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2일 프랑스 중부 도시 르망. 뜨겁게 작렬하는 햇빛 아래 형형색색 미끈한 몸매를 뽐내는 50여대의 경주 차량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거친 엔진음을 내며 숨고르기 하는 것도 잠시,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일제히 트랙 위로 쏟아져 나간다. 평균시속 2백20km, 24시간을 꼬박 달리는 무한 질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경기 시작 불과 1시간여. 벌써부터 경기에 ‘지친’ 차량들이 트랙 한편에 마련된 정비창으로 몰려든다. 펑크 난 타이어에서 과열로 벌겋게 달아오른 엔진까지, 못쓰게 돼버린 부품을 교체하려는 차량들로 정비창은 금새 북새통이 됐다.
유독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차량 2대. 선명하게 새겨진 ESA(유럽우주기구)마크를 단 페스카를로 스포츠 소속의 푸조C60였다. 197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카레이서 앙리 페스카를로가 이끄는 팀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ESA의 지원을 받아 경기에 참가했다. 페스카를로 팀이 올해 배정받은 엔트리 넘버는 17번과 18번.
앞서거니 뒤서거니 숨막히는 24시간의 각축 끝에 페스카를로 팀이 거둔 성적은 4위. 비록 차량 1대를 잃었지만 지난해보다 4단계 오른 성적이었다.
팀의 기술고문인 앙드레 코르당제는 “이렇게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된 것은 드라이버의 숙련된 실력 덕도 있지만 ESA에서 이전받은 기술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이번 경주에 참가한 팀의 주력 차량인 ‘페스카를로 주드’ ESA로부터 이전받은 기술로 제작됐다. 6백마력을 힘을 내는 10기통 주드(Judd) 엔진에 경량화된 소재, 더욱 강화된 방열장치는 ESA가 제작한 아리안 로켓과 인공위성 제작에 사용된 기술이다.
자동차에 들어간 우주기술
2002년부터 페스카를로 감독과 그의 고문인 코르탕제는 ESA와 공동으로 차량에 우주기술을 적용하는 실험을 계속해왔다. 오래전부터 두사람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차량을 좀더 가볍고 안전하며 빨리 달리게 만드느냐에 집중돼 있었다. 때마침 우주기술의 민간 이전에 관심이 컸던 ESA로부터 기술 이전 제의를 받았던 것. 프랑스 베르텡테크놀로지사와 이탈리아 그라도제로에스파체사도 이 실험에 함께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페스카를로팀은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차량을 2년째 ‘르망 24시간 지속 레이스’ 에 선보여 왔다. 24시간 지속 레이스란 시속 2백-3백km 속력으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달리는 자동차 경주로 르망 레이스는 그 중 세계 최정상급으로 통한다.
페스카를로 소속의 푸조C60은 지난 5월 개막한 올 시리즈의 시즌 초기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이번 레이스에는 지난해 보다 한층 개량된 ‘페스카를로 주드’ 모델이 참가했다.
특히 주목을 끄는 부분이 개량된 엔진. 3.2리터 6기통 트윈 터보엔진을 대폭 개량한 5리터 10기통 주드 엔진이 새로 채택됐다. 이 엔진에는 민첩한 기동력에 내구성까지 갖춘 첨단 설계와 복합 소재가 사용됐다. 이밖에 공기역학적인 측면을 좀더 고려한 차체 디자인과 줄어든 차량 무게, 한층 개량된 과열 방지기술도 이목을 끌었다.
피에르 브레송 ESA 기술이전 진흥국장은 “차세대 차량 제작에 가장 빨리 적용할 수 있는 첨단기술 중 비교적 앞선 분야가 바로 우주기술”이라면서 “페스카를로처럼 실험적인 레이싱팀과의 협력은 필수”라고 강조했다.
이보다 앞서 페스카를로팀은 지난해 2차례의 FIA스포츠카 챔피온십 우승에 이어 르망 레이스에서도 50여 출전차량 중 8, 9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수십년간 개선을 거듭해온 기존 모델과의 경합에서 실험 차량이 거두기엔 힘든 성적이었다.
르망 엔듀런스와 파리-다카르 랠리
ESA와 페스카를로팀이 24시간 레이스를 고집하는 것은 왜일까. 차량에 적용된 기술은 영하 수백-영상 수백℃를 넘나드는 우주 환경에 맞게끔 개발된 것이다. 그와 같은 극한 상황을 버텨낼 기술을 시험하기 위해 그와 비슷한 환경을 실험실에 꾸며야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실험실도 어디까지 인공적인 환경일 뿐, 예상외의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많다. 과학자들은 좀더 실제에 가까운 환경을 찾아 실험실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죽음의 랠리’‘무한의 질주’ 로 통하는 파리-다카르 랠리와 르망 24시간 지속 레이스야 말로 그에 맞는 최적의 조건인 셈이다.
프랑스 모험가 티에르 사빈(1986년 코스 답사 중 사망)이 착안한 파리-다카르 랠리는 올해로 26회째를 맞았다. 한낮에 40℃를 훌쩍 넘어서는 불모의 땅 사막을, 그것도 무려 1만여km나 가로지르는 이 랠리는 그야말로 ‘최악의 경주’ 로 통한다. 평균 완주율 30-40%에 매년 몇명씩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악명 높지만 최고의 모험코스와 최상급 기술 경연장으로 평가받는다.
1906년부터 해마다 유럽 곳곳에서 열리는 르망 레이스 역시 더없이 좋은 실험장으로 불린다. 말 그대로 24시간을 꼬박 달리는 경기라 내구성과 안전성, 기동성을 시험하는 데는 최상의 조건을 갖췄다. 1천km 코스의 순간 최고시속은 3백km, 평균시속만도 2백km에 육박하는 아찔한 경주가 펼쳐진다.
르망 지속 레이스 역시 파리-다카르 랠리처럼 주요 메이커들에게는 지난 1년간의 다져온 기술력을 평가받는 숨막히는 경연장이긴 마찬가지. 1953년 처음 개발된 디스크브레이크도 바로 르망 레이스를 통해 데뷔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처럼 ‘악명 높은 모터 랠리’ 들이 자동차 제작사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 경쟁에서 미국과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ESA소속 과학자들에게도 ‘최고의 실험장’ 인 셈이다.
좀더 가볍고 안전하게
ESA와 페스카를로팀의 첫 인연은 지난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로부터 2년. 2002년 첫 모델이 나온 이래 차량 성능은 해를 거듭하며 꾸준히 발전했다. 그동안 차량 무게는 크게 줄어든 반면 차체의 내구성과 안전성은 높아졌다.
여기엔 우주선이나 인공위성의 재질로만 쓰이던 탄소복합소재의 역할이 컸다. 탄소를 주요 재료로 하는 첨단 소재가 차체와 엔진 등 차량 전체 중량을 줄이는데 보탬이 됐다. 보통 1kg의 무게를 우주 궤도로 올리는데 드는 비용은 10만 유로. 우리돈 1억4천만원이 들어가는 셈이다. 그 때문에 좀더 가볍고 튼튼한 소재를 개발하려는 노력들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차량 무게의 감소는 무게 당 기동성 비율을 높여 기동력을 향상시키게 된다. 차체에 복합소재를 사용하면 차량 전체 무게 중심을 아래쪽으로 옮겨가 주행 효율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게다가 엔진까지 가벼워지면 차 전체 무게를 고르게 분산시킬 수 있어 기동성은 더욱 향상된다.
페스카를로팀은 2002년에 비해 차량 중량을 29kg이나 줄인데 이어 올해 다시 9kg을 감량했다. 특히 차량 무게가 29kg 줄어든 지난해의 경우 4km당 1초씩, 전체 13km의 코스에서 총 4.5초의 주행시간을 줄이는데 성공했다.
차량에 탑재된 보호 장치도 우주기술에서 가져왔다. 차량 안전 기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동차 메이커의 차량 제작 수준을 판단하는 주요 근거였다. 차량 엔진과 연료탱크 사이에 설치된 방열판 기술이 바로 그런 사례에 속한다. 로켓 엔진과 연료통, 인공위성 방열시스템에 쓰였던 이 기술은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화재 위협에서 차량과 운전자를 안전하게 보호한다. 특히 10-12기통에 터보 기능을 장착한 고성능 엔진을 탑재한 경주용 차량에서는 더욱 그렇다.
운전자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데도 우주기술이 사용된다. 우주선에 탑재하는 가볍고 강력한 냉각장치가 경주용 차량에 탑재되기 시작한 것. 차량 형태의 변화에 따라 냉각기술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부터 덮개가 달린 살룬형 차량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운전석의 실내 온도가 관건으로 떠올랐다. 장시간 주행에 따른 엔진 과열이 운전석 실내 온도 상승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특히 덮개가 있는 차량은 적정 수준의 실내 온도를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페스카를로팀은 이같은 문제를 우주기술로 간단히 해결했다. 몇차례 맥클라렌 포뮬러1(F1)팀에 특수 운전복을 공급했던 그라도제로에스파체사가 에어컨 기능이 달린 신형 운전복 제작을 맡았다. 레이서의 유니폼 안에 입는 이 옷은 독특한 직조기술과 우주복의 냉각 메커니즘의 산물이다.
회사 관계자는 “올해 말까지 옷의 무게를 지난해의 절반 수준으로 줄일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 공기냉각 장치와 수분 섭취 장치가 달린 신형 헬멧도 하반기 중 보급될 예정이다. 신형 헬멧은 이미 2003년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처음 사용돼 성공리에 실험을 끝낸 것으로 알려졌다.
생활에 파고든 우주기술
ESA는 미항공우주국(NASA)과 달리 민간 기술 이전에 적극적이다. ESA는 최근까지 1백60개 이상의 우주 기술을 기술이전프로그램(TTP, Technology Transfer Program)을 통해 민간에 이전했다. 놀라운 점은 이전된 기술들이 산업적인 효과뿐 아니라 사회적 파급력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우주라는 극한 환경을 겨냥해 개발된 첨단 기술이 어느새 우리 일상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 희귀 피부병 환자를 위한 자외선 차단 기술
ESA는 태양빛에 민감한 색소성 건피증 환자들을 위한 특수 자외선 차단복 제작을 지원하고 있다. 색소성 건피증은 자외선에 노출될 경우 피부노화와 각종 질병, 심지어 피부암까지 이르게 되는 희귀성 유전 질환. 대기권 밖에서의 강한 자외선을 차단하는 기술이 여기에 적용됐다.
● 선박용 전복 방지 기술
프랑스 출신 모험가인 라파엘라 르 고벨로는 자신의 윈드서핑보드에 전복방지 장치를 장착했다. 이 기술 역시 우주기술을 토대로 만든 공기주머니의 한 형태. 약 80일간 진행된 6천7백km의 서핑 항해를 안전하게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ESA가 이전한 기술 때문이었다.
● 새로운 암진단기
영국 레스터대 우주연구센터 바이오이미지연구팀과 서레이대 암연구소는 우주기술과 치아진단법을 이용해 새로운 암진단기를 개발했다. 천문연구에 사용되는 X선 관측기술에 사용되는 고체촬영소자(CCD)를 이용해 만든 이 진단기는 손에 잡기 쉽고 고해상도 진단이 가능하다.
연구팀은 크고 값비싸며 해상도도 낮은 기존의 진단장치들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 가볍고 안전한 차량 제작 기술
이번 르망 레이스나 파리-다카르 랠리에서처럼 지금보다 강하고 안전하며, 동시에 편안한 느낌을 주는 미래형 자동차를 만드는데 우주기술은 더욱더 적극 활용될 전망이다. 페스카를로팀이 제작한 자동차는 이미 2차례의 파리-다카르 랠리와 3년 연속 르망 지속 레이스에 참가해 우수한 성능을 입증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