 새로운 가속기를 건설하고 있다. 2007년 완공 목표인 거대강입자가속기(LHC, Large Hadron Collider)가 바로 그것이다. 평균깊이 100m 지하에 둘레 27km인 LHC는 양성자 빔을 27km의 원형 터널 속에서 초전도전자석으로 가속해 막대한 에너지를 갖게 만든다. 그런 다음 2개의 양성자 빔을 정면충돌시키는데, 이때 충돌로 생성된 에너지의 밀도는 빅뱅이 일어난지 1조분의 1초가 지난 때와 같다고 한다. 이런 방법으로 빅뱅을 재현함으로써 과학자들은 질량의 기원입자로 여겨지는 힉스입자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LHC의 실험그룹은 독자적인 검출기를 가진 ATLAS, CMS, ALICE, LHCb으로, 크게 네 그룹으로 나눠져 있는데, 27km의 원형가속기 주변에 흩어져 있다. 오픈데이 50곳 행사도 이들 네 그룹 실험실에서 뿔뿔이 흩어져 열렸다. 여기저기서 CERN의 연구에 대한 안내는 물론 각종 과학실험과 논쟁, 연극 등이 펼쳐졌다. 행사 당일에는 제네바 시내버스가 셔틀버스로 운행됐다.
아이마 소장은 “이번 오픈데이 행사는 역대 행사 가운데 최대로 매우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면서 “CERN 내부 거의 대부분을 방문할 수 있는 대대적인 개방이다”고 강조했다.
과학자가 자원봉사자로 참여
하루 방문객 3만2000여명, 이 정도는 국내 최대 테마파크인 에버랜드의 하루평균 방문객 수와 거의 비슷하다. 그렇다면 CERN은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었을까?
운영의 핵심은 CERN 과학자들의 자원봉사에 있었다. 행사장 곳곳에는 50주년 기념마크가 새겨진 옷을 입은 자원봉사자가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 앞에서 방문객들은 진지한 눈빛으로 설명을 듣고 질문을 한다.
이날 참여한 자원봉사자는 총 900명. CERN은 이 행사를 위해 자원봉사자를 미리 모집했다. 또한 자원봉사자들에게 행사안내는 물론 방문객들의 안전까지도 책임지도록 미리 교육도 실시했다. ALICE 그룹에 속해있는 한국인 과학자 김진숙씨가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는데, 그는 “자원봉사는 처음인데, 사람들이 내가 무엇을 하는지를 알고 가는 게 뿌듯하다”고 말했다.
ALICE 그룹의 실험실에서는 50m 깊이의 지하 가속기 장치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을 들어갔다 나온 프랑스 리옹에서 온 단체 방문객들을 만나봤다. 그들은 “ALICE 그룹의 검출기에 들어가는 물건을 납품하는 업체 직원으로 가족과 함께 방문했다”면서 “자신들의 제품이 어떤 일에 쓰이는지를 비롯해 CERN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행사일의 CERN은 유원지 같은 인상이었다. 실제로도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여느 유원지와 마찬가지인 가족단위가 대부분이었다. 어린 손자를 데리고 온 노부부, 아직 돌도 넘기지 않은 아기를 안고 찾아온 부부, 청소년을 둔 부모가 어디에든 있었다. 어찌보면 별 관심거리가 될만하지 않은 입자물리연구소에 사람들이 이렇게 찾아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과학의 발생지가 유럽임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사를 알고 찾아오는 것일까. 한 방문객은 “슈퍼마켓에서 우연히 행사를 소개하는 전단지를 봤다”면서 “이를 보고 인터넷에 접속해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고 방문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번엔 제대로 못봐서 다음에 다시 와봐야겠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CERN은 이번 행사를 알리기 위해 TV나신문을 비롯한 주요 미디어 홍보에 노력을 기울였다.
평상시에도 열려있다
CERN은 과거에도 창설 10주년, 25주년, 30주년, 40주년의 기념행사를 가져왔다. 그러나 초창기 행사들은 CERN을 구성하는 회원국의 대표만이 참석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대중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고 한다. 그 일환으로 출현한 것이 오픈데이 행사다. 오픈데이에는 CERN은 온가족을 위한 오락과 축제장으로 변신을 꾀했다.
사실 CERN은 특별한 날에만 대중을 향해 문을 열어놓는 것이 아니다. CERN의 교육 및 커뮤니케이션 책임자인 제임스 길리스 박사는 “평소에도 다양한 방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해마다 수만명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CERN이 평상시 운영하는 대중방문 프로그램은 크게 두가지다. 먼저 CERN에 대해 궁금한 누구나 쉽게 언제나 찾아갈 수 있도록 상설 전시관 ‘마이크로코즘’을 운영하고 있다. 마이크로코즘에서는 우리우주에 대한 과학적인 소개와 함께 CERN의 역사는 물론 현재 이뤄지는 연구에 대해 자세하게 접할 수 있다. 마이크로코즘은 매년 3만명이 방문한다.
또다른 방문 프로그램은 ‘가이드 투어’.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하지만 연구소를 돌아다니며 CERN의 과학자로부터 직접 안내를 받으며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찾아오는 사람은 매년 2만명 수준.
이와 함께 CERN은 과학자들이 대중과 가까이 하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이마 소장은 “누군가가 CERN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에게 다가가 ‘CERN은 어떤 곳인지,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이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면서 “우리는 특별한 이벤트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상시에도 CERN의 과학자들이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도록 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CMS 그룹에 소속된 백용옥 박사도 “오픈데이 같은 특별한 행사가 열리긴 하지만 실제로 CERN은 항상 열려있다”고 말했다. 연구소에 근무하는 사람이 동행만 하면 누구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방문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방문하면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과학자들은 방문객들은 신경안쓰고 자신의 일을 한다. 또한 방문객들은 둘러보다가 어떤 과학자에게 물을 수도 있다. 그럼 과학자들이 대개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주고 있다. CERN은 찾아오는 사람을 언제나 환영하는 분위기다.” 백 박사의 대답이다.
이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CERN은 과학자들에게 과학커뮤니케이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교육 및 커뮤니케이션 책임자인 길리스 박사는 “CERN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곳에서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들도 포함돼 있다”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자원봉사를 하는 과학자들은 CERN의 연구를 어떻게 소개하는지를 배울 뿐 아니라 이곳 과학자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보통사람임을 강조하도록 교육받는다고 한다. 이밖에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대중에게 잘 알릴 수 있도록 저널리스트를 강사로 초빙해 미디어에 대한 교육도 하고 있다고 한다.
대중과 호흡 지향해
이토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려면 상당한 예산이 들 것이다. 그러나 아이마 소장은 “대중 프로그램을 위해 따로 예산을 편성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CERN이 올해 필요한 예산은 약 13억스위스프랑(약 1조2천억원). 실제 유럽 20개국의 회원국으로 지원받은 돈보다 많은 금액이다. LHC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이 상당해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을 위해 예산을 할애하기가 어렵다고 아이마 소장은 설명했다. 그럼 오픈데이 같은 행사는 무슨 돈으로 치르느냐고 물었더니, 여러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후원받아서 한다는 것이었다.
예산이 없으면서도 이처럼 다양하고 대규모로 대중행사를 치를 수 있는 CERN의 능력이 정말 대단해보인다. 그만큼 CERN이 기초과학연구소이면서도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인식이 돼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마 소장은 “대중이 우리가 하는 일을 ‘느낄’ 수 있으며 ‘지지’하도록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소장은 2가지 방안을 갖고 있다고 한다.
첫번째는 CERN의 연구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임을 알린다는 것이다. 우리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탐구하는 CERN의 연구가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방안은 기초연구 과정에서 나온 성과가 대중이나 산업에 파급돼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린다는 것이다. 한 예로 CERN의 과학자들이 서로 연구내용을 공유하기 위해 개발한 네트워크인 월드와이드웹(WWW)은 오늘날 인터넷 문명의 중추가 됐다. 이외에도 CERN의 연구결과는 의학을 비롯해 재료공학, 각종 산업에 응용된다고 소장은 설명했다. 암진단에 쓰이는 양전자방출촬영장치(PET)도 CERN에서 탄생한 것이다.
CERN 식당에 가면 뉴트론, 프로톤이란 메뉴가 있다. 우리말로 하면 중성자, 양성자다. 내부 도로는 ‘아인슈타인의 길’‘파울리의 길’ ‘뉴턴의 길’ ‘퀴리 부인의 길’ 등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CERN은 이렇듯 과학이 최우선인 곳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유원지 가듯 찾아오도록 만드는 CERN에서 대중과 친해지는 방법을 엿보았다.
‘천사와 악마’ 속 CERN의 반물질
CERN이 등장하는 소설이 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이 쓴 ‘천사와 악마’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CERN이 과학을, 바티칸 성당이 종교를 대표하는 곳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과학과 종교의 대립을 그려내고 있다.
최근 이 책 때문에 CERN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e메일과 전화를 받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CERN에 대한 얘기가 사실이냐고 묻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설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CERN이 반물질 폭탄을 만드는 곳이라는 점이다.
반물질은 우리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과는 반대의 특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우주 초기에 물질과 반물질이 생겨났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반물질은 거대한 가속기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반물질이 물질과 만나면 막대한 에너지를 내면서 사라져버린다. 이런 까닭에 소설에서 반물질 폭탄이 등장한 것.
그렇다면 실제로 CERN은 반물질 폭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이마 소장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소설에서 반물질을 처음 만들어낸 곳이 CERN이라는 것은 맞는 얘기다. CERN은 1995년 반물질을 제조하는데 최초로 성공했다. 이때 만들어진 반물질은 반수소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조한 반수소는 고작 수천개 정도. 폭탄과는 거리가 먼 무척 적은 양이다. 또한 아직까지는 반물질 폭탄을 만드는데 필요한 반물질을 저장하는 기술은 등장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