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9일 영국 판보로 에어쇼에서는 유럽과 미국이 자존심을 걸고 불꽃 튀는 한판 승부를 펼쳤다. 유럽의 에어버스와 미국의 보잉이 자사의 최첨단 여객기를 선보이며 수주 전쟁에 뛰어든 것. 윤곽을 드러낸 에어버스의 A380과 보잉의 B7E7 드림라이너의 ‘대격돌’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슈퍼 여객기가 뜰까, 미니 여객기가 뜰까
지난해 항공기 시장에는 ‘이변’이 발생했다. 에어버스가 3백5대의 여객기를 납품해 2백81대를 인도한 보잉을 제치고 선두를 차지한 것. 에어버스는 1970년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이 항공우주 사업을 합친 후 2001년 단일 기업으로 탈바꿈한 다국적기업이다. 창사 이래 88년간 전세계 항공기 산업의 1위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던 보잉으로서는 충격이었다.
보잉의 최대라이벌 등장의 예고편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올 상반기에 에어버스가 판매한 여객기와 화물기는 총 1백61대로 보잉보다 10대가 많다. 게다가 에어버스는 올해 판매 목표를 보잉보다 20대나 많게 잡았다. 만약 이 목표를 달성한다면 2년 연속 에어버스가 세계 항공기 산업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게다가 에어버스는 2006년 초 취항 예정인 초대형 여객기 A380을 내세우며 보잉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A380은 5백50명에서 최대 8백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어 민간 항공기 중 세계에서 가장 큰 ‘슈퍼’ 여객기가 될 전망이다. 현재 가장 큰 여객기인 보잉의 B747보다 1백50명가량 더 많은 인원을 탑승시킬 수 있다.
이에 대해 보잉은 B7E7 드림라이너를 선보이며 에어버스와 맞대응에 나섰다. 에어버스보다 2년 늦은 2008년 취항을 목표로 2백50석 규모에 최첨단 기술을 적용해 연료 소모와 소음을 획기적으로 줄인 ‘미니’ 여객기로 승부를 걸겠다는 것. 여객기 명칭 7E7도 이런 전략에 맞춰 효율(Efficiency)을 의미하는 ‘E’를 썼다.
에어버스와 보잉이 이처럼 서로 다른 노선을 선택한 것은 미래 여객기 시장의 성장 방향에 대한 시각 차이 때문이다.
에어버스는 최근 세계 민간 항공사들이 합병, 동맹 등으로 덩치를 불려나가는 추세에 주목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수년 내에 여행객들은 허브에 해당하는 몇 군데 거점 공항을 통해 많이 이동할 것이다. 허브에서 허브로 이동하는 여행객들이 점차 늘어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장거리를 운항하는 항공사들은 편수는 적은 대신 좌석이 많은 초대형 항공기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어버스가 A380으로 가닥을 잡은 이유다.
반면 보잉은 에어버스와 상반된 견해를 보인다. 허브간 이동보다는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지점간 여행이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대다수 사람들이 출발지와 목적지를 한번에 연결하는 여객기를 주로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여행객들이 굳이 허브를 통해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면서까지 불편을 감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보잉은 허브를 연결하는 초대형 여객기보다는 도시를 연결하는 중형 여객기를 차기 모델로 점찍고 B7E7을 선보였다.
에어버스와 보잉의 팽팽한 접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탄소섬유로 동체 군살빼기
우선 A380과 B7E7의 기술력을 보자. 크기에서 A380을 따라올 여객기는 없다. 외관은 보통 여객기와 비슷하지만 동체 길이가 73m, 날개 폭이 80m, 꼬리 날개 높이가 24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축구장 넓이에 아파트 10층 높이의 크기라면 상상이 되겠는가. 기체가 높아 여객기 내부는 아예 2층으로 설계했다.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무게 또한 2백75t에 달한다. 그런데 여객기가 이륙을 하게 되면 실제로 이보다 배 가까이 무거운 5백60t까지 나가게 된다. 기체의 무게가 이정도 무거워지면 연료가 빨리 닳아 유지비가 비싸진다. 또 일부 공항은 기체의 이륙과 착륙시 하중을 견디기 위해 활주로를 보강해야 한다.
결국 A380의 기술력과 성공 여부는 동체의 무게를 얼마나 줄이느냐에 달려있다. 에어버스는 이를 위해 A380의 동체 상부에 기존의 알루미늄 합금판 대신 유리섬유와 알루미늄 합금판을 층층이 결합한 신소재를 사용했다. 또 동체 후미에는 알루미늄 대신 탄소섬유를 사용했다.
기체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A380의 ‘다이어트’는 계속됐다. 모든 객실 집기를 10-30% 가볍게 만들었고, 의자와 화장실 프레임은 철 대신 탄소혼합물을 사용했다. 또 서빙 카트는 알루미늄으로 만드는 등 기체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동체에 사용한 최첨단 소재라면 B7E7도 뒤지지 않는다. 보잉이 B7E7의 최신 기술로 자신 있게 내세우는 것이 동체에 사용한 탄소섬유 복합재다. 탄소섬유 복합재는 순수 탄소와 수지가 결합된 것으로 강하면서도 가벼운 섬유다. 보잉은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전투기나 여객기에 이를 사용해왔다. 하지만 여기에는 탄소섬유 복합재를 한정적으로 사용해 주로 동체의 꼬리 표면에서만 볼 수 있었다.
반면 B7E7은 동체 대부분과 기체 무게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날개가 모두 탄소섬유 복합재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게다가 탄소섬유 복합재를 열이나 빛, 음속에 견딜 수 있도록 철저한 테스트를 거쳐 그 성능을 한층 강화시켰다. 이렇게 되면 B7E7은 기체의 무게가 대폭 줄어 에어버스의 동급 기종인 A330보다 10t 이상 가벼울 것으로 기대된다.
또 보잉은 탄소섬유 복합재에 ‘똑똑한’ 기능까지 추가해 A380과 소재에서 기술 차별화를 시도했다. 동체에 충격이 가해질 경우를 대비해 탄소섬유 복합재에 전자 센서 판을 부착한 것. 센서를 컴퓨터에 연결하면 만일의 경우 동체에 갑작스런 충격이 가해지더라도 센서가 응력 패턴을 감지해 손상을 예방할 수 있도록 했다.
호텔식 시설 vs 맞춤형 여행
아무리 기체 자체의 기술력이 뛰어나도 승객들이 안락하고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면 여객기는 성공할 수 없다. 이 때문에 A380과 B7E7 모두 객실 내부 꾸미기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A380의 경우 주문형 오디오비디오시스템(AVOD, Audio&Video-On-Demand)을 적용해 승객들이 자신의 좌석 전면에 설치된 LCD로 원하는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텐징사가 개발한 인터넷 시스템을 사용해 실시간 이메일 교환이나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도록 한 것은 당연하다.
특히 기내에 다양한 편의 시설을 구비해 ‘호텔식’ 서비스로 승객들을 공략할 계획도 갖고 있다. 비즈니스클래스의 경우 아예 1백70°까지 젖혀지는 좌석을 설치해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했다. 또 샤워룸을 비롯해 헬스장, 쇼핑몰, 라운지, 바까지 갖춰 승객들의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할 예정이다.
A380의 호텔식 전략에 대해 B7E7은 ‘맞춤형’ 전략을 구사했다. B7E7도 기본적으로 동체 너비를 35cm가량 넓혀 객실 내부의 좌석간 여유 공간을 키웠다. 인테리어를 고급화하고 습도를 높여 더욱 쾌적한 환경을 조성했고, 보잉 커넥션 시스템을 이용해 이메일, 인터넷, TV 등을 실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보잉은 이와 함께 승객들에게 ‘조용한 비행’도 서비스한다. 첨단 기술을 적용한 엔진을 이용해 소음을 85dB까지 낮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B7E7의 핵심 전술은 다른 데 있다. B7E7 기체 자체를 2가지 모델로 출시하는 것. 이를 통해 항공사와 승객을 한꺼번에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다. 기본 모델인 B7E7은 전체 길이 59m로 승객 2백17명을 태우고 1만5천7백km를 비행하는 장거리용이다. 여기에 단거리 노선용 모델을 추가했다. 기체 길이는 B7E7과 동일하지만 날개를 좀 더 짧게 해 기체의 무게를 줄인 B7E7 SR 모델을 함께 선보인다. 이렇게 되면 지역별 항공사의 특징과 여행객들의 목적에 딱 맞춘 맞춤형 여객기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최후의 승자는 아직 미지수
A380과 B7E7는 기술력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가려지는 법. 현재 전세계는 두 라이벌의 추후 행보에 이목이 쏠려 있다.
이미 2년 전에도 에어버스와 보잉의 미래 여객기 시장 동향에 대한 관점을 두고 한 차례 ‘국지전’이 벌어졌다. 허브간 대형 여객기냐, 지점간 소형 여객기냐를 놓고 유럽과 미국이 각자 자국의 손을 들어주는 식의 논쟁이 있었던 것. 하지만 이 때도 뾰족한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지금은 일단 최소 10년 정도 후에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분위기다. 국내 항공전문가는 “현재는 A380 같은 대형 여객기 시장과 B7E7 같은 중소형 여객기 시장이 모두 승산이 있다는 입장이 지배적”이라며 “지역에 따라 시장이 분화될 수 있다”고 밝혔다.
아시아 지역의 경우 인구밀도가 높아 중심 도시 위주로 발달한 나라들이 많다. 이런 경우에는 중심 도시의 허브를 연결하는 대형 여객기인 A380이 충분히 시장성이 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 등 아시아보다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낮고 단체 여행보다는 개별 여행 성향이 강한 지역에서는 지역을 연결하는 B7E7이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보잉의 경우 이미 B747을 성공시켰기 때문에 대형 여객기 시장에 대한 ‘감’과 판단력을 충분히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보잉이 대형 여객기 대신 B7E7으로 노선을 잡은 데는 이유가 있다. 보잉은 향후 20-30년 동안 대형 여객기 수요가 1백-2백대 수준에 그칠 것으로 판단했고, 이런 상황에서 에어버스와 보잉이 모두 대형 여객기 시장에서 경쟁을 벌인다면 양측 모두 출혈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더군다나 고유가 시대에 경제성을 따졌을 때는 대형 여객기 보다 B7E7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료소모를 기존 여객기보다 20-30% 가량 줄인 첨단 기술을 통해 연비를 높임으로써 여객기의 운영비를 대폭 감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
따라서 보잉은 향후 20년간 세계 항공사들이 B7E7을 3천5백대 이상 구입하는 반면 A380은 싱가포르와 런던을 잇는 노선처럼 승객의 이용량이 많은 노선에만 사용돼 점차 그 수가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B7E7이 항공기 시장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에어버스 역시 여유만만하다. A380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연료는 항공사 전체 경영비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현재 여객기는 연료비가 전체 경영비의 20% 이하를 차지할 만큼 충분히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대한항공이 지난해 6월 A380 확정 주문량 5대를 포함해 총 8대를 도입하기로 결정했고 2007년말부터 유럽 등 장거리 노선에 투입할 예정이다. 보잉은 지난 3월 국내에서 B7E7 드림라이너에 대한 제품 설명회를 갖고 이를 토대로 아시아 항공기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했다.
현재 상승세를 타고 있는 에어버스와 연륜으로 무장한 보잉의 박빙의 승부는 두명의 승자를 낳을지, 한명의 패자를 만들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