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칩’ ‘미스터 디지털’.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52)의 별명이다. 삼성전자 시절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 1백28메가 D램, 1기가 D램을 잇따라 개발해 컴퓨터의 기억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려 ‘반도체 신화’를 창조했다고 해서 붙여졌다.
국내 최대 기업의 사장을 지내고, 현재 국가 행정부처의 수장으로서 ‘화려한’ 길을 걷고 있는 그에게 성공의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뜻밖에 ‘수학과 물리학이 기본이 됐다’는 평범한 답변이 나왔다.
“삼성전자 시절부터 정보통신기술(IT) 장관직을 수행하는 지금까지 분석적인 태도와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준 것이 바로 수학과 물리학이었어요. 합리적인 판단을 했으니 누구 못지 않은 ‘화끈한 결단력’도 나올 수 있었죠.”
물론 이뿐만이 아니다. “사실 반도체와 가장 연관이 깊은 분야가 수학과 물리학이에요.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할 때 한 선배로부터 이 말을 듣고 무조건 그 기초가 되는 미적분학 원서를 구입해 남보다 먼저 열심히 공부했어요.”
반도체의 기본은 수학과 물리학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께 어느 과를 가는 것이 좋겠냐고 묻자 ‘전자공학’이라는 답변을 듣고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원서를 냈다. 당시 전자공학과는 물리학과와 함께 제일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던 곳. 하지만 막상 전자공학이 무엇인지 몰라 하던 차에 한 선배로부터 우연히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배우는 곳이란 말을 전해들었다.
대학 입학시험을 마치고 겨울방학 기간 동안 양자역학과 그 기초가 되는 미적분학 원서를 구입해 공부했다.
대학교 2학년 때는 수학과와 물리학과에 원정을 가 응용수학과 응용물리 수업을 들었다. ‘커피잔과 도넛은 위상수학적으로 같다. 이를 증명하라.’ 고도의 추상적 논리와 창의력이 요구되는 이런 문제들이 대부분이어서 본과 학생들도 골치아파하는 과목이었다. 하지만 진 장관은 난제를 푸는 과정이 너무 흥미로웠고, 결과는 항상 A플러스였다.
하지만 진 장관이 ‘딱딱한’ 학문에만 재능을 보인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미술이나 건축에도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미술 성적은 모두 ‘수’였다.
진 장관은 이런 미적 감각이 자신을 반도체 전문가로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지을 때 건축가는 2차원 평면의 설계도를 그리며 3차원 공간을 구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 mm에 불과한 반도체 안에 이리저리 복잡한 선을 그리고 구성물이 층층이 쌓인 고성능 제품을 설계할 때 전체 입체구조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진 장관은 “나는 운이 좋게도 미적 감각을 타고 난 것 같다”면서 “뭐든 겉모습만 척 봐도 머리 속에 내부의 입체구조가 쉽게 떠오른다”고 말한다.
여기서 잠시 에피소드 한 가지. 진 장관의 뛰어난 눈썰미 때문에 부하 직원들은 종종 혼쭐이 났다. 삼성전자에 근무할 때 수첩 크기 만한 개인휴대단말기(PDA) 시제품을 가져왔을 때 진 장관은 “원래보다 크기가 2mm 차이가 난다”고 말했는데 실제 조사해보니까 정확히 2mm 틀렸더라고.
해답 찾으려 분야 안가리고 발품 팔아
이렇듯 기초가 탄탄한 덕에 남들이 못 푸는 문제를 향해 늘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었다. 진 장관이 대학원을 다니던 1975년 미국에서 전자공학 전문가로 활동하던 김충기 박사가 한국과학원(현재 KAIST) 교수로 부임해오면서 서울대에 강의를 나왔다. 진 장관은 김충기 교수로부터 미국의 최신 반도체 연구 동향을 듣고 관련 실험을 재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당시 여건상 반도체 실험장비가 제대로 갖춰졌을 리 만무했다. 진 장관은 재료공학과에 가서 반도체의 재료인 웨이퍼를 만들어내고 그 표면에 에너지상태가 어떤지를 알아내는 실험을 수행했다. 유리그릇에 황산을 넣고 1천℃로 끓여야 하는 위험한 실험을 겁 없이 실행했다. 유리그릇이 깨져 황산이 바닥에 쏟아져 양말이 녹아드는 사고도 당했다. 이런 어려움 끝에 당시 반도체 학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도 과감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당시에는 반도체 회로의 선폭을 머리카락 두께인 1μm(마이크로미터)이하로는 만들지 못했다. 반도체의 성분인 실리콘이 산소와 반응하면 ‘새의 부리’ 모양으로 산화막이 만들어지면서 부피가 커졌기 때문이다. 진 장관은 이를 물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매달렸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생소한 주제여서 다른 분야 전문가로부터 조언을 듣는 게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1년 넘게 관련 학과를 샅샅이 뒤지며 발품을 팔았다. 공기역학을 다루는 항공과, 물의 흐름을 연구하는 기계과 등을 돌아다니며 물리현상의 원인을 찾았고 버클리대까지 뛰어가 컴퓨터계산 전문가에게 모델링기법을 익혔다. 결과는 성공. 이때의 생생한 경험 때문인지 진 장관은 “반도체는 총체적인 학문”이라고 단언한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IBM에서 일할 때도 ‘틈만 나면’ 보직을 이전했다. 늘 새로운 프로젝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수행하고 있는 장관직도 ‘어렵지만 새롭다’는 면에서 매력이 끌렸다. 이런 일이라면 무엇이든 ‘천직’이라 생각한다.
“장관 임기를 마치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진 장관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학교를 설립해 외국에 비해 다소 약한 소프트웨어나 디자인 분야에서 고급 인력을 양성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기초를 중시하고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동력은 의외로 ‘지고는 못사는 천성’ 때문이라며 웃는다. “중학교 시절 친구와 탁구 경기를 해서 지면 그날은 잠을 못자요. 밤새 벽에 대고 탁구공을 치며 연습했거든요. 다음날 친구에게 이겨야 직성이 풀렸죠.”
지고는 절대 못사는 천성
고등학교 시절에는 수학 성적이 남들보다 좋지 않게 나오자 서울대의 과거 출제 문제를 입수해 하루에 20개씩 풀었다. 1개에 30분 정도 걸렸으니까 매일 3시간씩 문제를 푸는데 매달린 셈이다.
영어도 그랬다. 방학 때 하루 1과씩 30과를 매일 공부했는데 앉아서 공부하다 자는 일만 반복했다. 결국 영어 성적이 전교 10등 안에 들고서야 ‘강행군’을 접었다. 너무 오래 앉아 있다보니 사타구니에 습진이 생겼는데 아직도 낫지 않아 고생한다고.
이런 천성 탓일까.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제품이 쏟아지는 세계 IT 시장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국가 정책을 수립하는 일도 그에게는 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경쟁이다. 대신 직원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진 장관의 취임 초 정보통신부는 갑자기 파워포인트 이용법을 배우는 분위기로 가득했다. 문서보고가 아닌 ‘디지털 시대’에 걸맞는 프레젠테이션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일방적인 지시가 아닌 장시간의 토론이 이어진다. 이런 변화 덕분에 2003년 정부업무평가와 혁신평가에서 우수부처로 선정됐다.
“남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작업이에요. 하지만 노력에 대한 결과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최근 청소년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일이 안타깝기만 하다. 고생을 많이 했지만 충분한 부와 명예를 얻은 자신의 길을 들려주고 싶어 한다. 과학의 길이 당장은 험난해도 미래에는 다른 어떤 분야를 택한 것보다 값진 열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 장관은 청소년을 한 마디로 표현해달라는 질문에 ‘가공하지 않은 웨이퍼’라고 말한다. 아직 무엇이든 설계해 그려 넣을 수 있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웨이퍼에 마음껏 그림을 그려넣어 자신만의 새로운 반도체를 만들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