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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청동기 전래를 둘라 싼 한·일 고고학자 간의 치열한 논쟁은 납의 동위체 비(比) 측정결과에 의해 마감됐다.

고고학은 땅속에 있는 유물과 바다 속에 있는 유물들을 다룬다. 전에는 거의가 우선 파내고 건져올리는 데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고는 고증하고 복원하고 체계를 세워서 역사의 고리를 이어 나갔다. 따라서 그것은 주로 인문과학의 영역 안에 있었고 학문적인 방법도 인문과학적이었다.

그런데 고고학에서 다루는 유물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만든다는 행위는 언제나 기술적인 작업을 수반하게 된다. 그것은 비록 원시적인 것일지라도 산업기술의 영역에 있었던 생산기술의 소산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에 틀림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다 보면, 고고학에서 무엇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어떻게 유물들이 취급돼야 할지 저절로 떠오른다. 유물의 조사 문류 고증에서 자연 과학적 실험방법이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고고학은 과거의 인류가 남겨 놓은 모든 유형물을 통해 인류의 지나간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인류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 일은 기록된 자료와 기록되지 않은 자료를 활용, 정확한 고증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유물에 대한 조사·연구를 자연과학적 실험에 의해서 해나가는 분야가 바로 실험고고학이다. 그러니까 고고학의 인문과학의 영역이라면, 실험고고학은 자연과학의 영역에 더 가까운 학문이다.

인문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고고학의 여러 문제들, 그 중에서도 유물의 제작연대와 제작지, 그리고 제작방법 등을 결정하는데 실험고고학은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귀면 청동로(鬼面靑銅盧)^고려시대, 국보 145호, 높이 12.9cm, 특이한 디자인과 조각수법, 문양등에서 뛰어난 청동주조기술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실험고고학의 최대 업적

1960년대 말에 필자가 미국의 뉴욕주립대학교 과학사·과학체계학과 연구원으로 갔을 때, 학과장이었던 '마틴 레비'(M.Levey) 교수는 이슬람 과학사가 전공이었다. 그런데 그는 고고화학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실제로 레비교수는 아랍어 과학문헌 해석의 세계적 권위자임과 동시에 미국화학회의 고고화학 분과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했다.

미국화학회지에는 그때 이미 고고화학(archeological chemistry)으로 분류된 논문들이 많이 실리고 있었다. 당시에 레비교수는 고고화학 심포지엄을 열고 그 결과를 모아 '고고화학'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분을 내기도 했다.

MIT 공과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된 '과학과 고고학'(Science and Archeology, R. 브릴 외, 1971)와 '미술과 기술'(Art and Technology, 1970) 이 두 책은 이 분야의 중요한 고전들이다. 실제로 과거에는 과학과 고고학, 미술과 기술은 전혀 상관 없는 학문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내 머리 속에는 그것들이 한덩어리로 얽혀 같이 자리잡고 있다. 내가 화학을 공부한 과학기술사 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실험고고학 분야에 달려들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연과학자 출신들이다. 그들은 그것이 돈벌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과학자로서의 명성과 영예를 얻을 기회가 거의 없는 분야인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학문적 삶을 불사르고 있다. 인류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 순수한 지적(知的) 욕구와 정열에서.

실험고고학과 짝을 이루는 분야가 있다. 기술고고학이다. 이 학문은 기술사(技術史)와 산업기술사보다 더 오랜 시기를 대상으로 한다고 보면 이해가 빨라진다. 기술사와 기술고고학의 관계는 이를테면 역사학과 고고학과의 관계와도 같다.

기술고고학은 산업고고학이라고도 한다. 현대 첨단기술의 기원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진국의 첨단기술연구소에서는 기술고고학 연구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아무 쓸모가 없는, 1백년 앞을 내다본 연구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험고고학과 기술고고학의 가장 큰 업적은, 우리에게 이미 상식처럼 정착된 이른바 카본데이팅(carbon dating)이라는 고대유물의 연대측정법이다. 방사성 탄소(C)14의 반감기가 약 5천7백년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 '우주적 시간 척도(尺度)'는 1949년 시카고대학의 리비(Libby)교수에 의해 창시됐다. 그후 탄소 14 연대측정법이라는 이름으로 고고학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연대결정의 과학적 근거가 되고 있다.

아득한 옛날의 고대 과학·기술과 현대의 최첨단 과학·기술과의 만남이 실험고고학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동위체 비를 통해

실험고고학은 청동기의 원산지가 어디인지를 찾아내는 결정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납(Pb)의 동위체 비(同位體 比)의 측정에 의한 방법이 그것이다.

청동기는 구리(Cu)와 주석(Sn)과 납(Pb)으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동위체표를 보면, 구리에는 2개, 주석에는 10개, 납에는 4개의 안정 동위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질량분석계가 발명되고 나서 동위체 비의 측정은 수없이 거듭됐다. 그 결과 구리와 주석은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 캐낸 것이나 다 동위체 비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납은 아주 다르다. 게다가 같은 광상(鑛床)의 것은 거의 일정한 값을 나타낸다. 이 사실은 납의 동위체 비를 측정하면 그것이 어느 지역에서 산출된 원료를 쓴 것인지 단정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납은 납 204, 납 206, 납 207, 납 208 등 네가지 동위체가 있는데 동아시아 지역, 즉 중국 한국 일본에서 산출되는 납의 동위체 비가 다 다르다는 측정결과가 밝혀졌다. 이 사실은 1930년대부터 계속된 일본학자들의 고민을 풀어 주었다. 동아시아의 청동기를 화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그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일본청동기의 청동원료가 중국 것인가, 한국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결정적인 실마리를 찾게 된 것이다.

이런 방법이 좀더 일찍 알려졌더라면 수십년에 걸친 많은 학자들의 노력과 논쟁을 줄여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학문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다. 1960년대 중반에 미국 뉴욕주에 있는 '코닝' 유리박물관의 화학자 브릴(R.H.Brill)이 고대 유리의 산지 분류에 응용하면서 시작된 이 방법은 금속의 실험고고학 연구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1969년 봄, 뉴욕주립대학에 도착한 날 저녁에 나는 브릴박사의 이 연구발표를 들을 수 있었다. 과학사학과에서 주최한 그의 강연회에 초청받은 것이다. 기술고고학에 관심이 컸던 내게는 참으로 좋은 인연이었다. 레비와 그의 친구 브릴과의 만남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한국의 고대기술사 연구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실험고고학적 방법으로 접근하려면 나의 생각을 크게 고무시켜 준 것이다.

한국이냐? 중국이냐?

일본의 청동기기술은 어디서 왔을까. 많은 일본학자들은 대륙에서 건너왔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학자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갔다고 말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대륙의 청동기기술이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으로 갔다고도 표현한다.

아무튼 일본학자들은 일본의 청동기기술이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생각을 갖고 싶어 한다. 반면 한국학자들은 한국인의 청동기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얼핏 보면 민족감정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입맛이 쓰다.

그래서 이 문제는 오랫동안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이론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의 연구는 자연과학의 도움을 받지 못했으므로 금방 한계에 부딪치곤 했다.

그것이 최근에 와서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기 시작했다. 납의 동위체 비 측정에 따른 청동의 원산지 분석결과가 바로 논쟁을 마감시키는 강력한 근거다. 일본에서 출토되는 청동기유물들 속에 포함된 납이 중국에서 산출된 납이냐, 한국 것이냐가 분명히 판가름나게 된 것이다.

아직은 그 분석 예가 몇 개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그 작업은 더 확대되어 갈 것이다. 일본 도쿄의 국립문화재연구소 분석 결과는 그래서 큰 의의를 갖는다. 이 연구소는 최근 일본 각지에서 출토된 53개의 동탁(銅鐸)을 분석했는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분류된 2개의 동탁은 "한국으로부터 전래된 질좋은 청동기를 녹여 주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했다.

이제 일본의 청동기기술의 시작을 하나의 기술사로서 재구성해 보자.

한반도의 돌거푸집에 의한 청동기의 주조기술은 합금으로 된 청동 덩어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때가 기원전 3세기경이다.

처음에는 완제품인 청동기가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일본의 규슈(九州) 지방으로 전해졌다. 대마도와 규슈에서 출토된 한국형 청동검과 규슈에서 출토된 청동기들 중에는 숭실대학교 박물관의 돌거푸집에 꼭 들어맞는 것도 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기술자가 기술과 원료를 함께 가지고 가서 일본에서 청동기를 만들어냈다. 기술 이전의 첫 단계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 다음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술자가 일본에서 직접 청동원료를 찾아내 현지에서 바로 청동기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청동기기술이 이식되는 둘째 단계다.

이런 사실들은 일본에서 출토된 청동기가 여실히 증명해 준다. 일본에서 발굴된 여러 초기 청동기유적들은 일본학자들의 표현대로 이른바 '한국계'다.

이제 일본의 많은 중견학자들은 일본의 청동기기술이 한국인 기술자와 함께 한국에서 건너간 청동합금을 원료로 해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일본에서 만든 독특한 청동기인 동탁(銅鐸)의 화학적 분석결과, 총 47개 중 30개에서 아연이 발견됬다. 이 사실도 일본의 청동기 기술이 한국청동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경주 입실리에서 출토된 기원전 1세기경의 작은 동탁이나 신라시대의 선림사종(禪林寺鐘)의 분석결과도 이것들이 모두 같은 유형의 청동으로 만들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의 청동기는 그 후에도 일본으로 건너갔다. 지금 일본의 쇼소인(正創院)에는 86벌 4백36개의 뚜껑 달린 놋쇠 겹대접이 보존되고 있다 그것은 8세기경에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10개까지 겹쳐 넣을 수 있도록 만든 이 놋그릇은 그 가공기술이 무척 뛰어난 유물이다. 또 '크게 쓰고 작게 챙겨 두는'컴팩트한 디자인은 일본사람들을 경탄하게 한다.

8세기경에 이만큼 훌륭한 놋그릇을 만들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청동기 주조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일본은 그 때에도 좋은 청동기를 한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일본에 수출한 철정

이러한 높은 수준의 청동기기술은 고려시대에도 계승됐다. 지금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청동기유물들은 주조기술 금속가공기술 예술성에서 훌륭한 작품들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 사신에게 철정(鐵鋌) 40개를 주었다고 한다. 철정은 삼국시대에 철제품을 만들던 소재(素材)로서, 운반과 보존이 편하도록 일정한 모양으로 제조되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금괴와 같이 화폐로서의 가치도 가진 것이었다. 철의 소유는 곧 부(富)와 힘(權力)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부장품으로 넣을만큼 철정을 귀하게 여겼다. 그 결과 철정은 일본에 많이 보존돼 있다. 철정은 고분에 따라서 크기가 고른, 크고 작은 2종류가 출토되고 있다. 큰 것이 40cm×10cm 정도고 무게는 4백50g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두께가 9mm 정도의 철판도 나왔다.

이와 비슷한 철정은 고신라와 가야 및 백제의 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아무튼 그 당시 한국에서는 많은 양의 철정을 일본에 수출했던 것 같다. 일본의 사료에는 백제가 일본에 철을 계속해서 보내 주겠다고 약속을 한 기록이 남아 있다.

철의 기술사는 삼국시대에 대량의 철이 일본에 수출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 당시의 한국과 일본의 힘과 부의 역학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당시의 철정이 매우 질이 좋은 철의 소재였다는 사실을 창녕(昌寧)에서 출토된 철정의 분석결과, 확인할 수 있었다. 정성분석에 따르면 니켈(Ni) 코발트(Co)가 약간 두드러지고, 알루미늄(Al) 칼슘(Ca) 마그네슘(Mg) 규소(Si)의 4원소는 모두 적어서 협잡물이 적은 질 좋은 철임을 시사해 준다. 또 정량분석 결과는 인(P) 0.104%, 황(S) 0.90%, 구리(Cu) 0.00%, 티타늄(Ti) 0.61%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티타늄의 함유가 두드러져, 사철이나 함티타늄자철광을 원료로 썼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의 철의 기술에 대해서는 지난해 윤동석(尹東錫) 박사가 출간한 '삼국시대 철기유물의 금속학적 연구'라는 훌륭한 저서가 있다. 이것은 고대 한국의 제철기술의 높은 수준을 금속학적으로 입증해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일본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한국의 철제톱 유물, 길이 약 14cm, 너비 2mm, 4~5세기. 이 톱의 전래로 일본의 목조 건축기술에 혁명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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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전상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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