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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문대원

표면연구 이끄는 한국 과학계 ‘표준맨’

 

1952 경남 사천 출생 / 1975 서울대 화학과 졸업 / 1977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 석사 / 1984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화학 박사/ 1985-1986 미국 국가표준기술원(NIST) 방문연구원 / 1999 호주국립대 전자재료과 방문연구원 / 2001-2002 미국 일리노이대 재료학과 초청교수 / 1985-현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얼마전 막 내린 아테네올림픽 역도 종목에서 아깝게 은메달에 머물고도 시종일관 환한 미소를 보였던 이배영 선수를 기억하는가. 팬들은 그에게 ‘역도계 살인미소’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그럼 과학계 살인미소는? 인터뷰 내내 싱글벙글 웃으며 답하던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나노표면연구그룹의 책임연구원 문대원 박사가 이 별명에 어울릴 듯.

문 박사는 극미세 표면구조 측정·제어기술 분야의 세계적 과학자다. 그가 제안한 반도체 불순물 측정 평가기준이 지난해 ISO 국제표준으로 채택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반도체를 제작할 때는 실리콘 표면에 불순물을 주입해 전류가 흐르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불순물의 깊이나 분포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반도체의 성능을 좌우하게 된다. 문 박사의 평가기준이 세계 모든 반도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는 올해 3월 물리·화학·재료 분야의 세계적 학술지 ‘고체물리 재료과학 리뷰’ 편집위원으로 선임되는 영예를 안았다. 연구업적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 게다가 문 박사는 표준과학연구원에서 원장보다 높은 최고액의 연봉을 받는다. 청소년들이 과학에 도전하고 싶게 하기에 충분하다.

과학자로서의 성공 비결을 궁금해하는 기자에게 문 박사는 ‘낙천적인 성격과 과감한 도전의식’이라는 조금은 막연한 해답을 꺼내놓는다.

“새로운 일을 스스로 찾아 하는 스타일이에요. 할 일을 정하면 겁 없이 밀어붙이죠. 될 거라고 믿고 도전해야 새로운 연구영역을 개척할 수 있어요.”

맨땅에 헤딩 마다 않는 열정
 

낙천적 사고와 도전의식이야말로 과학자를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문대원 박사. 지난해부터 과학기술부의 나노∙바이오 융합 사업을 이끌며 또한번 과감한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표면과학은 산업에 쓰이는 재료 표면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물리적, 화학적 현상을 다루는 분야다. 물리학, 화학, 재료공학의 집합체인 셈. 현대 표면과학 연구는 시작된지 불과 20-30년. 문 박사가 표면과학에 몸담은지 벌써 20년이 넘었으니 국내 표면과학 연구를 개척한 장본인이 바로 그인 것이다.

우리나라 주력 산업인 반도체 분야에서도 표면과학은 매우 중요하다. 미세한 회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도체 소자 표면에 붙이고 깎는 일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자가 작아질수록 반도체 성능은 표면 상태에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표면과학은 신소재, 나노 측정 분야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소재 제작 공정이 주로 표면의 수nm 아래에 있는 원자와의 반응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당구대 위에 당구공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줄 놓여있다고 하자. 여기에 다른 당구공을 치면 어디선가 맞고 튕겨나온다. 마찬가지로 물체 표면을 구성하는 여러층의 원자에 수소원자를 충돌시키면 튕겨나온다. 이때 어느 층에 부딪히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에너지가 다르다. 이를 측정하면 수소원자가 어디서 튕겨나왔는지, 원자들이 어떻게 배열돼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같은 원리를 이용해 문 박사는 수nm 두께의 극히 얇은 재료 표면의 원자 배열이나 구조까지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문 박사의 연구 터전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연구원과 그의 인연은 남다르다.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이곳에서 연구원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당시 새로운 분야였던 표면과학을 공부하려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84년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일하던 문 박사에게 때마침 표준과학연구원에서 표면과학에 수억원의 연구비를 투자하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망설임 없이 귀국해 연구원으로 돌아온 그는 이온빔을 이용한 표면연구에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필요한 장비를 일일이 부품을 구해 직접 만들어낼 만큼 맨땅에 헤딩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련도 있었다. 물체 표면의 원자를 관찰하는데 사용하는 연구실 3배 크기의 장비가 하루아침에 고스란히 재가 돼버린 것. 예산이 모자라 물 대신 오일로 냉각하다가 불이 났기 때문이다.

“꼬박 보름 동안 손으로 그을음을 닦았어요. 죽을 맛이었죠. 며칠 후 2억원의 손실을 보험으로 보상받고 새 기계를 설치했으니 어찌 보면 행운이었죠.”

그 후 한동안 문 박사는 매일 도시락을 싸왔다.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줄을 서는 시간조차 아까웠기 때문이다. 연구 초기를 돌아보면서 문 박사는 “연구원이 이제는 내 집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원없이 공부한 학창시절

이렇듯 연구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적극적인 성격이니 학창시절에도 학교를 주름잡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지 않았을까 싶다. 어린 시절 얘기가 듣고 싶다는 기자에게 문 박사는 뜻밖의 고백(?)을 한다.

“수줍음 많고 조용했어요.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질문하면 떨려서 아는 것도 대답을 못할 정도였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문 박사는 점점 더 어두운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그는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밝아지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성격마저도 스스로의 의지로 바꾼 것이다. 지금도 어린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성격 정말 많이 변했다”는 얘길 듣곤 한다고.

문 박사는 1952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베트남전에서 수류탄을 덮쳐 전우를 구했다는 소령의 얘기를 듣고 육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다 물리학과 열역학에 재미를 붙여 그야말로 원없이 공부했다.

서울대 화학과로 진학했지만 대학시절 내내 손에서 물리책을 놓지 않았다. 물리시험에서 물리학과 학생들보다 오히려 더 좋은 성적을 받기도 했다. 물리학, 화학, 재료과학을 넘나드는 표면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의 면모가 학창시절부터 엿보인 셈이다.

졸업 후 문 박사가 연구원에서 표면과학 연구에 매진하던 중 학회 참가차 외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다른 나라의 과학자들과 담소를 나누던 자리에서 미국과 호주 과학자들이 문 박사가 부럽다고 했다.

영문을 몰랐던 문 박사는 “여러 분야 과학자가 함께 모여 한가지 연구를 할 수 있고, 서로의 연구에 대해 다양한 칭찬과 질타가 오가는 한국의 연구여건이 좋다”고 평가하는 그들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문 박사는 “한국에서 태어난 것, 연구소에 들어온 것 모두 행운”이라며 “만약 대학에 있었다면 엄두도 못냈을 일도 연구소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또한번 환하게 웃는다.

연구원 최고 연봉의 주인공

2003년 문 박사에게 외국 과학자가 부러워했다는 우리나라 연구여건을 십분 활용할 기회가 찾아왔다. 표면과학과 나노과학의 측정기술을 생명과학 분야에 적용하는 나노·바이오 융합 사업을 맡게 된 것. 한해 예산 규모가 40억, 총 연구자 수가 1백80명에 달하는 이 사업은 과학기술부 신기술융합사업의 일환으로 10년 간 진행된다.

세계적으로 생명과학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문 박사는 첨단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생명과학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단일 소자를 원자 수준에서 측정, 제어할 수 있는 표면과학과 나노과학 기술을 세포나 미세한 생물을 관찰해야 하는 생명과학에 적용하는 야심찬 계획이 바로 나노·바이오 융합 사업이다.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문 박사가 내건 슬로건은 특이하게도 ‘No 벤치마킹’. 새로 사업을 시작할 때 기존의 비슷한 사례를 검토하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이전에 어떤 방법으로 어떤 연구들을 했는지에 계속 집중하다 보면 새로운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기존 사례를 보지 않아야 과감하게 참신한 연구영역을 선점할 수 있다는 게 내 신념입니다.”

문 박사는 이 사업을 통해 “나노 측정기술이 새로운 생명과학 정보를 창출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표정에서 진정한 융합의 파워가 선보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가 한껏 묻어난다.

문 박사는 요즘 과학자로서 자신의 역할이 달라질 때가 됐다고 느낀다. 연구실에서 실험장비와 씨름하며 훌륭한 논문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에게 과학을 알리는데도 한몫해야 할 시기라는 것이다.

“과학 분야에도 청소년의 모델이 될 인물이 필요 해요. 청소년들이 저 정도면 나도 연구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성공한 과학자가 10명만 나와 보세요. 이공계 기피요? 저절로 해결될 겁니다.”

“다시 태어나도 과학자가 되겠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물론이죠. 역시 표면과학을 연구할 겁니다”라는 문 박사. 그에게 한국 과학계가 낳은 ‘표준맨’이라는 또다른 별칭을 선물해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2004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박창민
  • 임소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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