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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인간의 꿈 기구에서 초음속 비행기까지

새처럼 날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은 다빈치와 라이트 형제를 거쳐 이제 우주로 향하고 있다.

사람이 하늘을 날고 싶었던 꿈은 아마도 사람이 지구상에서 활동했던 때부터 생겼을 지도 모른다. 원시동굴의 벽화에 그려졌던 새는 하늘을 날고 싶었던 원시인들의 꿈의 표현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리스 신화 속에는 인간이 하늘을 나는 여러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신화와 전설의 이야기

하늘을 날았다는 전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크레타 섬에 갇혀 있었던 '다이다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가 깃을 왁스로 붙여 만든 날개를 양팔에 달고서 하늘을 날아 그 섬에서 도망쳤다는 신화이다. 그리고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저버리고 태양 가까이 가자 왁스가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또 기원전 852년에 하늘을 날다가 죽었다는 영국의 '브라다드'왕의 전설이 있고, 특히 하늘을 나는 비둘기를 나무로 만들었다는 '타렌톰'의 '아르큐더스'(기원전 4세기)의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어떤 근거가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인류의 꿈을 반영한 것이라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비행의 역사에 있어서 이름을 남긴 사람은 꽤 많다. 11세기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라센 사람과 '멀므즈베리'의 '올리버', G.B.단디(1503년), J.다미안(1507년), 베스니에(1678년), 버그빌 후작(1742년), J.베르부린져(1811년)가 있다. 이러한 선구자들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잊혀진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개는 인공날개를 사용하여 높은 데서부터 날려 했거나, 아니면 활공하려 했기 때문이다.

또 실험한 사람과는 별도로 인간의 비행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했던 이 분야의 사상가로서는 13세기의 R.베이컨과 알베르토스 마그누스, 14세기의 알베르토 폰 섹슨이 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뭐라 해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 1452-1519)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

다빈치가 예술과 과학 그리고 기술 분야에서 천재적이 두뇌를 과시한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비행에 관한 분야에서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다빈치는 낙하산 헬리콥터 비행기를 고안하기 전에 오랫동안 새가 나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를테면 그는"공기를 누르는 날개의 운동이 공기가 압축될 때 공기가 도망치는 것보다 빠르지 않는 한, 공기가 날개 밑에 압축되지 않으므로 새는 공중에 떠 있지 못하게 된다.… 새의 날개 끝은 반드시 유연성이 풍부해야 한다.…응축되거나 때로는 희박하게 되는 것이 공기의 특성이다.… 공기 속에서 새의 날개와 꼬리가 하는 역할은 마치 물속에서 수영할 때 손발의 역할과 같다.… 새가 방향을 바꾸려고 생각할때는 한 쪽 날개만 움직여 주고 다른 한 쪽 날개는 정지시킨다. 동시에 새는 꼬리 날개를 조정한다.… 공기중에서의 새의 운동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람에 관한 지식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람의 지식은 불의 운동 그 자체에 의해서 논증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실증적인 과학이야말로 공중에서 나는 물체의 인식에 도달하는 첫 단계이다.… 물 속 에서의 수영은 인간에게 어떻게 새가 공중을 나는가를 가르쳐 준다. 수영을 논하라. 그러면 공중에서 새가 나는 것을 알게 된다"는 등 새가 나는 방법에 관해서 다각적이고도 근본적인 연구를 하였다.
비행기의 역사에서 반드시 거론해야 할 사람이 또 있다. 그가 R.후크(Robert Hooke:1635~1703)이다. 그가 17세기 후반에 비행에 관한 몇 가지 실험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아쉽게도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기구와 비행선의 시대

'프란체스코 디 라너-디루쯔'는 1670년에 비행선을 설계하였다. 그 발상은 아르키메데스 원리에 바탕을 둔 것. 비행선은 공기보다도 가벼운 항공기의 제1호였다. '디 라너'의 생각은 진공으로 만든 4개의 공으로 비행선을 띄워 올리려는 것으로서 물론 실용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또 한 사람 '디 구스먼'이 18세기 초기에 만들었던 것은 기구(氣球) 발명의 선구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디 구스먼'도 성공은 못했지만 이후 연구의 길잡이가 되었다.

'디 구스먼'의 기구는 작은 열기식(熱氣式)으로 1709년 8월 8일에 포르투갈 왕 앞에서 기구를 뛰우는 실험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중요한 사건은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프랑스 리용 근교의 아노네에 살고있던 '몽골피에' 형제와 73년 후 사람이 탈수 있는 열기식 기구를 발명한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 형제는 1782년 11월 15일 처음으로 모형기구의 실험을 하였다.

그런데 획기적인 사건이 다음 해에 일어났다. 1783년 11월 21일, 두 프랑스 사람이 기구를 타고 최초로 자유비행을 했다. 그들은 용적 약 2천2백㎥의 열기식 기구에 타고서 상승하였다. 최대 고도는 약 9백m에 이르렀고 약 12㎞의 거리를 26분간 비행하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하늘에 올라 비행한 두 사람중 하나인 '드 로제'는 또한 처음으로 공중사고로 죽은 사람이기도 했다. 이 날이 1785년 6월 15일이었다.

한편 열기식 기구에 바로 어어서 더욱 실용적인 수소기구가 발명되었다. 이 기구의 기본구조는 지금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유명한 물리학자 C·샬(1746-1823)은 열기식 기구가 발명된 데 이어, 영국의 화학자 J.브랙(1728-99)의 생각에 바탕을 두고 수소가 열기보다도 기구를 띄워 올리는데 유리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수소기구는 열기식 기구가 비행한 10일 후 사람을 태우고 자유비행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수소기구의 탑승자 '르 샬르'는 2시간 비행으로 약 43㎞를 난 뒤 착륙하여 한 사람의 동승자를 내려놓은 다음 다시 상승하여 1시간 반 동안 비행하였다. 이때 그는 약2천7백m의 고도에 이르렀다. 이로써 기구시대가 꽃피게 되었고, 하늘을 날려던 인류의 꿈이 일단 실현되었다.

이 기구 비행으로 인류는 처음으로 실용항공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공기보다 무거운 항공기가 발명되고 실제적인 목적에 이용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1783년 처음으로 기구의 비행에 성공한 때부터 1903년 라이트 형제가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기를 이륙시켰던 결정적인 성공을 수행할 때까지의 기간은 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직접적인 연결이 없었다.

항공기의 아버지 '케리'

1850년부터 1900년에 걸친 발전과 함께 새로운 항공기를 만들려는 인류의 오랜 노력에 대한 보답은 고정 날개가 달린 비행기로 귀착되었다. 이런 형태의 비행기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실험에 돌입한 사람은 '항공의 아버지'인 'G.케리'(1733-1857)였다. 그는 바로 글라이더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케리'는 단지 그러한 비행의 가능성을 보인데 그치지 않고 1804년 연과 비슷한 한 장의 날개와 십자형의 꼬리를 가진 모형 글라이더를 조립하였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에서의 비행 실험은 성공이었다. 이것은 '케리'가 실험한 모형기의 제1호가 되었다. 모형 실험에 이어 '케리'는 1852년에 사람이 탑승한 실물크기의 글라이더를 실험하여 한 번은 어른 또 한번은 소년을 태우고 단거리를 비행하였다.

한편 독일 사람 'O.릴리엔탈'(1848-96)은 공중에서 실제로 실험을 한 위대한 선구자였다. '케리'가 19세기 초기에 처음으로 발표한 원리를 바탕으로 '릴리엔탈'은 일련의 실물크기의 행 글라이더를 만들고 비행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는 1896년에 비행사고로 죽을 때까지 1천번 이상 활공을 하였다. 만일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아마 라이트 형제 보다 먼저 동력 비행에 성공했을 지도 모른다.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호

19세기를 통하여 유럽이 장악해 왔던 항공연구의 주도권은 라이트 형제의 출현과 함께 미국으로 넘어왔다. 이들은 동력비행을 시험하기에 앞서 활공 실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1900년 1901년 1903년에 3대의 글라이더를 만들어 연구를 거듭함으로써 활공을 제어하는 문제를 이미 해결하였다. 1903년까지 그들은 최종실험을 마치고 비행기에 엔진을 실었다. 이런 형태의 글라이더는 비행기의 발달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라이트 형제의 결정적인 성공의 이야기를 하기 앞서 우리는 공기 역학의 기원을 생각하고, 또 고정날개 동력기에 대한 초기의 여러 실험에 관해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항공역학이 과학의 단계로까지 진보한 것은 유체역학의 기초가 이미 수립되었던 때문이다. 유체역학은 이미 17, 18세기에 뉴턴, 베르누이, 오일러 등에 의해서 서서히 구축되어 왔었다. 또 고정날개의 비행기에 엔진이 올려질 때까지 많은 사람의 연구와 수많은 실험이 있었다. 1799년 '케리'의 고정날개의 개념으로부터 1903년 라이트 형제의 동력비행에 의한 실제 조종의 경험까지는 무려 16단계의 연구와 실험이 있었다.

이런 연구와 실험 과정을 거쳐 1903년 12월17일 노스 캐롤라이나 주 키티호크에서 라이트 형제는 최초의 동력비행과 지속적인 조종비행에 성공하였다. 그들이 만든 1903년 형 '플라이어'호는 12마력의 가솔린 엔진을 장비하고 활주로 위로부터 이륙하여 평평한 사막 위를, 짧은 거리였지만 여러 차례 비행하였다. 그들은 다음 해에도 오하이오 주 디이튼 부근에서 실험비행을 되풀이했는데, 그중 두번은 약 5분간 날아갔다. 1905년에는 '플라이어' 3호가 여러 차례 선회비행을 했고 그중 한 번은 38분 동안 39㎞이상 비행하였다. 이로써 실용비행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비행기 그림.


최초의 공중전

이와같은 실용 비행기는 곧 전쟁에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열강국은 항공기의 군사적 잠재력이 큼을 인식하여 육군과 해군에 항공부대를 편성하였다. 이미 이탈리아-터키 전쟁(1911-12), 발칸 전쟁(1912-13)에서는 항공기가 소규모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은 항공기 발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즉 항공기는 하루 아침에 한 국가의 군사력의 핵심이 되었다. 1914년까지 전세계에서 제작된 비행기는 모두 5천여대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때에는 충분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 세계적으로 약 20만대가 설계 생산 운용되었고, 그 비행시간은 수 백만 시대에 이르렀다.

1939년 9월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항공기로 인하여 전투양식이 크게 바뀌었다. 1940년 여름 영국 공군과 독일 공군이 싸운 '영국의 전투'는 공군끼리 싸운 최초의 커다란 전투였다. 당시 독일 공군 편에서는 영국 상륙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영국 남부에의 접안과 그의 제공권이 문제였다. 독일 공군의 장기간에 걸친 폭격기 및 전투기에 의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수적으로 열세한 영국 전투 사령부의 방위로 독일 공군기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 영국을 방위한 전투기가 유명한 '허리케인'이다. 이 전투기의 당시 최고 속도는 시속 4백80~5백60㎞, 실용 상승 한도는 약 9천2백m였다.

제트 추진의 시대와 그 이후

1920년대 말엽부터 미래에 있어서의 고속항공기의 추진이 피스톤 엔진으로 한계가 있음이 예견되었다. 이 때문에 가스 터빈과 로킷의 가능성에 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영국 사람'A.A.그리피스'와 'F.호이틀'은 각기 독립적으로 1920년대 말 항공기용 가스터빈을 처음 구체적으로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최초의 제트비행기인 독일의 하인켈Hel78이 1939년 8월 27일 처음으로 비행에 성공하였다. 이어서 1941년 5월 15일 영국의 첫 제트비행기 글로스터 E28/39가 비행하였다. 이 비행기들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한정된 규모로 사용되었다. 한편 미국과 소련의 제트기 개발은 이 무렵에 시작되었지만 주로 초기의 영국과 독일의 것을 모방하는데 그쳤다.

이처럼 20세기 전반에 걸쳐 인류는 동력비행에 성공하였고, 계속해서 실용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비행기는 오로지 국방 예산에 의해서만 연구개발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주요 목표는 고속, 부양 능력, 장거리, 저운항비, 전천후 능력, 안정성, 신뢰성 등이었다. 특히 제트추진과 공기역학의 진보에 의해서 성능은 약진하여 순항속도는 드디어 시속 8백~1천㎞로 돌입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소련이 1947년 7월 2일 MIG-15 제트 전투기를 처음 비행시켰는데 이것이 뒤로 젖혀진 날개를 지닌 최초의 전투기란 점이었다. 1947년 10월1일에는 미국의 F-86 전투기가 그리고 1947년 12월 17일에는 보잉 B-47 폭격기가 생산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가 독일의 연구결과를 이용한 것에 불과하였다.

한편 초음속기가 속속 탄생되었다. 음속을 넘는 최초의 비행은 미국의 XS-1로서 1947년 10월 14일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소형의 비행기에 한하여 초음속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대형 수송기나 여객기에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1970년 중엽 영불 합동의 콩고드 기와 소련의 Tu-144 초음속 수송기가 항로에 올랐다.

20세기 중엽부터의 항공기 개발의 또 하나의 방향은 단거리 및 수직 이착륙기(STOL, VTOL)였다. 이런 종류의 항공기는 군사용 및 민간용으로 1950년대부터 개발되어 1960년에서 1970년 사이에 실용화되었다.

하늘을 날려는 꿈은 이처럼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인간이 소유한 과학과 기술의 능력은 또 다른 인류의 꿈을 실현시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미래에는 상상을 초월한 공상만화에서 볼 수 있는 비행체가 출현할 것이다. 비행접시와 같은 비행체가 우주공간을 날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비행기 그림.
 

1987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오진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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