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비정상 입자를 명품으로 키운다

재료미세조직연구단 김도연 교수

1999년 11월 말 미국 공군과학기술국은 서울대 김도연 교수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가로 세로 5mm 크기의 산화납 압전재료를 입자 하나로 만들어달라는 것. 전투기의 진동을 제어할 센서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기밀이 필요한 전투기의 재료를 외국에 의뢰한 것은 미 공군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들이 김 교수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뭘까.

비정상적인 입자도 거들떠 보자

김 교수의 전공은 입자(grain)다. 여기서 입자는 원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범위를 가리킨다. 단결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입자는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 입자와 입자의 경계에서는 빛이 산란되기 때문에 보석이 단결정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반짝거릴 수 없다.

김 교수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약간 ‘삐딱한’ 입자다. 하나가 커지면 주변의 다른 입자들도 덩달아 순식간에 커진다. 재료공학에서는 이를 ‘비정상 입성장’이라고 부른다. 원래 입자가 성장할수록 성장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정상이다. 입자의 크기가 2배가 되려면 부피가 8배로 늘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맥주를 컵에 따를 때 생기는 거품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작은 거품은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사라지는 반면 큰 거품은 터지기 직전까지 계속 커진다. 큰 거품이 작은 거품을 잡아먹으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큰 거품이 몸집을 불려갈수록 작은 거품을 먹어치우는 속도는 느려진다.

그동안 재료공학자들은 입자들이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김 교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멀쩡한 입자를 비정상적으로 키우는 일에 매달렸다. 비정상적인 입자들이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산화납(PbO)을 포함한 입자들로 구성된 소재다. 이들 소재는 특이하게도 외부에서 압력을 받으면 전기를 발생시키고, 반대로 전기를 공급하면 재료가 스스로 압축되거나 늘어나는 특성을 보인다. 그래서 이름이 ‘압전재료’다.

1997년 김 교수는 창의적 연구진흥사업으로 ‘재료미세조직연구단’을 꾸리고 본격적으로 비정상 입성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구단은 압전재료의 입자 하나를 비정상적으로 키웠다. 그러자 기존의 압전재료보다 10배나 강한 전기를 발생시켰다. 10배 적은 힘을 가해도 동일한 양의 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연구결과는 미국 세라믹학회지 2003년 8월호에 표지기사로 실렸다.

연구결과가 발표되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곳이 미 공군이었다. 압전재료의 경우 입자의 크기가 클수록 특성이 좋아지는데, 입자 하나로 돼 있을 때 특성이 가장 좋다. 하지만 하나의 입자로 된 압전재료를 만들려면 금속을 주조하는 것처럼 원료를 녹여서 아주 천천히 식히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방법으로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반면 비정상 입성장을 이용해 입자를 키우면 비용을 100분의 1이하로 줄일 수 있다. 미 공군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김 교수의 연구 결과를 주목했다.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는 것은 단결정으로 이뤄져 빛이 산란되지 않기 때문이다.


각진 입자는 뭉쳐야 자란다

김 교수가 찾아낸 해답은 입자의 모양이었다. 모양에 따라 입자가 성장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

입자는 모양에 따라 표면의 구조가 다르다. 입자의 모양이 둥글면 표면이 아주 거친 반면 모양이 각지면 표면이 매끈하다. 때문에 둥근 입자는 원자가 표면에 붙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지만 육면체처럼 각진 입자는 원자가 표면에 붙기가 매우 어렵다. 둥근 입자는 입자가 성장하기 쉽지만 각진 입자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만약 각진 입자를 키우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 ‘핵’을 만들면 된다. 원자 하나하나를 표면에 붙이기는 어려워도 원자를 여러 개 모아 핵을 만들면 표면에 붙이기 쉬워진다. 이는 결합수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자가 정육면체라고 가정하면 원자가 하나 있을 때는 끊어진 결합수가 5개다. 그런데 원자 4개가 모이면 원자당 끊어진 결합수는 3개, 16개가 모이면 2개가 된다. 끊어진 결합수가 적을수록 입자 표면에 결합하기 쉬워진다. 각진 입자는 핵생성 과정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 김 교수가 미 공군의 요청에 따라 개발한 입자도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각진 모양이다.

최근 연구단에서는 크기를 대폭 키운 압전재료를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다. 단결정이 가로 세로 5cm로 미 공군에 납품한 것보다 10배 커졌다. 단결정이 실리콘인 경우 반도체를 만드는 웨이퍼에 사용될 수 있다. 연구단에서는 단결정을 키워 압전재료를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응용분야다.

올해 초에는 김 교수가 미국 세라믹학회지로부터 특집 논문을 써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한 달에 한 번 논문집이 발간되고, 1년에 실리는 논문은 700편 가량인데, 그 중 5편 정도는 특별히 학회 측에서 논문을 써달라고 요청을 해서 싣는 것이다. 중요한 주제를 선정하고 그 주제에 관한 일인자나 선두 연구 그룹에게 논문을 요청하는 것이 관례다.

이번에 김 교수는 비정상 입성장에 대한 논문을 요청받았다. 한국인이 이런 요청을 받은 것은 김 교수가 처음이다. 현재 논문은 마무리 단계에 있다. 김 교수는 “써놓고 보니 전체 참고문헌 160개 중에 절반 정도가 연구단에서 발표한 내용”이라며 흐뭇해했다. 1


미 공군이 개발 의뢰해 김 교수가 비정상적으로 키운 미세조직. 입자 모양이 각진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비정상 성장’이 중요한 이유 - 김도연 교수

189cm의 훤칠한 키가 인상적이다. 다소 마른 편이라 키가 더 커 보인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만 해도 통통한 편이었단다. 친구들은 ‘피그’ ‘짱구’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 때도 키는 컸다. 그런데 농구해볼 생각 없냐는 선생님의 권유 한번 받아 본 적이 없다. 1960년대 국민소득 200달러였던 그 때 그 시절에는 운동을 할 만한 여건이 안됐기 때문이다.

1970년 서울대에 입학했다. 당시 ‘공부 좀 한다’는 학생은 화학공학과나 전자공학과를 지원했다. 그런데 김 교수는 새로 생긴 학과에 가면 전망이 좋지 않을까 기대하며 재료공학과를 택했다. 그는 재료공학과 2회 졸업생이다. 후회한 적은 없다. 김 교수는 “평균적인 능력만 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료공학 안에도 다양한 세부전공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찾아낸 분야가 미세조직, 즉 입자의 성장이었다.

학부 시절엔 공부를 별로 열심히 하지 못했다. 1970년대 나라 안팎이 어지러웠다. 학교는 툭하면 문을 닫았다. 더군다나 김 교수는 학교 조정 선수였다. 당시 서울대는 해군사관학교와 우승을 다툴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한 방송국은 한강에서 열린 조정 경기를 중계하기도 했다. 3학년 한 해는 아예 공부는 포기하고 조정에만 ‘올인’했다.

4학년이 되자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군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당시 과학원(현재 한국과학기술원)으로 진학할 경우 군 복무를 면제해주는 병역특례법이 있었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해보기로 결정한 뒤 1년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운이 좋았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마침 한국과 프랑스가 정부간 협약을 맺어 프랑스에서 공부할 수 있는 제도가 생겼다. 장학금은 프랑스 정부에서 댔다. 이 제도가 겨우 3년 시행됐으니 김 교수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프랑스에 유학가서는 르노자동차연구소에서 절삭공구(엔진을 자르는 쇠) 만드는 연구를 했다. 엔진을 자를 정도로 단단한 쇠를 만들기 위해서는 쇠 속을 들여다봐야 했다. 그 때부터 미세조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의 박사 논문 주제는 소재 입자의 비정상적인 성장이었다. 지금까지 그 관심을 이어 왔으니 30여년간 한 분야를 파고든 셈이다.직접 가르친 제자의 ‘비정상적 성장’에 대해서도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김 교수에게는 재료공학을 전공하고도 언론계에 진출하거나 교회로 간 엉뚱한 제자가 많다.

1997년 재료미세조직연구단 단장을 맡으면서 그는 세계적으로 눈에 띄는 연구 성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내년 5월이면 벌써 연구단 사업이 종료된다. 9년이나 이끌어온 연구단이다. 그간 국내외 우수 학술지에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지난 9월 김 교수는 서울대 공대 학장을 맡아 더 바빠졌다. 그가 연구 외에 다른 일에 잠시나마 ‘한눈파는’ 이유는 하나. 공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공학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우리시대 기술혁명’이라는 책도 출판했다. 그는 “공학의 활동 무대는 세계이며 노력하면 세계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비정상 입성장 원리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5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박창민
  • 이현경 기자

🎓️ 진로 추천

  • 신소재·재료공학
  • 물리학
  • 화학·화학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