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와 고급 프린터의 사용이 크게 늘어나면서 일반 PC사용자들도 높은 품질의 출력물을 얻으려는 욕구가 강하다. 이에 따라 이전까지는 출판 전문가나 인쇄업 종사자의 관심대상이던 폰트가 일반 PC사용자들 사이에 새로운 관심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최근 워드프로세서나 DTP(탁상출판시스템)에는 보고서나 논문 등을 손쉽게 작성할 수 있는 편집 기능 등이 강화되고 있으며 보다 좋은 출력을 얻기 위해 다양하고 아름다운 폰트가 속속 개발되고 있다. 심지어 윈도우용 워드프로세서로 발표된 소프트웨어 중에는 워드프로세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DTP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난 편집기능을 제공하는 것도 있다.
사용의 편리성과 기능의 다양성과 함께 출력물의 질에 따라 사용자들의 선택이 달라지는 워드프로세서나 DTP시스템은 결국 폰트의 종류와 품질에 따라 그 응용 소프트웨어의 품질과 가격이 결정된다. 하지만 폰트는 일반 사용자가 만들어 사용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몇몇 프로그래머들은 적당히 폰트를 만들어 자기가 개발한 프로그램에 이를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품질면에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국내에서 인쇄업계의 CTS 도입과 PC용 DTP 시스템의 확산으로 인해 폰트시장은 계속 커지고 있고 이에 따라 폰트 개발업체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폰트를 개발 판매하고 있는 업체로는 서울시스템, 한국컴퓨그래피, 한양시스템, 휴먼컴퓨터, 신명컴퓨터, 창인, 태시스템 등 7-8개 서체 개발업체와 윤디자인연구소, 안그라픽스, 산돌글자은행 등 서체 전문 디자인 하우스가 있다.
서체 개발 업체에서는 폰트를 독립적으로 판매하기 보다는 대부분 DTP 시스템에 내장시켜 판매하고 있는데, 주된 고객인 경인쇄분야에서는 대당 1천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서체 전문 디자인 하우스의 경우는 대중적인 보급보다는 광고 디자이너, 편집 디자이너 등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폰트를 공급하고 있으며 한 종류당 가격이 10만원 부터 1백만원대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폰트의 가격은 폰트와 함께 공급되는 출력기에 따라 달라진다. 일례로 윤디자인연구소의 윤체모음 4종의 경우 3백dpi 출력기용 폰트가70만원, 6백dpi 폰트가 1백10만원, 1천2백dpi 폰트가 2백50만원이다.
DTP 시스템 확산으로 폰트 시장 확대
국내 폰트 개발은 87년 매킨토시가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엘렉스 컴퓨터가 제공한 매킨토시 컴퓨터는 '포스트스크립트(postscript)'라는 기존의 비트맵 폰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교한 아웃라인 폰트를 제공해 국내 출판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매킨토시는 뛰어난 편집기능과 미려한 출력을 제공함으로써 신문사, 경인쇄업체 등 출판분야에서 각광받았고 이와 함께 한글화 작업을 위한 매킨토시용 한글 포스트스크립트 폰트 개발은 필수적이었다.
폰트 개발은 현재 수동 사식기에서 쓰이는 한글 서체를 전산화하는 작업과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는 두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전산서체를 개발하는 일은 방법에 따라 간단할 수도, 무척 어려울 수도 있다. 글자의 원본이 되는 원도를 스캐너로 입력받아 서체 제작도구를 사용하면 쉽게 글자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품질이 그리 뛰어나지 못하고 독창성이 없어 상품으로서 가치가 떨어진다. 따라서 대부분 서체 제작도구를 통해 윤곽선을 자동 추출한 후 디자이너가 교정을 한다. 서체 제작도구로는 매킨토시용 폰토그래퍼(fontographer)나 폰트스튜디오(fontstudio)가 주로 사용되고 있으며 독자적으로 툴을 개발한 업체들도 있다.
이러한 작업도 그리 쉬운 편은 아니나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특히 새로운 서체의 개발은 사람들의 눈에 익숙한 본문체보다는 제목 등에 사용되는 헤드라인체에 국한되고 있다.
'윤체'를 제작한 윤디자인연구소 윤영기 소장은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가 가장 중요하다. 디자인하고 제작하는데 각각 3-4개월씩 걸리므로 서체를 만드는데 최소한 1년 이상이 소요된다. 또 사람들이 알기까지 1년은 걸리므로 결국 한 서체를 개발하려면 2년동안은 투자만 해야 한다"고 개발의 어려움을 말한다.
엘렉스컴퓨터와 손잡고 매킨토시 초창기부터 한글 폰트를 제공해왔던 신명컴퓨터(구 신명시스템즈)의 이재호 부장은 "포스트스크립트를 지원하는 레이저 프린터에 한글 15종, 한자 7종, 약물 6종 등을 포함하여 5백80만원에 판매하고 있으나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한글은 대개 완성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2천3백50자를 일일이 디자인해야 하며 약 5천개가 넘는 약물과 한자 등도 제작해야 하는데 하루에 30자도 디자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
초창기 폰트 개발업체들은 수요자가 있는 경인쇄 분야의 매킨토시용 포스트스크립트 폰트 개발에 주력했지만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편집기능이 점차 강화되고 IBM PC용 DTP 소프트웨어가 등장함에 따라 IBM PC용 폰트를 개발하는 업체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안으로 트루타입 폰트 공급 예상
88년 4월 국내 처음으로 국제컴퓨터 소프트웨어 사무자동화기기 통신기기 전시회(KIECO)에 포스트스크립트 명조, 고딕체를 출품한 신명컴퓨터는 이후 꾸준히 폰트를 제작, 현재 63종을 제공하고 있다. 신명컴퓨터는 DTP 시스템으로서 매킨토시와 포스트스크립트 전용 프린터, 폰트를 한 세트로 판매하나 레이저프린터와 번들로 또는 폰트 자체만 판매하기도 한다. 또 코아기술의 오토페이지에 폰트를 제공하기도 했다.
올해부터 매킨토시에 한글 35가지, 한자 22가지 신서체를 제공하고 있는 한국컴퓨그래피 또한 신명컴퓨터 서울시스템과 마찬가지로 포스트스크립트 폰트를 개발, DTP 시스템과 함께 판매하고 있다.
한양시스템과 휴먼컴퓨터는 자체적으로 포스트스크립트 폰트를 개발해 공급한다. 이들은 주로 응용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와 연계해 해당 소프트웨어에서 요구하는 폰트를 제공하고 있다. 한양시스템은 한글과컴퓨터의 한글 2.0과 한메소프트의 윈도우용 한메한글 2.0에 폰트를 공급했다. 휴먼컴퓨터는 지난 6월 말 업그레이드 된 한글 2.1에 팸체 안체 등 13개 폰트를, 한컴퓨터의 사임당 2.0, 틀마름이에 신명 중고 샘물체 등 3가지 폰트를, 최근 금성 하나그림워드에도 폰트를 제공하였다.
한컴퓨터의 강태진 소장은 휴먼 폰트를 채용하게 된 이유를 "휴먼컴퓨터는 많이 사용되는 글자 약 5백자 정도(90%)는 완성형으로, 나머지는 조합해서 사용할 수 있게 완조형 폰트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휴먼은 폰트 외에 '문방사우'라는 IBM PC용 DTP 소프트웨어를 개발, IBM PC를 DTP 시스템으로 활용할 수 있게 선택의 폭을 넓혔다.
사용자들 요구 다양해져
문화부에서도 작년 가을 값싸게 사용할 수 있는 한글 윤곽선 서체를 공개함으로써 폰트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고 우리 한글에 대해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모범적인 서체를 제시하자는 취지에서 '문화부바탕체'라는 윤곽선 폰트를 개발했다. 이에 따라 사임당 등 몇몇 응용 소프트웨어에서는 이를 수용하고 있다.
한편 포스트스크립트와 윤곽선 폰트 시장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트루타입 폰트는 큐닉스컴퓨터에 의해 제작돼 한글윈도우에 이식되었다. 아직까지 폰트 개발업체들이 포스트스크립트 폰트를 지원하고 있지만 창인 등 몇몇 업체에서 트루타입 폰트 개발에 뛰어들었으며 윈도우의 확산에 따라 연말까지는 트루타입 폰트를 거의 지원하고 나설 것으로 보인다.
PC 사용자의 잠재수요가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분야에서의 폰트 개발업체들 간 경쟁도 치열해질 전망이다.
실제로 휴먼컴퓨터는 올초 국내 처음으로 일반 사용자들을 겨냥, 한글윈도우에 추가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여러 종류의 폰트를 한데 묶어 상품화한 '글꼴지기'(7만7천원)를 선보였다. 또 '묵향'처럼 한글에서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한글 폰트 패키지도 선보이고 있어 사용자들의 요구가 얼마나 다양해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한글과 컴퓨터 개발지원부 이지인씨는 "사용자들의 폰트에 대한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폰트가 많아지다보면 프로그램의 크기가 커지기 때문에 사용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만 제공하고 특별한 폰트는 한글 폰트 패키지로 따로 공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폰트를 사용하는 대상은 폰트가 장착된 일반 사용자이지만 구입은 응용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한다. 결국 일반 사용자들은 응용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서체를 맛보는 것이다.
하지만 각 애플리케이션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폰트가 없어 사용자들은 해당 소프트웨어를 지원하는 폰트를 모두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한글과 한글윈도우 두 프로그램을 사용할 경우, 한글이 인식할 수 있는 폰트와 트루타입 폰트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른 응용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결국 중복된 폰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래스터라이저 공개가 활용 확산의 관건
이재호 부장은 "한 서체당 약 5MB의 크기를 차지하기 때문에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폰트가 개발된다면 사용자들의 중복된 폰트로 인한 메모리를 절약할 수 있으며 또 프로그래머 또한 폰트 부분은 신경쓰지 않고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포스트스크립트 폰트 포맷이 공개되었다고 하지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공개 되지 않아 활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현실. 아웃라인 폰트를 출력하려면 비트맵으로 전환시키는 루틴 '래스터라이저(rasterizer)'가 공개돼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누구나 서체를 그릴 수는 있어도 프로그램에 이를 포팅해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신명컴퓨터는 폰트를 구입할 경우에 한해 시스템에 포팅 작업을 지원해주고 있다.
폰트 개발을 막는 중요한 요인은 소프트웨어보다 더욱 심각한 불법복제에 있다. 현재 서체는 법적으로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유사한 모양을 가진 서체가 난립하고 있으며 저작자 또한 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각 업체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서체 제작도구나 폰트 데이터를 프로그램 보호법에 적용시켜 등록해 놓고 있긴 하다. 외국의 경우처럼 폰트 이름을 상표로 등록해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없게 하기도 한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불법복제 및 도용으로 피해를 입었듯 서체 개발자들 또한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조기에 법적인 규제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인터뷰 윤디자인 연구소 소장 윤영기
"소프트웨어보다 더 심각한 폰트 불법 복제"
"폰트는 하드웨어를 파는데 끼워주는 물건이 아닙니다"
컴퓨터 분야에서 소프트웨어의 존재를 언급할 때 늘상 듣게 되는 말이다. 윤체 개발자로 널리 알려진 윤영기씨는 최근 폰트의 불법복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몸소 체험한 후 보호받을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모 업체에서 개발 판매하고 있는 폰트가 '윤체'와 유사하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일본에서 들여온 수동사식기의 글자를 스캐닝해서 폰트를 만들다 보니 저작자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또 하드웨어 구입자에게 한글 사용을 위해 폰트를 심어주었기 때문에 당연히 하드웨어에 끼워져 나오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폰트의 모방 및 불법복제는 소프트웨어의 경우보다 더욱 심각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폰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 위해 비록 패소할지라도 법적 투쟁을 계획중입니다."
자신의 성을 따 이름 붙인 이 폰트는 훈민정음이나 용비어천가에서 볼 수 있는 한글의 기본 요소인 네모, 세모, 동그라미를 응용해서 만들었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는 가장 단순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능적인 미와 조형적인 미감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윤체는 컴퓨터 한글 코드 2천3백50자중 기초 모듈 3백50자를 바탕으로 나머지 글자를 조합하되 글자 한 자 한 자를 온자 개념으로 보고 초성 중성 종성의 크기 및 위치를 글씨의 환경에 맞게 변형시켜 가독성과 미적 가치가 병행되도록 한다는 원칙아래 개발됐다고 한다.
가는체 라이트 미디움 볼드를 패밀리로(굵기 모음)로 하는 윤체 외에 윤영기씨는 지난해 참명조 솔잎체 아이리스체 등 신서체를 개발했으며 대전 세계박람회 조직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전용 서체를 제작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하였다.
윤영기씨는 컴퓨터를 사용해 서체를 제작하면서 수작업을 하던 때보다 훨씬 편리해지기는 했으나 컴퓨터 작업이 풍기는 딱딱한 느낌을 보완하여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느낌을 갖도록 디자인에 최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글자는 조합할 때마다 나오는 결과물이 다르기 때문에 특별한 법칙을 세울 수가 없다"는 그는 한 글자 한 글자가 예쁘다고 해서 좋은 서체가 아니라 무수한 순열 조합 속에서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가 성숙되기 위해서는 수단이 되는 서체가 고급화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는 그는 또 "이제 폰트는 하드웨어 개발업체가 아닌 전문서체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져야 하며, IBM PC나 매킨토시 등 기종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는 공통적인 폰트가 만들어진 후 질(質)로서 승부를 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