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 제28차 세계유산위원회는 북한과 중국에 있는 고구려의 유산을 각각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고구려 문화의 우수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많다. 고구려 유산의 대부분이 오늘날 중국에 있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북한 내 고구려 유적은 왕이나 귀족의 묘인 ‘고분’ 인 반면, 중국 내 고구려 유산은 옛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을 비롯해 왕릉, 광개토대왕비 등으로 다양하고 규모가 큰 것들이다. 외국인들이 중국 내 고구려 유산을 찾는다면 필시 중국의 역사로 오해할 게 뻔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중국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 본색을 드러냈다. 고구려가 한민족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네 지방정권이었다며 고구려 역사 ‘빼앗기’ 에 나선 것이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광개토대왕을 찾아가 확인서라도 한장 받아오고 싶은 심정이다.
고분 1백3기 중 24기에 별그림이 잔뜩
다행히도 고구려의 유산에는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이 아니라 독자적인 나라임을 보여주는 흔적이 남아있다. 그 중 하나가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하늘세계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고천문학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다. 4-7세기 동안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벽화 1백3기 가운데 24기에 별그림이 있을 정도다. 이 별그림을 통해 고구려만의 독자적인 천문체계를 엿볼 수 있다. 지난 10여년 가까이 고구려 고분벽화의 별그림을 연구해온 고구려연구재단의 김일권 박사는 “고구려의 천문 고분벽화는 같은 시기 중국의 것보다 수적으로도 비교가 안될 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월등히 우수하다”고 말한다.
무덤 속 벽화의 별그림은 고구려가 처음이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에 중국의 전한시대에 천문벽화가 최초로 등장했고 이후 후한대로 이어졌다. 고구려가 동아시아 문명발생지인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중국보다 더 번성했다. 4-7세기의 고구려 천문벽화가 24기인 반면, 당시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에는 9기일뿐이다. 이후 수·당(7-10세기) 시기에도 천문벽화는 7기만이 남아있다. 고분의 천문벽화가 발생지인 중국에서는 오히려 쇠퇴하고 말았지만 고구려에서는 활짝 꽃을 피웠던 셈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천문벽화에는 어떤 것들이 그려져 있을까? 김 박사는 평안남도 남포시 덕흥리고분을 가장 대표적인 천문벽화로 소개했다. 이곳의 천문벽화가 시대적으로 앞설 뿐 아니라 내용도 매우 다채롭기 때문이다.
덕흥리고분의 주인은 왕이 아니다. 무덤에는 유주자사라는 벼슬을 지낸 진이라는 사람의 것으로 영락 18년(408년)에 숨졌다는 기록이 있다. 유주는 랴오둥, 즉 요동지방이며, 자사는 지방장관으로 오늘날의 도지사쯤 된다. 또 영락은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 연호다. 따라서 진이란 사람은 화려했던 광개토대왕 시절에 활약한 요동의 지방장관인 것이다. 덕흥리고분은 연대가 확실한 몇 안되는 고구려의 고분 중 하나여서 사료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
고분에 들어가자마자 만나는 첫번째 방(전실) 벽면에 무덤의 주인, 진이 13군 태수로부터 인사를 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 방에서 시선을 올려 사방의 벽을 훑어보자. 바로 우리가 보고자 하는 다채로운 별그림이 그곳에 있다.
동쪽과 서쪽 벽면에 각각 해와 달이 있다. 동쪽 벽에 세발 가진 까마귀(삼족오)가 그려진 해가, 그리고 서쪽 벽에는 두꺼비가 살고 있는 달이 떠있다. 해와 달에 사는 삼족오와 두꺼비는 중국 고대신화에서 비롯됐다. 이외에도 동쪽에는 역V자 모양의 케페우스 별자리가 있고, 서쪽에는 W자로 유명한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왕관자리가 있다.
북쪽 벽면에는 북두칠성과 큰곰자리에 속하는 삼태육성이 있다. 남쪽에는 궁수자리인 남두육성, 심방육성, 그리고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직녀성과 견우성이 있다. 이와 함께 사방에는 고대인이 볼 수 있었던 5행성, 즉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일 것으로 추정되는 별을 포함해 총 59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 별자리는 카시오페이아
그러나 언뜻 보기에 덕흥리고분 천문벽화는 고구려다운 게 과연 뭔가 싶을 정도로 평범해 보인다. 제대로 보려면 이제 우리는 광개토대왕이 살던 시대의 눈높이를 가져야 한다. 이 가운데에서 무엇이 고구려만의 독창적인 천문학을 보여주는 것일까.
김 박사는 가장 먼저 동쪽과 서쪽에 있는 케페우스와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를 가리킨다. “이 두 별자리는 고대 중국의 천문자료에는 없는 별자리입니다. 카시오페이아의 경우 중국에서는 3개의 별자리로 분리해 인식해왔기 때문이죠. 근대 서양천문도가 도입되기 이전까지는 중국에는 이 별자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고구려가 중국 전통의 별자리와는 다른 천문학 기반을 갖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김 박사는 덕흥리고분에 나타난 카시오페이아 별자리가 선사시대에 이뤄진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천문관측에서 전래한 것임을 실제로 확인했다. 삼국시대 이전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북 영일군 신흥리의 오줌바위에 카시오페이아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카시오페이아는 선대 한민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별자리로, 고구려가 한민족의 나라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덕흥리고분을 비롯해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별그림이 단순한 별이 아니라 별‘자리’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두칠성을 비롯해 별자리를 이루는 별들 간에 연결선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별을 그린 게 아니라 별자리를 그린 게 분명한 것이다.
근대에 와서 서양의 별자리 개념이 도입되기 전까지 동서양 간에 공통되는 연결선과 모양을 지닌 별자리는 북두칠성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별자리는 각기 나름대로 하늘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분명하게 나타내주는 자료가 된다.
그런데 고구려와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는 별 간의 연결선이 잘 나타나는 천문벽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의 고분에서는 별이 벽화에 골고루 퍼져있어 특정한 별자리를 판독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당시 중국의 고분벽화에서는 별 그림이 일종의 장식으로 이용됐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김 박사는 말한다. 하지만 고구려의 고분벽화 속 별자리는 고구려가 독자적으로 천문을 관측했다는 점을 반영해주고 있다. 고구려인이 중국인과 달리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를 기준으로 밤하늘을 탐색했던 것이다.
덕흥리고분의 천문벽화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 북벽의 북두칠성을 자세히 바라보자. 별 하나하나를 자세히 관찰하면 둥근 원으로 그려진 별의 크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개 가운데 4번째 별이 가장 작게 그려져 있는데, 이 별은 다른 별에 비해 보기에 실제로 가장 어둡다. 바로 별의 겉보기 등급까지 묘사한 것이다. 중국의 경우 같은 별자리는 모두 균일하게 그리는 것과 다른 면이다.
고구려 천문학의 이같은 특징은 훗날 조선시대에까지 계승됐다. 별그림은 고대국가가 끝나는 수·당시대 이후 무덤을 나와 돌판으로 자리를 옮겨 하늘 전체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이를 석각천문시대라고 하는데 이때도 중국과 우리나라는 고구려 덕흥리고분에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별 그림에서 차이를 보인다. 즉 중국 송나라 때의 소주석각천문도에 나오는 별은 크기가 같은 반면 조선시대 천상열차분열지도에는 별에 등급이 도입돼 크기가 다르게 표현돼 있는 것이다.
천상열차분열지도가 고구려 천문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는 이미 밝혀졌다. 천상열차분열지도는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제작됐는데, 제작유래에 대한 문구에 고구려 천문도를 원본으로 삼아 만든 것이라고 설명돼 있다. 실제로 과연 그런지는 고등과학원의 박창범 교수가 1995년에 이미 밝혀냈다. 그의 연구에서 천상열차분열지도에 그려진 별은 서기 1세기경인 고구려 초의 것이며, 관측 지점은 위도 39-40°로 고구려 통치권인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조선시대에 고구려 천문학의 계승은 고구려가 한민족의 역사임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방위 따라 별자리 묘사
한편 덕흥리고분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은 고구려만의 천문표기양식이다. 덕흥리고분의 천문벽화에는 바로 고구려의 전형적인 천문표기양식의 초기형태가 보인다. 고구려인들은 무덤 안에 별자리를 그릴 때도 실제 별자리가 있는 방위를 감안했다. 그래서 무덤의 북쪽 벽에는 북두칠성, 남에는 남두육성, 동에는 심방육성(전갈자리), 서에는 삼벌육성(오리온자리), 중앙에는 북극삼성(작은곰자리)을 그려 넣었다. 이런 형식은 중국 벽화천문에는 보이지 않고 고구려 천문에만 나타난다. 김 박사는 이같은 독특한 별자리 체계를 사신도를 본따 ‘사숙도’ (四宿圖)라고 이름 붙였다.
이같은 사(오)방위별자리 형식은 덕흥리고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한 씨름무덤과 춤무덤(5세기 추정)에 전형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집안현은 평양 이전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고구려의 방위천문체계는 시대가 흐르면서 점점 발전해 각 방위에 따라 해와 달은 물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인 사신도까지 체계화돼 나타났다. 김 박사는 “후기 고구려 고분변화에는 사방위별자리와 더불어 일월상, 사신도가 함께 그려져 삼중 천문표지 체계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별자리는 천문관측의 기록일 뿐 아니라 정신세계, 즉 세계관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김 박사는 고구려인의 정신세계를 대표하는 별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북두칠성이 바로 그것. 북두칠성은 고구려 고군벽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별자리다. 24기 별자리고분 가운데에서 총 21번 발견될 정도로 많이 그려졌다.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장천1호분에는 북두칠성이 3개나 그려져 있기도 하다. 북두칠성은 고구려인이 가장 사랑한 별자리인 셈이다.
고구려인의 북두칠성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중국과는 다른 점이다. 고대 중국의 천문체계에서는 북극을 우주의 중심으로 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북극성이 매우 강조돼 있다. 전한시대에는 북극성을 태일신(太一神)으로 삼아 주된 제천의례의 대상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모든 별을 북극성을 중심으로 체계화하는 방식으로 발전시켜갔다.
물론 고구려 벽화고분에도 북극성이 여러 곳에서 확인됐다. 한국 고대인의 천문세계가 중국과 공통된 기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인은 북극성보다 북두칠성을 더 강조했다. 한국과 중국의 천문우주관이 이처럼 다르다는 것은 고대 한국인의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렇다면 고구려인은 왜 북두칠성을 그토록 사랑한 것일까.
김 박사는 “불교나 도교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장천1호분에 묘사된 3개의 북두칠성 가운데 하나는 앞칸 안쪽 천장부분에 묘사돼 있다. 일명 칠성단이라 불리는 단상에 수염을 기르고 상투를 튼 인물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 단상의 중앙 상단에 원형 안에 북두칠성으로 보이는 7개의 점이 찍혀있다. 이 단의 좌우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이를 지키고 있고 그 오른편에는 절하는 남녀가 묘사돼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어떤 종교적 기원을 표현하는 장면일 것이라고 김 박사는 풀이한다. 만약 이 장면이 예불하는 모습이라면 불교 사찰에서 전해지는 칠성각 신앙의 원형일 것으로 김 박사는 추정한다.
절에 가면 불상 외에도 신선그림이 모셔져 있는 곳이 있다. 그 중에서 칠성신을 모신 곳이 칠성각이다. 칠성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어왔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된 것이다. 장천1호분의 북두칠성과 그 아랫그림을 통해 고구려인의 칠성에 대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인의 북두칠성에 대한 사랑은 남두육성으로 번졌다. 남두육성은 북쪽 하늘에 걸린 큰 국자를 축소한 것처럼 은하수에 반쯤 잠긴 국자 모양을 띤다고 해서 남쪽의 국자 별자리란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별자리는 고대 중국인에게는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반면 고구려 고분에서는 남두육성이 10기의 고분에 나타난다.
김 박사는 가장 고구려다운 별자리를 꼽으라고 한다면 남두육성을 지목하겠다고 할 정도로 이 별자리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남두육성에 반해 그는 e메일 주소를 ‘namdukim’ 으로 만들었다.
생사 주관하는 남두육성과 북두칠성
남두육성은 항상 북두칠성과 함께 나타난다. 또한 늘 북두칠성과 대칭이 되는 형태로 그려졌다. 북방에 북두칠성이 남방에 좌우반전된 것처럼 묘사된 것이다. 이를 통해 김 박사는 고구려인의 우주관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남두와 북두의 대칭적인 출현은 도교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경 중국 동진의 역사를 편찬한 소설집인 ‘수신기’ 에 “南斗注生 北斗注死”(남두주생 북두주사)라고 하여 이승의 수명연장은 남두육성이, 주관한다는 사후세계는 북두칠성이 대칭적인 생사 관념이 기록돼 있다. 고구려의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은 바로 도교의 천문우주론적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을 통해 생사의 두 세계에서 영원한 삶이 지속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고구려의 북두와 남두의 대칭적 우주관은 중국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덕흥리고분보다 1백60년 정도 뒤 북제시대에 만들어진 중국 산동 제남지역의 도귀라는 사람의 묘에서도 발견된 것이다.
이처럼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독자적인 우주관을 가진 고구려인은 별자리 신앙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인들은 농경을 주관하는 상서로운 별자리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동위편에는 주거지의 좌우에 큰 집을 짓고 귀신을 제사하는 전통이 있으며 또한 성스러운 별의 신(靈星)과 토지 신, 그리고 곡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고구려인들이 우주와 얼마나 친근한 삶을 살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김 박사는 8월 중순 중국의 지안시를 다녀왔다. 그때 그곳에서 별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을 보면서, 문득 자신이 고구려로 시간여행을 간 듯했다고 한다.
고분벽화 속 하늘세계와의 만남으로 멀게만 느껴지던 고구려인과 좀더 친숙해진 듯하다. 고구려를 중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구려 별자리고분 유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