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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유전자는 멀티 플레이어

사람이 유전자 2만개로 ‘만물의 영장’이 된 비결

 

인간의 유전자는 멀티 플레이어


1990년 ‘세계 인간 유전자 수 맞추기 대회’가 열렸다. 상금은 100만 달러, 상 이름은 ‘노진스상’(Know-Genes Award)으로 정해졌다. 세계 유명한 연구소와 대학에 있는 생명과학자들이 경쟁적으로 이 대회에 참가했다.

5년 뒤인 1995년 생명체 중에서는 처음으로 ‘해모필러스 인플루엔자’라는 미생물의 게놈(유전체)이 밝혀졌다. 이 미생물은 약 180만개의 염기로 이뤄져 있으며 1703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 유전자 한때 10만개로 추정
 

벼는 사람보다 2배나 많은 유전자를 갖고 있다.


이후 과학자들은 인간의 유전자가 몇 개인가에 대한 추측과 논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인간 DNA를 파헤치는 인간게놈프로젝트가 1990년에 시작됐을 때 과학자 대부분은 인간의 유전자수를 10만개로 추정했다. 유전자는 단백질을 만드는데 당시만 해도 한 개의 유전자가 한 개의 단백질을 만든다고 알려져 있었다. 인간의 단백질 수는 약 10만개로 추정됐고 인간처럼 고등 생물의 기능을 가지려면 단백질 수가 적어도 10만개는 돼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인간 DNA보다 1600배나 작은 DNA를 가진 미생물이 1700개의 유전자를 가졌다는 사실은 인간이 10만개의 유전자를 가졌다는 추정을 의심하지 않게 했다.

1996년 진핵생물 중에서 처음으로 효모가 약 6000개의 유전자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간 DNA의 250분의 1에 불과한 효모도 6000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으니 인간 유전자는 10만개 이상이라는 추측도 많이 나왔다.

1998년에는 꼬마 선충(줄벌레)이 약 1만9500개의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판명됐다. 2000년에는 유전학 연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초파리가 약 1만3600개의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밝혀졌다. 2001년 2월 12일 인간 DNA를 90% 밝힌 유전자 지도 초안이 발표됐다. 이때 인간의 유전자 수는 5만~15만개로 온갖 추정이 난무했다.

2003년 4월 14일 인간의 DNA 구조가 밝혀진 50주년이 되는 해에 국제컨소시엄은 인간의 모든 유전자를 밝혔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때 나온 인간 유전자의 수는 놀랍게도 3만~4만개였다. 초파리보다 기껏 2배 더 많은데 불과했다. ‘겨우 이 정도라니’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충격이 세상을 흔들었다.

그러나 충격은 끝나지 않았다. 인간 유전자를 더욱 정확하게 연구한 결과 인간 유전자가 2만~2만5000개라는 논문이 과학 전문지 ‘네이처’ 10월 21일자에에 발표된 것이다. 이것은 식물인 애기장대와 비슷하고 선충이나 초파리보다 겨우 몇 백 개에서 몇 천 개가 많은데 불과하다. 대회 위원회는 이 결과에 충격을 받아 노진스상 선정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유전자 대회’는 실제로 일어난 대회가 아니다. 그러나 글 속에 묘사된 인간게놈연구의 주요 사건은 모두 사실이다. 특히 인간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은 연구 결과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인간이 작은 식물과 유전자 숫자가 비슷하고 선충, 초파리와 비교해 별 차이가 없는데 왜 우월한가. 고등생물이라는 관점에서 유전자의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면 다른 무엇이 있는가. 인간의 DNA와 98.8% 같다고 밝혀진 침팬지는 인간과 거의 비슷한 수의 유전자를 가질 텐데, 왜 아직 동물원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가.

인간 유전자는 슈퍼 유전자

사실 인간이 우월하다는 관점은 생명현상에서만 본다면 맞지 않다. 동물의 후각이나 힘, 추위에 견디는 능력 등 특정 능력에서는 인간은 절대 우월하지 않다. 언뜻 인간이 가장 많은 유전자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도 옳지 않다. 2002년 염기 서열의 분석이 완료된 벼의 경우, 한국과 일본인이 많이 먹는 자포니카 종은 4만2000~6만3000개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인간의 2배다.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창의력과 아이디어, 문화 등에서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난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갖고 태어나지 않은 재능을 개발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간이 그 능력의 가장 기본 물질이라고 믿었던 유전자 수에서 왜 별 차이가 없는 것일까.

먼저 인간의 유전자가 ‘슈퍼 유전자’라는 설명이 있다. 인간 유전자는 다른 생물보다 더 많은 단백질을 만들어내 더 뛰어난 기능, 새로운 기능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유전자 본체는 건드릴 필요 없이 ‘유전자 스위치’만 살짝 바꾸면 된다.

실제로 인간의 21번째 염색체와 비슷한 침팬지의 22번째 염색체를 비교한 결과 심장, 뇌, 말초신경계와 관련해 비슷한 기능을 가진 유전자지만 인간이 훨씬 많은 단백질을 만드는 것으로 판명됐다. 이것은 인간의 특정 단백질들이 침팬지보다 우리의 몸에서 훨씬 더 많은 곳에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는 증거다.

다른 예를 보자. 인간과 침팬지는 모두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스반테 파보 박사는 2002년 6월 “인간은 침팬지보다 기억을 담당하는 단백질을 두 배나 더 많이 만든다”고 주장했다. 연구팀은 인간과 침팬지, 마카크원숭이, 오랑우탄의 기억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 인간 유전자가 기억 단백질을 만드는 능력이 침팬지보다 두 배나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팀은 이 차이가 인간과 침팬지의 기억 능력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 수는 선충, 초파리와 비슷하지만 한 개의 유전자가 여러 종류의 단백질을 만들 수도 있다. 인간의 특정 유전자 한 개는 최소한 2~3개의 단백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DNA로 이뤄진 유전자는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 중간 물질로 RNA를 만드는데 하나의 유전자에서 나온 긴 RNA가 여러 개로 나뉘어져 완전히 다른 종류의 단백질을 만들 수도 있다.

인간의 단백질은 많은 기능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라는 단백질은 초파리에서는 소화에만 쓰이지만 인간은 소화와 식욕 촉진에 쓰일 수도 있다. 인간의 유전자는 축구에 비유하면 공격, 수비, 허리를 가리지 않는 ‘멀티 플레이어’인 셈이다. 실제로 하나의 인간 단백질이 몸 안의 여러 곳에서 서로 다른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히딩크 감독의 축구 전술은 유전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셋이 모이면 문수보살의 지혜가 나온다’는 속담도 인간 유전자에 적용된다. 여러 개의 작은 단백질이 서로 협력해 새로운 기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초파리에서는 B와 C 단백질이 전혀 상관없지만 인간의 몸 안에서는 B와 C가 협력하고 여기에 D 단백질이 더해져 초파리에서는 불가능한 ‘생각하는 단백질’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생명체를 살펴 보자. 선충 안에는 하나의 거대한 단백질이 존재해 특정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축구로 말한다면 뛰어난 개인기를 가진 스타 선수가 혼자 경기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여러 개의 작은 단백질이 조합을 이뤄 그 일을 하는 ‘팀 플레이’가 많다. 인간의 단백질은 다른 하등동물보다 훨씬 더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형태로 협력하도록 진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비슷한 유전자 수를 갖고서도 다른 동물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을 더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비결이다.

작은 단백질들이 협력하는 ‘벌떼 작전’
 

벤처기업의 한 연구원이 인간DNA를 이용한 유전자칩을 만들고 있다. 유전자칩은 질병을 진단하는 등 다양한 목적에 쓰일 수 있다.


한 개의 커다란 단백질을 만드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만일 한 개의 단백질이 모든 기능을 한다면 돌연변이가 생겼을 때 치명적이지만, 여러 개의 단백질로 나눠져 있다면 이러한 위험을 더 잘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작은 단백질을 조합하는 것이 더 작은 RNA를 유지할 수 있어 세포 입장에서 보면 훨씬 경제적이다.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에서는 단백질 사이의 네트워크와 조절 작용이 매우 복잡하게 이뤄진다. 여러 개의 단백질이 조합으로 모여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은 필요한 단백질들의 생산과 억제를 조절하는 시스템이 엄청나게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적혈구에서는 산소를 공급하는 헤모글로빈의 주 요소인 헴(heme)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헤모글로빈의 RNA가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게 억제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결국 DNA에 있는 유전자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DNA에서 만들어지는 단백질의 종류와 다중 역할, 단백질들이 만드는 네트워크의 복잡성이 인간의 우월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진화란 새로운 유전자를 만들어내는 것을 넘어 유전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맺고 기존 유전자에 새로운 기능을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침팬지와 인간의 DNA를 다시 한번 비교해 보자. 인간에서는 청각에 관련된 유전자들이 빠르게 진화해 언어를 발달하게 만들었다. 육식과 후각과 관련된 유전자의 빠른 진화도 우리 인간의 먹는 습관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침팬지는 골격 형성에 관련된 유전자가 빠르게 진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를 도구를 쓰거나 곧게 서는 것으로 많이 설명했지만 인간이 침팬지보다 말을 더 잘 하고 고기를 훨씬 더 많이 먹는 것도 인간의 진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인간을 ‘고기를 더 많이 먹는 수다쟁이 침팬지’라고 할 수도 있다.

그 변화조차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스반테 파보 박사는 사람과 침팬지의 언어 유전자(FOXP2)를 비교한 결과 715개 아미노산 중 단 2개의 차이가 사람이 지금처럼 성대와 혀, 입을 정교하게 움직여 복잡한 발음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2002년 과학전문지 ‘네이처’에서 주장했다. 유전자의 세상에서는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을 일으키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 유전자의 실체를 보고 있다. 유전자 수로 우열을 논하던 시대는 지났다. 우리는 유전자의 정확한 숫자와 기능을 넘어 단백질의 종류와 네트워크 등을 파악하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 도전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정확한 유전자 지도를 갖고 암과 유전병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지구 생명체의 진화과정과 인류의 진화 역사를 정확히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상보다 훨씬 적은 것으로 판명된 인간 유전자 수는 ‘양보다는 질’이라는 격언을 되새기게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게놈 연구에 큰 발전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진핵생물

DNA를 포함한 세포핵이 핵막에 둘러 쌓여 있는 생물. 원핵생물은 핵막이 없어 DNA가 세포 안에 분자 상태로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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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황승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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