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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우리 사회가 과학용어에 생소해 하던 1991년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시에 도착한 직후, 자동차 면허시험을 보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에서 보도를 쓸고 있던 마음 좋게 생긴 아저씨가 물었다.

“너 학생이니.” “네.”

“뭐 공부하는데?”

“천문학이요.” “ 와우!”

목소리가 두 배가 되었다. 그러더니. “너 타키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앗. 1960년대에 한참 회자되던 빛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가상의 입자.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얼렁뚱땅 대답을 했더니, 다음엔 더 복잡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 과학서적 읽는 게 취미란다.

버스는 왜 이렇게 안 오는지. 두 시간처럼 느껴진 그 20여 분 동안 나는 땀을 꽤 많이 흘렸다. 영어가 짧아서 그랬고, 내가 업으로 하는 천문학 토론에 나 아닌 청소부 아저씨가 주도를 하는 것에 그랬다. 면허를 무사히 딴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두어 시간 전 일을 기억하며 나는 미국의 저력을 새삼 느꼈다. 아마도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을 보통 시민이 평소에 잠자리에서 과학서적을 읽는다니. 그 당시 한국에선, 내가 천문학 한다고 하면, 알만한 분들도 점성술에 대해 질문하거나 내일 날씨를 묻기 일쑤였다.

14년 만에 귀국해 얼떨떨한 심정으로 모교의 강단에 섰다. ‘우주의 탐구’라는, 1학년 학과탐색 과목의 강의를 맡았다. 내 평소의 관심을 반영하듯 그 과목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탐구 역사, 특히 현재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우주론인 빅뱅이론을 주로 다루었다.

앞으로 가르칠 내용에 스스로 가슴벅차하며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빅뱅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나요?” 질문을 마치자마자 평소와 달리 즉각적인 함성이 답이 돼 돌아왔다. “네~~.” 가뜩이나 쿨한 빅뱅이론에 대해 가르칠 것을 생각하고 흥분해 있던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했다.

허허. 유학을 떠나던 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일반인들이 그리 과학적인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 사이 정말 강산이 바뀌었구나.

빅뱅은 빅뱅을 좋아해

그런데 그 학기가 다 지난 후 어느 날 TV에서 빅뱅이란 청년 아이돌 그룹이 나와서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닌가. 매우 유명한 아이돌 그룹이란다. 앗. 그럼 우리 학생들의 함성은 혹시 우주론 빅뱅이 아닌 아이돌 빅뱅에 대한 것이었나. 만일 그렇다면 만족감에 우쭐해하며 한 학기 동안 열정을 다해 빅뱅이론을 강의하는 동안 140명 학생들은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느꼈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

사실 우리 학생들이 빅뱅이론을 빅뱅그룹으로 오인했다 하더라도 그리 실망스런 상황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과학 용어가 우리 일상에 자연스레 등장하고 있다. 과학적 의미는 잘 모를지라도 상대론이란 용어는 일반인들도 사용한 지 오래다. 빅뱅, 블랙홀, 초신성(슈퍼노바), 인피니트(무한대), f(x) 등은 아이돌 그룹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과학용어가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것은 사회가 과학에 긍정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최근 유럽 과학자들이 중성미자(뉴트리노)라는 입자가 빛보다 0.002%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현대 물리학의 근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의 기본 가정 ‘빛보다 빠른 물체는 없다’에 위배되는 발견이다. 만일 진실로 밝혀질 경우, 노벨상이 문제가 아니고 현대과학에 전반적인 대수술을 요구하게 된다. 연구자들이 다양하고 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새로운 검증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유럽에서 이 소식이 발표된 바로 그날 우리나라에서도 9시 뉴스와 다음 날 조간신문이 자세히 다뤘다. 일부 지인들도 그 연구의 의미를 궁금해 하며 내게 물었으니, 이제는 우리나라도 과학선진국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단계에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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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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