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년 열두달이 한가위만 같으면 좋겠다. 하지만 한가위에 골치 아픈 곳이 있다. 바로 고속도로. 올해도 추석 연휴 동안 차량 행렬이 고속도로를 가득 메웠다.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같은 구간이고 차량 수가 비슷하더라도 어떨 때는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어떨 때는 느리긴 하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어제 소통이 원활했으니 오늘도 비슷하겠지 하고 차를 몰고 나갔다가는 자칫 낭패를 보기 일쑤다.
또 교통흐름이 좀더 원활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건설한 도로가 오히려 상습 정체를 유발하는 복병으로 전락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완공 후의 교통흐름을 충분히 예상하고 나서 건설했을텐데 말이다.
이런 문제들은 도로 상황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단숨에 해결될 일이다. 1990년대부터 물리학자들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교통흐름을 실제 상황과 유사하게 재현하는 시뮬레이션 모델을 만드는데 나선 것. 하지만 불행하게도 도로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여러가지 교통흐름을 정확히 재현하는 모델은 아직 등장하지 못했다.
최근 서울대 물리학부 김두철 교수 연구팀이 독일팀과 함께 교통흐름을 실제와 가장 가깝게 구현해 수시간 뒤의 교통흐름까지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 국제 물리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물리학이 과연 어떤 방법으로 교통흐름의 수수께끼를 풀었을까.
고속도로 차량흐름 3가지 유형
물리학자들은 교통흐름의 패턴을 3가지로 구분했다.
평일 한낮의 고속도로를 떠올려보자. 차들이 서로 질세라 전력질주 한다. 차량 사이 간격도 꽤 넓다. 이처럼 차들이 도로에서 허용하는 최대 속도까지 낼 수 있는 상태를 ‘자유흐름’이라고 한다. 자유흐름 상태의 차들은 빠르고 자유롭게 달리기 때문에 활발하게 운동하는 기체상태의 움직임에 비유된다.
자유흐름과는 반대로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도로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정체상태’일 때 차량의 움직임은 제자리에서 조금씩 왔다갔다하는 고체상태와 비슷하다. 이때 차량들이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면서 정체 지점이 마치 계속해서 뒤로 옮겨가는 것처럼 보이는 특징이 있다. 관측 결과 정체 지점이 뒤로 옮겨가는 속도는 시간당 15-18km 정도로 일정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체상태와 차량 수는 비슷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동기흐름’이 나타난다. 동기흐름은 차량 각각의 속도는 자유흐름보다 느리지만 서지 않고 꾸물꾸물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상태. 자유흐름일 때 차량은 다른 차량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속도를 낼 수 있는데 반해, 동기흐름일 때는 주변 차량의 흐름에 심하게 영향을 받는다. 동기흐름에서 차량의 움직임은 가까운 거리에서 운동하는 액체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운전자 입장에서는 모든 도로가 항상 자유흐름 상태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러나 앞차가 갑자기 서는 돌발상황이 일어날 경우 사고가 날 위험이 가장 높은 상태가 바로 자유흐름이다. 관측에 따르면 자유흐름의 차량들은 돌발상황을 감안한 안전거리보다 상당히 좁은 간격으로 달린다고 한다.
모든 도로의 차량이 자유흐름으로 달릴 수 있도록 하려면 넓은 도로가 많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도로를 넓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차가 많아질수록 자유흐름을 유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단위시간 동안 도로의 특정지점을 통과하는 차량 수는 평균적으로 자유흐름보다 동기흐름일 때 더 많다. 동기흐름의 경우 차량 각각의 속도는 자유흐름보다 느리지만 차량 사이 간격이 훨씬 더 좁기 때문이다. 도로 관리자 입장에서는 도로가 정체상태에 빠지지 않고 일정한 시간 동안 많은 차량이 지나갈 수 있는 동기흐름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들이 내놓았던 기존의 교통흐름 모델들은 대부분 동기흐름을 제대로 재현하지 못했다. 길이 뻥 뚫리거나 꽉 막혀있지 않고 시냇물이 졸졸 흐르듯 차들이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도로 상황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했다.
지난 6월 서울대 물리학부 김두철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교통흐름 모델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됐다.
교통흐름을 구현하는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차량의 움직임에 대한 규칙을 수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 규칙을 따르는 차량을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 여러대 설정해놓고 시뮬레이션 해 과연 실제와 같은 교통흐름의 패턴이 나타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시뮬레이션 성공의 관건은 실제 일어나는 현상을 현실과 최대한 가깝게 재현했느냐에 달려있다.
김 교수 연구팀은 기존 교통흐름 모델의 경우 사고가 날 것 같은 돌발상황이 일어났을 때 차량이 대부분 바로 급정거할 수 있게 잘못 설계됐다는 것을 간파했다. 실제로는 돌발상황을 운전자가 인식하고 나서 차량을 조작하는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차량의 움직임을 원하는대로 즉시 바꿀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운전자가 급브레이크를 밟자마자 차가 바로 서지는 못한다.
또 운전자는 가능한 목적지에 빨리 가는 게 목적이긴 하지만 최소한 앞차가 급정거할 경우를 어느 정도 대비하고 운전을 한다. 기존 모델들은 이 점도 간과했다. 무조건 빨리 달리다가 돌발상황에서 급정거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사고를 피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운전자가 나름대로 최고 속력을 판단하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처럼 가속과 감속시 나타나는 운전자의 반응 효과를 수학식으로 표현해 새로운 교통흐름 모델에 포함시켰다. 이를 통해 동기흐름을 성공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연구를 주도한 서울대 물리학부 이현근 박사는 “차량의 가속 성능을 단순히 어느 범위 이내로 제한한 교통흐름 모델은 많았지만 감속하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반영한 모델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운전자 과반응으로 차량 몰려다녀
기존의 교통흐름 모델이 가진 또하나의 한계는 자유흐름에서 차들이 몰려다니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자유흐름일 때는 희한하게도 운전자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차량이 무리를 지어 달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을 때 다중추돌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
연구팀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운전자의 인간적 요소를 교통흐름 모델에 포함시키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앞차가 자신보다 빨리 달리고 있거나 전방 도로 상황이 좋아보이면 운전자는 쉽게 상황을 낙관한다. 그래서 허용된 최대 속도보다 더 빨리 달린다는 것.
반대로 전방이 막힐 것 같아 보이면 도로 상황을 쉽게 비관해 속도를 늦춘다. 운전자가 도로 상황을 나름대로 판단하고 예측해서 속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처럼 운전자가 도로 상황을 판단할 때 ‘오버’하는 경향을 ‘과반응’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차량 움직임을 표현한 수학식에 과반응 효과를 포함시켰더니 자유흐름에서 차량이 몰려달리는 현상이 그대로 재현됐다. 기계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의 상호작용이 실제 교통흐름을 재현해낸 것이다.
그렇다고 기존의 교통흐름 모델이 운전자의 인간적 요소를 아예 무시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제한속도가 90km/h로 설정된 도로라면 운전자가 속도를 89-91km/h 사이에서 불규칙적으로 조절하도록 설정한 모델도 있다.
그러나 이 박사는 “기존 교통흐름 모델은 운전자의 심리를 너무 단순화시켰다”며 “사람은 자기 나름의 의도대로 행동하는데 운전자의 이런 인간적 요소가 교통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이 만든 교통모델은 자유흐름에서 차가 몰리는 현상과 동기흐름을 구현한 세계 첫 모델이다. 이 연구성과는 세계적인 물리학 저널 ‘피지컬 리뷰 레터스’ 6월 11일자와 ‘피지컬 리뷰 포커스’ 6월 18일자에 게재됐다.
교통상황 예측에 응용 가능
실제 고속도로에서 운전자들은 교통흐름에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야지 하고 일부러 의도해서 운전하지는 않는다. 단지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가려는 생각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에는 흥미롭게도 자유흐름, 동기흐름, 정체상태 같은 패턴이 나타난다. 차량 한대만 보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현상이 차량 여러대가 모이니 일어난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을 물리학에서는 ‘창발현상’(emergent phenomena)이라고 한다.
이번 연구에는 교통흐름 물리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독일 두이스부르크-에센대의 쉬레켄베르그 교수 연구팀도 참여했다. 독일에는 현재 1-2시간 후의 교통흐름을 예측해서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교통예측시스템이 쓰이고 있다. 이번에 개발된 모델도 독일 교통예측시스템에 적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쉬레켄베르그 교수는 “지금까지 알려진 교통흐름의 특성을 잘 재현하는 이번 모델을 통해서 독일 교통예측시스템의 정확도가 상당히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명절 때마다 어디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린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평소에도 전광판에 구간별 속도, 소요시간 같은 교통정보가 표시된다.
하지만 서울에서 부산까지 14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14시간 전에 출발한 차를 기준으로 측정한 결과다. 바로 지금 부산으로 출발하려는 운전자에게 14시간 전의 도로 상황은 이미 소용없는 정보가 돼버린 셈이다. 수시간 후의 도로 상황을 미리 알려주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도로를 건설하기 전에 완공 후 교통흐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설계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완공 후 예상외로 차들이 몰려 상습 정체구간이 된 도로를 허둥지둥 확장하는 땜질 공사도 줄어들 것이다.
서울대 연구팀의 참신한 아이디어로 개발된 새로운 교통흐름 모델이 우리나라의 복잡한 도로 상황을 족집게처럼 속시원히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에 한몫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