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고서저의 한반도 지형. 강은 육지에서 배출한 유기물을 거둬 서해로 흘러 드넓은 갯벌에 부려놓는다. 검은 땅 갯벌이 품고 있는 무수한 생명은 이 유기물을 쉴새 없이 먹어치우며 몸집을 불린다. 사람들은 이를 잡아올려 식량으로 삼고 다시 유기물을 배출한다. 이처럼 갯벌은 육상생태계와 해양생태계를 이어주며 사람과 자연 간 순환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런데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산을 깎아다 갯벌을 메우는 곳이 있다. 새만금 간척현장이 바로 그곳. 동진강과 만경강의 하구를 에둘러 군산-김제-부안을 연결하는 방조제를 쌓아 갯벌을 메우고 있다. 여의도 면적의 1백40배나 되는 4만1백ha(헥타르)의 면적을 농지로 만들기 위해서다.
1991년 11월 첫삽을 뜬 이후로 새만금 간척사업은 끊임없는 찬반논란을 낳았다. 결국 1999년 5월 공사가 중단됐다가 2001년 5월 민·관 공동조사단의 활동으로 친환경적 순차개발을 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그 후 2003년 7월 환경단체의 새만금 간척사업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졌다가 올해 1월 공사가 다시 시작됐다. 현재 33km에 달하는 방조제 중 약 2.7km만이 미완성된 상태다.
새만금 공사로 방조제가 뻗어나가면서 서해 황금어장은 황폐화되고 포구는 폐허로 변하고 있다. 죽은 뻘이 쌓이면서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지역이 점점 넓어지는 상황이다.
“고기가 나지 않으니 바다 일을 포기하고 주민들은 공사판을 떠돌고 있어요.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와 함께 산 사람이 바다를 포기하는 마음이 어떤지 모를 겁니다. 갯벌에서의 1년치 벌이도 안되는 보상금으로 어떻게 새 삶을 시작하란 말입니까.”
전북 부안 계화도에 사는 한 주민의 하소연이다. 안타깝게도 어촌공동체마저 이미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곧 육지가 될 시한부 운명인 새만금 갯벌. 그 갯벌에 기대 평생을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과 주민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집 나간 며느리 불러들이는 전어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 갯벌. 밀물을 따라 밀려온 고기떼가 썰물이 되면 대나무나 싸리나무를 울타리처럼 엮어 만든 함정에 딱 걸린다. 이 함정이 ‘어살’이다.
요즘처럼 어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우리 어업이 주로 연근해 어장에서 이뤄지던 시절, 어찌 보면 원시적이랄 수 있는 이 어살이야말로 조수간만을 따라 회유해 들어오는 고기떼를 한번에 다량 포획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러기에 “좋은 목에 있는 어살은 못자리하고도 안 바꾼다”는 옛말도 생긴 것이리라.
변산반도 앞 칠산바다를 끼고 있는 새만금 갯벌 일대는 예전에 어살을 이용한 어전어업의 중심지였다. 이곳 사람들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황금조기나 삼치, 청어 등이 어살 가득 걸려들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갯벌의 황폐화로 연안 어족자원이 고갈되고 동력선과 나일론그물이 보편화되면서 어살은 차츰 자취를 감췄고, 지금은 대항리 또는 계화도 갯벌에서나 볼 수 있다. 대항리나 계화도에서도 요즘은 대나무나 싸리나무 대신 나일론그물로 어살을 만든다. 예전엔 어살에 조기, 삼치, 청어가 많이 걸렸지만 요즘은 전어, 숭어가 걸린다는 점도 달라졌다.
가을이면 칠산바다에 전어떼가 몰려든다. 신바람 난 포구마을 어부들은 인심마저 후해진다. 전어는 비늘도 긁지 않은 채 통소금에 1시간 정도 절였다가 아궁이 불에 석회를 얹어 구우면 기름이 지글지글 흘러나오면서 먹음직스런 냄새가 온동네에 가득 찬다. 전북 부안에는 “전어 굽는 냄새에 집나간 메누라가 돌아온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
그런데 요즘은 그 흔하던 전어를 구경하기도 어렵다. 해마다 가을이면 “누구네가 전어 어장으로 얼마를 날렸다더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 전어 없는 가을이라, 왠지 쓸쓸하다.
맛을 캐는 사람들
“저 갯바닥이 우리 8남매 다 키웠어. 새끼들이 애릴 땐 방에 놔두고 문꼬리에 숟구락 찔러 잠그고 갯일 허로 갔지. 생합, 반지락 잡고 굴 따고, 물 많이 쓸 때는 죽합도 잡고…. 그때는 무거워서 다 못 주서왔는디 계화도 개 막음서부터 많이 없어졌어.”
전북 부안 계화도 양지마을에 사는 이복순 할머니의 말이다.
계화도나 계화도 인근 돈지, 김제의 심포, 거전 사람들은 검은 땅 갯벌을 터전삼아 자식들 공부시키고 혼사시키며 질척이는 삶을 이어왔다. 그들은 한물 때 갯벌에 나가 백합을 잡고, 다음 물때는 이것을 이고지고 부안읍내까지 걸어나와 보리쌀 됫박과 바꿔서 또 그 다음 물때를 기다려 계화도로 돌아가곤 했다.
백합은 갯땅의 산물 중 단연 돋보인다. 새만금 지역 사람들은 조개류 중 전복 다음으로 백합을 꼽는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진상되기도 했다고 한다. 백합은 우리나라 서해와 중국에서 나는데 계화도, 전북 김제 심포에서 나는 백합이 질 좋기로 유명하다.
백합 다음으로는 ‘맛’을 꼽는다. 대맛, 돼지가리맛, 가리맛, 물맛…. 이곳 사람들은 ‘맛은 쇠고기하고도 안 바꿔먹는다’고 한다. 맛이 좋아 ‘맛’이라고 부르는 걸까.
대맛조개를 잡는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우선 펄 바닥에 무수히 뚫려 있는 구멍 중 대맛조개 구멍을 구별해내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써개’라고 불리는 철사꼬챙이를 구멍 속에 집어넣는다. 그러면 대맛조개가 놀라 꼬챙이 끝을 꽉 문다. 이때 기술껏 펄 밖으로 끄집어내야지 안그러면 자칫 놓쳐버리고 만다.
지금의 시세로 백합 1kg에 8천-1만2천원이니 백합 15kg면 쌀 한가마다. 허나 이제 백합과 맛은 멸문지화 직전이고, 바구니가 가벼워진 주민들은 대책 없이 내몰릴 운명에 처해있다.
가을엔 망둥이 낚고 겨울엔 숭어 낚는다
찬바람 들고 나락이 누렇게 익을 무렵 계화도 사람들의 망둥이 낚시에 따라나섰다. 등에 둘러멘 큼직한 구럭, 1m가 채 안되는 댓가지, 허리를 잘라낸 1.5L 페트병이 채비의 전부. 페트병은 미끼인 민챙이로 채웠다.
가슴까지 차는 물속에 들어가 댓가지를 담갔다 올리면 망둥이가 구럭 안으로 톡톡 떨어졌다. 그들은 긴 낚싯대나 릴이 부럽지 않은 프로였다. 이 망둥이들을 말려서 갈무리 해뒀다 겨우내 식량으로 삼는다. 이 시기에 망둥이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다. 주민들이 웬만큼 바쁘지 않은 일이라면 제쳐두고 망둥이 낚시 삼매경에 빠져드는 이유다.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새만금 갯벌에는 숭어떼가 몰려온다. 주민들은 길이 15m, 폭 1.5m 그물로 숭어가 몰려드는 길목을 자형으로 둘러싼다. 그물 양쪽을 끌어당긴 후 감싸안고 물가로 나오면 팔뚝만한 숭어들이 그물 안에서 팔딱거리고 있다. 즉석에서 벌이는 숭어회 파티. 갓 잡아서인지 아니면 기름진 펄에서 노닌 놈이어서인지 달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수년째 새만금 갯벌의 생태를 사진에 담아오고 있는 필자는 군산에서 부안까지 곳곳을 뒤진 끝에 2001년 가을 회현갯벌에서 가까스로 짱뚱어를 찾아냈다. 오염에 민감한 짱뚱어가 아직 남아있다는 걸 확인하니 적이 안심이 됐다.
천금만금 안겨주던 실금장어
과거 동진강과 만경강하구 어민들은 2월초-4월말 하룻밤 벌이로 논 한 필지를 살 수 있었다. 산란과정이 베일에 싸여있어 양식이 어려운 실뱀장어를 이때 잡아다 양만장에 가둬놓고 기르면 그야말로 금값이 된다. 1997년엔 1kg 당 1천5백만원까지 올랐다. 당시 금 1kg이 1천2백만원이었으니 금보다 비쌌던 셈. 그래서 ‘실금장어’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요즘 수입은 예전의 5-10%로 줄었다. 강이 하구둑이나 수중보로 가로막혀 실뱀장어가 거슬러 올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이면 새만금 사람들은 고개미 잡이에 나선다. 고개미는 몸길이 1-1.5cm, 굵기는 볼펜심보다 가는 어린 새우. 대나무나 모기장으로 만든 어구를 밀고다니며 고개미떼를 건져올려 젓갈을 담가 두고두고 먹는다. 새만금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고개미젓 한단지는 있어야 1년을 난다고.
늦가을이면 서·남해안 어부들은 비상이 걸린다. 무시무시한 ‘범치’가 나타나기 때문. 학명이 ‘쑤기미’인 범치는 등지느러미에 맹독을 품고 있다가 화가 나면 고슴도치처럼 등지느러미를 빳빳이 세워 가차없이 적을 찌른다. 사람도 범치에 찔리면 견딜 수 없이 아프다. 심한 경우 구급차까지 부른다. 솔잎을 넣고 달인 물에 찔린 부위를 담그면 효험이 있단다. 이렇듯 독한 놈이지만 매운탕 맛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