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년 전 MBC에서 방영된 TV드라마 ‘허준’은 조선 광해군 시대의 임진왜란 격동기가 배경인 사극이다. 이 드라마는 어려운 역경 속에서 동의보감을 펴내고 어의로 크게 활약했던 실존 인물의 생애를 묘사해 당시 안방극장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1일 시청률 63.7%라는 역대 최고기록을 남겼으며, 드라마 방영시간만 되면 ‘시내에 사람이 없어 장사가 안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보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드라마에서 이른바 ‘옥에 티’도 많이 발견돼 큰 화제가 됐다. 수많은 옥에 티 중 단연 돋보였던 것은 전봇대의 노출! 전봇대는 최종회 마지막 장면에서마저 화면에 포착돼 시청자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한국민속촌과 드라마 촬영세트장을 제외하면 전봇대가 없는 곳이 없다. ‘허준’은 내용상 세트장을 벗어나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제작팀도 ‘옥에 티’라기엔 너무 큰 전봇대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도대체 전봇대가 뭐길래 드라마 제작진의 카메라도 피하지 못할 만큼 널리 퍼져있는 걸까?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전기가 따라가고, 전기는 전봇대를 징검다리 삼아 전송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미관과 안전을 생각해서 땅밑으로 전선을 설치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아직까지 비용 면에서 전봇대를 따라오지 못해 사람들은 여전히 전봇대를 애용한다.
전선망에 감긴 지구
어찌됐건 전봇대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전선을 지지하는 일이다. 따라서 세상에 아무리 전봇대가 많다 하더라도 전선이 없으면 전봇대 또한 그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 전봇대가 이렇게 많을진대 전봇대들을 연결하고 있는 전선은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에서 전기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한국전력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2003년 6월까지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전선의 길이는 지상 37만2천8백96km, 지하 2만2천99km로 모두 합쳐 총 39만4천9백95km다. 이 정도 길이의 전선이면 지구를 9.7바퀴나 감을 수 있고, 서울과 부산을 4백60번 왕복할 수 있다.
땅덩어리 넓이로만 따져 세계에서 가장 넓은 러시아의 약 1백72분의 1에 불과한 우리나라(세계 1백9위)가 이 정도 수준인데 다른 나라는 얼마나 대단할까? 미국의 경우 2002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연방정부 산하에 있는 에너지국이 관리하는 전선만 약 13만km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발전소부터 주와 도시를 잇는 전선에 불과하다. 여기에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는 3천여개의 사설 전기회사가 별도로 설치한 전선을 합친다면 그 전체 길이는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 중 전선을 쓰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 음악을 듣는 CD플레이어의 이어폰에서부터 TV, 냉장고, 전자레인지, 휴대전화 충전기, 컴퓨터, 초고속 통신 모뎀 등등. 전기를 공급받기 위해 밖으로 드러난 전선만 해도 엄청나다. 그러니 만약 전세계에 퍼져있는 전선을 하나로 잇는다면, 지구에서 태양까지를 잇고도 남아서 어쩌면 태양계를 벗어나 저 먼 우주로 계속 뻗어나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기에너지와 관련된 모든 사고의 시작은 사실 전선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화재는 전선 과부하, 전기 누전 등 전선으로 인한 것이 30%를 넘는다. 요즘엔 곳곳에 난무하는 전선으로 이른바 ‘전선 공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양의 전선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가구나 전자제품에는 전선 수납공간이 따로 있다. 또한 인테리어를 할 때면 전선을 보이지 않게 정리하는 것도 하나의 기술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전선들을 모두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전봇대를 가로지르는 전선 없이도 에너지와 데이터를 전송하고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이런 불만사항들은 단번에 사라질 텐데. 가까운 미래에 기술의 발전으로 조그만 건전지에서 1천kW 이상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즉 전지 하나에 저장 가능한 에너지 용량이 지금보다 수백배로 커진다면 아마 세상의 전선은 하나 둘 자취를 감춰가지 않을까.
언뜻 생각만 해봐도 강력한 건전지를 쓰는, 전선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이 홀가분하게 느껴진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배터리가 조금만 더 강해진다면 그리 먼 미래의 일은 아닐 것도 같은데 말이다.
전선이 사라진 홀가분한 세상을 꿈꾸며 세계 곳곳에서는 이미 차세대 전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각광을 받으며 연구되고 있는 연료전지는 물의 전기분해를 거꾸로 하는 원리를 이용한다. 전기분해란 전기에너지를 이용해 염이나 수용액을 성분 원소로 분해하는 것을 말하는데 전자를 잃는 산화반응, 그리고 전자를 얻는 환원반응을 이용해 전기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바꾸어 물질을 분해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해질 수용액에 직류를 가하면 양이온은 (-)극으로, 음이온은 (+)극으로 끌려가 전자를 얻거나 잃고, 중성의 물질로 석출된다. 물을 전기분해하면 (-)극에서는 환원반응이 진행된 결과 수소기체가 얻어지고 (+)극에서는 이와 반대로 산화반응에 의한 산소기체가 얻어진다. 이러한 전기분해를 역이용하면 천연가스와 메탄올 등에서 얻어낸 수소와 산소를 반응시켜 화학에너지를 바로 전기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전기 이외에 생산되는 것은 물과 열밖에 없다. 연료전지는 배기가스와 같은 오염물질을 전혀 생산해 내지 않는 무공해 에너지인 것이다.
대용량의 배터리가 아니어도 전선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바로 자가발전이다. 사람은 하루에 엄청난 운동을 하고 있다. 수없이 걷고 몸을 움직이며 말을 한다. 이런 신체활동을 잘 이용한다면 훌륭한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신발 바닥에 압축식 발전기를 만들어 걸을 때마다 체중의 압력으로 전기가 생산되도록 하고 양 어깨나 관절에도 회전식 전자석을 설치한다면 팔을 돌리고 움직일 때 전기를 얻을 수 있다. 또한 턱에 소형 발전기를 설치한다면 음식을 씹을 때마다 발전이 가능하다.
실제로 미 매사추세츠공대의 연구에 따르면 단순히 버튼을 누르는 동작만으로도 큰 소리로 부저를 울릴 수 있을 만한 전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늘 가지고 다니는 휴대전화나 소형 컴퓨터 정도는 충분히 자가발전으로 에너지를 충당할 수 있지 않을까?
전선 없는 세상의 자유로움
에너지를 절약하는 면에 있어서도 전선이 사라지는 것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전선이 사라짐으로 해서 전선에서 발생하는 전력손실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력손실은 전선의 저항으로 발생한다. 현재 전선으로 흔히 사용하는 구리의 경우 저항이 1.72×${10}^{-8}$Ω/m이다. 이것은 비도체인 유리(${10}^{10}$-${10}^{14}$Ω/m)나 나무(${10}^{8}$-${10}^{11}$Ω/m)에 비하면 매우 작은 수치이지만 전체 전선의 길이를 따지면 저항에 의한 전력손실은 매우 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길이에 비례해 계속 커지는 저항과 그에 따른 전력손실을 막을 길이 없었다. 게다가 먼 거리를 거쳐오는 동안 전선 상태(굵기, 온도, 노후된 정도 등)도 전력손실에 한몫 단단히 한다. 그러니 전선을 세상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게 한다면 에너지 절약에 효자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전선을 이렇게 많이 쓰게 된 이유는, 전선을 타고 퍼지는 전기가 빛, 소리, 열, 운동에너지 등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쉽게 변환되고 원하는 곳에 언제든지 전기에너지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 때문에 1866년 독일의 지멘스가 최초로 전자석을 사용한 발전기를 만든 이후, 전기에 대한 수요가 해마다 급증해 오늘날과 같은 정보통신사회를 맞이한 것이다.
산소만큼이나 흔하게 퍼져있는 전선 덕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많아졌다. 허준이 살았던 시대에 지금처럼 전선이 곳곳에 깔려 있었다면 그는 밤에도 맘껏 책을 볼 수 있었을테고 멀리 떨어져있는 환자를 진료하러 가느라 며칠 동안 다리품을 팔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전선은 문명의 발전에 있어 핏줄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데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우리 주위 곳곳을 시커멓게 휘감고 있는 전선의 존재가 섬뜩하게 느껴질 것 같다. 전선은 신문명이 인류에게 안겨준 개목걸이 같은 존재인 것이다. 전선과 함께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우리는 이제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고 전선의 자리를 첨단으로 무장한 기술로 대체하려 한다. 전선이 사라진 자리는 우리에게 홀가분함과 해방감을 선사해줄 것이다. 전봇대와의 추억보다 몇배 더 황홀한 자유로움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