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칵. 찰칵.
기자가 칭화대를 찾은 지난 7월 13일은 마침 졸업식이 있는 날이라 캠퍼스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내륙성 기후를 보이는 북경의 여름은 무덥기로 유명하다. 이날 역시 강렬한 햇빛이 하루 종일 내리쬐어 기자는 캠퍼스를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졸업생들은 이런 더위도 아랑곳없이 삼삼오오 어울려 다니며 추억을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의화단운동에 대한 배상금의 일부를 재원으로 1911년 미국유학생 양성기관으로 문을 연 칭화대(淸華大)는 개교 1백주년에 가까운 유서 깊은 대학이다. 그런데 최근 칭화대가 우리나라에서까지 유명세를 타고 있다. 사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3국은 각국의 수도를 이름으로 한 국립대학들이 그 나라를 대표했다.
한국의 서울대, 일본의 도쿄대, 중국의 베이징대가 그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공식이 깨지고 있고 그 대표적인 예가 중국이다.
지난 2002년 칭화대는 처음으로 중국대학평가에서 베이징대를 눌렀다. 특히 지난해 장쩌민 주석이 물러나고 후진타오 체제가 시작되자 칭화대의 명성이 급부상했다. 국가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우방궈(吳邦國), 정치국원 겸 상무부총리인 황쥐(黃菊) 등 주요 권력자의 상당수가 칭화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칭화대 출신의 인맥을 칭화방(淸華幇)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칭화대의 무엇이 이런 유명세를 가져왔을까.
중국의 근·현대사를 담은 캠퍼스
칭화대 캠퍼스는 사방 2km의 거의 정4각형으로 면적이 4㎢(약 1백10만평)에 이른다. 따라서 자전거 없이는 대학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다. 중국을 상징하는 자전거 물결이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닌 셈이다.
칭화대에는 현재 학부생 1만4천여명과 대학원생 1만2천여명 등 모두 2만6천여명의 학생과 2천여명의 교수를 포함해 7천여명의 교직원이 있다. 학생의 80% 정도가 이공계 전공이다. 학생들은 거의 전부 기숙사생활을 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교직원의 대부분이 캠퍼스내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칭화대 캠퍼스의 상주 인원은 5만여명으로 하나의 작은 도시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실제 이곳에는 ‘화장터’ 를 빼고는 없는 게 없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1957년 리정다오(李政道)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양전닝(楊振寧)은 아버지가 칭화대 수학교수였는데 어린 시절을 보낸 칭화대 캠퍼스의 평화롭고 학구적인 분위기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양전닝과 리정다오는 1937년 일본의 침공으로 쿤밍(昆明)으로 피신한 칭화대와 베이징대 등이 합친 시난(西南)연합대를 다녔다. 칭화대는 이들을 본교출신으로 간주하고 있다.
칭화대의 캠퍼스의 분위기는 구획에 따라 많이 다르다. 서쪽의 교문을 통해 들어가면 오른쪽에 교직원용 아파트촌이 자리잡고 있다. 1980년대 우리나라 주공아파트촌이 연상된다. 그러나 왼쪽으로 길을 들어서면 연꽃이 피어있는 호수와 정자가 한가롭게 펼쳐져 있다. 칭화대 캠퍼스는 원래 ‘칭화유안’ (淸華園)이라는 청나라 황실의 정원이었다고 한다. 호수 한쪽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노인도 보인다. ‘여기 대학 맞어?’ 이런 의문을 품은 채 기자는 캠퍼스 중앙으로 향했다.
한참을 걷자 전형적인 대학 캠퍼스 풍경이 나타난다. 건물은 주로 1950, 60년대 당시 밀월관계이던 소련의 지원으로 지은 러시아 건축 양식으로, 장대하면서도 격조가 있다. 1991년 증축한 도서관은 기존의 러시아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전자도서관으로 손색이 없게 설계됐다고 한다. 현재 건축면적 39만㎡에 약 4백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역시 장대한 러시아 스타일의 대학 본관에 이르러 남쪽을 바라보니 널찍한 길이 펼쳐져 있다. 그 좌우로 현대식 건물들이 쭉 늘어서 있고 저 멀리 신축빌딩이 올라가고 있다. 이곳은 1980년대 이후 건설된 남동쪽 캠퍼스로 마치 최첨단 도시를 보는 듯하다. 길 가운데 높이 솟아있는 깃대에서 펄럭이는 오성홍기가 인상적이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기업이나 개인의 기부를 받아 지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친구들과 졸업사진을 찍던 키안준(錢駿)씨의 설명이다. 이번에 재료과학·공학과를 졸업하는 키안씨는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라고.
“물론 칭화대가 아직 세계 최고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시아에선 리더가 아닐까요?”
석사를 마치고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공부할 예정이라는 그의 얼굴 표정에는 모교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키안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배경으로 삼아 사진을 찍는 비석을 보니 ‘淸華大學’ 이라는 한자가 써 있다. 비석 뒷면에는 칭화대의 교훈인 ‘자강불식 후덕재물’ (自强不息 厚德載物)이라는 한자 8글자가 새겨져 있다. ‘스스로 끊임없이 강하게 만들고, 덕을 쌓은 위에 물질적인 발달을 꾀한다’ 는 뜻으로 과학기술교육에 앞서 인격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라고 한다.
천재들의 경연장
남한 면적의 1백배인 중국땅에는 남한 인구의 약 27배인 13억명이 살고 있다. 이런 나라의 최고 명문인 칭화대의 입학정원은 고작 3천명. 따라서 칭화대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때 전교수석은 물론 해당 도시나 지역에서 1, 2 등을 다툰 영재들이다. 현재 칭화대는 전국에서 골고루 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해 지역 할당제를 시행하고 있다. 중국 동부에 위치한 장쑤성(江蘇省)의 경우 지난해 13개 시의 수석 졸업자 중 11명이 칭화대에, 2명이 베이징대에 입학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적어도 학생자질은 칭화대가 세계 최고라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입학하자마자 치열한 경쟁속에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고 있다.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과제를 해결하자면 대학생활의 낭만을 찾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원래 칭화대는 공부를 많이 시키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고향집에는 1년에 두차례 방학 때 잠깐 찾아보는 정도지요.”
양쯔강 유역인 후난성(湖南省)에서 왔다는 멩롱(孟龍)씨의 말이다. 이번에 전자공학과 석사과정을 마치는 멩롱씨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전 일본 회사 소니에 취직했어요. 중국 지사가 아니라 일본 도쿄입니다. 아직 3달이 남았는데 그동안 일본어를 마스터할 생각입니다.”
졸업 후 진로를 묻자 멩롱씨는 기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소니의 경우 2001년부터 칭화대에서 학생들을 뽑아가고 있는데 현재 상당수가 일본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멩롱씨가 일본 회사를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서’ 라고.
칭화대에는 현재 2백여명의 한국 유학생이 있는데 어학연수생까지 포함하면 5백여명에 이른다. 외국인 기숙사는 방학기간이라 한가했다. 이 학교 외국어과 2학년인 정현석씨는 “외국학생들은 입학이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지만 중국 학생들을 따라잡기가 어렵다”며 “특히 이공계의 경우 외국학생이 4년 만에 졸업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했다. 중국 학생들은 두뇌가 뛰어난데다 워낙 공부벌레들이라 언어장벽까지 있는 외국학생이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다.
칭화대 졸업생들은 중국 각지의 대학과 연구소, 기업에 취직해 중국의 과학기술을 이끌고 있다. 중국과학원의 경우 연구 인력의 70%가 칭화대 출신이다. 지난해 10월 세계에서 3번째로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5호 발사에 성공한 것을 비롯해 2002년 벼게놈 지도를 작성하는 등 최근 첨단과학기술분야에서 중국이 두각을 나타내는 배경에는 이들이 있다.
대규모 산학협동단지 조성
캠퍼스 남동쪽 끝은 현재 대규모 공사가 한창이다. 내년 완공을 목표로 칭화과기원(Tsinghua Science Park)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미 절반 정도의 건물은 완성됐고 3백여 기업이 입주해있다고 한다. 1993년 구상된 칭화과기원은 국제적인 산학협동의 결정체로 자리잡고 있다. 인재양성이라는 대학의 기본 역할을 뛰어넘어 전세계 최첨단 기술을 칭화대로 결집시키겠다는 원대한 계획이다.
대학측은 아이디어와 땅만 제공할 뿐 놀랍게도 모든 재원은 기업이 대고 있다. 과기원 두펭(杜朋) 국장은 “싱가포르를 비롯해 전세계 10여개 나라의 기업들이 50억위안(약 7천억원)을 투자했다”며 “기업들은 이곳에서 대학의 최고급 인재들과 함께 연구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P&G와 NEC 등 세계 5백대 기업들도 속속 입주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칭화대는 수년 전부터 우리나라의 KAIST와 친밀한 협조관계를 맺고 있다. 연구개발 시스템이 좀더 잘 갖춰진 KAIST로부터 그 노하우를 배우기 위한 것. 특히 벤처 기업들을 양성하고 기술개발을 돕는 산학협동에 관심이 높다. 지난 7월 12일부터 14일까지 북경에서 개최된 ‘KAIST-칭화대 한중 하이테크 엑스포 2004’ 역시 칭화대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국내 벤처 55개사와 중국 벤처 30여개사가 참가한 이번 전시회는 대학이 양국 기업의 기술 교류와 투자 유치의 기회를 마련한 행사다. 올해 두번째로 지난해 ‘엑스포 2003’에서는 총 1백70억원의 상담이 성사된 바 있다.
칭화대 국제기술이전센터 진퀸시안 박사는 “칭화대는 외국의 여러 대학들과 교류하고 있지만 KAIST와의 관계는 예외적인 경우”라면서 “KAIST는 우수한 교수진과 학생들이 포진한 아시아 최고의 이공계대학으로 우리대학과 비슷한 면이 많고 지리적·정서적으로도 가까워 앞으로 공동관심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중요한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이번 행사에는 양교의 기계공학과와 전자전산학과가 학술세미나를 갖기도 했다. 양교의 협정에 따라 올 가을학기부터 1년간 칭화대에 교환학생으로 있게 될 KAIST 전자전산학과 박사과정의 최성대씨는 “이곳 학생들을 만나본 결과 똑똑한 건 사실이지만 두려워할 정도는 아니다”라며 “처음이라서 어깨가 무겁지만 1년간 열심히 연구해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칭화대 전자공학과 교수들과 학생들은 세미나를 위해 칭화대를 찾은 KAIST 전자전산학과 교수들과 학생들을 반갑게 맞았다. 실험실과 주변 캠퍼스를 돌아본 뒤 교내 식당에서 가진 점심시간에는 양국 교수와 학생들이 서로 붙잡고 대화에 여념이 없었다.
바야흐로 칭화대는 자신의 발전을 위해 교류의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학교를 둘러본 기자의 뇌리에는 개교 1백 주년인 2011년에는 칭화대가 세계 일류대로 우뚝 설 것이라는 이들의 꿈이 실현되리라는 예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칭화대 과연원 가오첼리 부원장
칭화대가 이공계 명문으로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한 조직이 우리나라 대학의 연구개발처에 해당하는 과연원(科硏院, Office of Scientific R&D)이다. 1956년 설립된 과연원은 칭화대의 연구개발 관련업무는 물론 기업, 지방 정부, 외국기관 등과의 공동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 과연원 부원장인 가오첼리 교수를 만났다.
문 칭화대의 연구수준은 국제적으로 어떻게 평가되고 있나?
답 : 지난해 칭화대는 8천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중 2천여편이 국제과학기술논문색인(SCI)에 올랐다. 교수 1인당 1편의 SCI 논문을 낸 셈이다. 5년 전인 1998년 발표된 6천여편의 논문 중 4백24편만이 SCI에 등재된 것과 비교해보면 연구의 질이 얼마큼 향상됐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5년 뒤에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문 이렇게 급속한 향상을 가능케 한 비결이라도 있나?
답 : 먼저 우리대학의 학생 수준은 세계 최고다. 중국 각지에서 뽑힌 인재들이 모여 공부에 매진하기 때문이다. 교수진의 수준도 계속 나아지고 있다. 외국에서 공부한 해당분야 최고 실력자들을 모셔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SCI에 논문이 오르면 특별 연구비가 지급되고 해외학회 참가경비도 지원하는 등 정책적인 뒷받침도 있다. 연구 환경은 보다시피 최첨단 시설을 갖춘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문 칭화대는 기업뿐 아니라 지방 정부와도 협력이 활발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이 이런 역할까지 해야하나?
답 : 물론이다. 중국에서는 대학이 연구개발의 중심지로 그 결과를 전국 각지의 연구소와 기업에 전파할 의무가 있다. 칭화대의 경우 많은 기업과 협력하고 있으며 전국 60여개 시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 학생들은 졸업 후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 과학기술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문 한국은 수년 전부터 고교생들의 이공계 기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중국의 경우는 어떤가?
답 : 아직까지는 그런 조짐이 없다. 이곳에서 피부로 느꼈겠지만 중국사회는 과학과 기술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따라서 뛰어난 학생들 대부분이 이공계를 택한다. 다만 인기 분야는 있는데 IT와 BT가 그것이다. 물론 순수과학 분야도 여전히 인재들이 선택하고 있다.
의화단(義和團)운동
청나라 말기인 1900년 서구열강에 대항한 중국의 농민투쟁. 수구파인 서태후는 이에 편승해 열강에 선전포고까지 했으나 영국, 미국 등 8개국 연합군에 패해 이듬해 베이징의정서에 서명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미국은 자국 몫을 칭화대 건립 기금으로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