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여년 동안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고려청자 색의 비밀이 풀렸다. 그간 고려청자의 재현이 수차례 시도됐지만 선조들의 손길에서 빚어진 특유의 아름다운 색채를 만들 수 없었다.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 인물은 물리학자.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고려청자를 제작해 12세기 진품과 다름없는 ‘명품’ 을 재현했다.
비취색인가, 신비로운 색인가
원래 고려청자의 제작 기법은 비법에 속해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고려청자는 13세기까지 성행하다가 점차 퇴화해 16세기 이후에는 제작 비법 자체가 실종됐다.
1170년부터 1백년 동안 지속된 무인정권의 중요한 자금줄이었던 고려청자가 무인정권이 붕괴하면서 생산의 맥이 끊겼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또 당시 전남 강진 지역의 고려청자는 서남해 뱃길을 따라 송나라에 수출하는 주요 품목이었는데 송나라가 망하고 이민족인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문화수준이 낮아져 고려청자의 수요가 크게 줄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를 입증하듯 2002년 전북 군산의 비안도 앞바다 속에서 고려청자가 무더기로 발굴된 후 ‘보물 탐사 열풍’ 으로 인근 지역에서 2천점이 넘는 고려청자 유물들이 인양됐다. 최근에는 같은 지역에서 고려청자를 도굴한 일당이 검거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고려청자에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그 빛깔의 오묘함 때문이다.
고려청자에서 ‘청자’ (靑磁)는 말 그대로 청색의 자기를 가리킨다. 하지만 고려청자의 청색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청자라는 단어는 12세기 중국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 쓴 견문록인 고려도경에서 ‘도기로서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이라고 한다’ 고 기술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여기서 ‘비색’이 어떤 색깔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비취색(翡色)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그 빛깔이 도저히 따르지 못 할 만큼 신비스러운 색(秘色)이라는 해석도 있다.
유약이 원인이다?
1982년 요업공학과 교수들이 고려청자 색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첫 도전장을 내밀었다. 청자 조각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만든 인공유약과 전남 강진의 도예공들이 개발한 자연유약 중 어떤 것을 사용해 만든 청자가 더 아름다운 색을 내는가를 비교하는 실험을 진행한 것.
결과는 도예공들의 승리였다. 하지만 과학의 성과도 있었다. 초기 고려청자와 비교해 고려청자 비색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상감청자에 사용되는 태토와 유약에는 모두 인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태토에는 0.04-0.05%에 달하는 소량의 인이 들어있었고, 유약에는 1.7%의 인이 함유돼있었다.
1991년에는 경기도 이천 지역의 고려청자를 대상으로 여러가지 조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여기서 철이나 티타늄 등 청자의 태토에 포함된 전이금속이 색을 결정하는 요인이 아닌가 하는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1999년에는 유약설이 나왔다. 유약에는 철과 이산화규소(SiO₂)가 들어 있어 이 물질들이 결합해 규산제일철(FeSiO₂)로 변하는데, 일종의 불순물인 규산제일철이 청자에 비취색을 띠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자기 연구가들은 상감청자의 유약에서 규소가 59.6%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산화철(FeO)과 티타늄이 아주 소량 들어있는 점을 들어 유약에 규소가 많으면 연한 푸른색이 되고 규소가 적으면 누런 빛깔을 띤다고 생각했다. 또 산화티타늄(TiO₂) 같은 금속 산화물을 착색제로 넣으면 푸른 물색과 청람색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 당시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광주분소장이었던 전남대 물리학과 김화택 교수는 고려청자 색의 비밀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을 선보였다. 한국과학재단 기초연구사업의 일환으로 ‘12세기 고려청자와 재현된 청자에 대한 과학적 비교분석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것.
구성성분은 기존 연구와 동일
지금까지 고려청자의 미술사적, 고고학적 연구는 많이 진행됐지만 광학적, 전기적 특성에 대한 물리적 연구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했다.
김 교수는 도예가와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고려청자 색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과학적 지식과 경험에서 우러난 기술 모두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과학자와 도예가가 서로 우열을 가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공동연구를 진행한 것은 처음이었다.
김 교수는 제자 진문석 교수(동신대 전자공학과)와 함께 강진군 고려청자사업소 이용희 연구개발실장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이 실장은 아들 이광훈씨와 함께 고려청자 재현에만 30여년을 매달려온 장인.
이들은 우선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제23호 가마에서 12세기에 제작된 우수한 발색의 청자 시편을 채취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채취된 시편의 단면을 주사전자현미경(SEM)으로 관찰했다. 청자의 가장 바깥 표면인 유약층은 유리질로 돼있고, 그 안쪽의 태토층은 다결정으로 이뤄져 있었다. 또 유약층과 태토층 사이에 계면이 존재했다. 두 층 모두 규소가 절반가량을 차지해 구성성분에 있어서는 기존의 연구결과와 유사했다.
다만 칼슘의 경우 유약층이 태토층에 비해 24배나 많았는데, 김 교수는 “유약층에 칼슘을 많이 포함시켜 비정질 유리로 만들어 유약층과 태토층 계면에서 반사율을 높임으로써 품위있는 은은한 고려청자의 비색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해석했다.
${Fe}^{2+}$이 비취색의 원인
김 교수팀은 본격적으로 고려청자 시편의 물리적 특성을 연구했다. 시편에 측정광을 쏘여 광흡수 스펙트럼을 조사했다. 유약층과 태토층 모두 3백36nm(1nm=${10}^{-9}$m)에서 강력한 광흡수 피크가 일어났다.
특정 파장에서 광흡수 피크가 발생하는 이유는 뭘까. 분명한 사실은 시편의 구성성분 중 특정 원소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팀은 원인이 되는 성분을 찾기 위해 최근 재현한 조선백자 시편의 광흡수 스펙트럼을 조사해 고려청자와 비교하기로 했다.
그 결과 조선백자 시편은 고려청자 시편이 광흡수 피크를 보이는 파장에서 똑같은 광흡수 피크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선백자 시편에는 없고 고려청자 시편에는 있는 원소가 고려청자 특유의 색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김 교수팀은 조선백자 시편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고려청자와는 달리 철이 거의 들어있지 않음을 알아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철이 청자의 다른 구성성분들과 결합해 ${Fe}^{2+}$나 ${Fe}^{3+}$ 형태 모두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 교수팀은 이번에는 고려청자를 굽기 전과 구운 후 태토와 유약에 존재하는 철 이온을 서로 비교했다.
환원불로 때는 것이 필수
“철 이온 중에서도 2가 철 이온인 ${Fe}^{2+}$가 청자색 발현의 원인입니다.” 고려청자를 굽기 전에는 태토와 유약에 ${Fe}^{3+}$만이 함유돼 있는 반면, 청자를 구운 후에는 ${Fe}^{3+}$이온의 양이 매우 적어지는 대신 ${Fe}^{2+}$이온이 증가했던 것이다. 김 교수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고려청자를 환원불에서 굽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도대체 환원불과 철 이온이 무슨 관계일까.
일반적으로 도자기를 구울 때 불을 때는 방법에는 3가지가 있다. 산화불과 중성불, 환원불이 그것. 가마의 온도를 올릴 때 처음에는 평불에 해당하는 중성불을 땐다. 중성불은 쉽게 말해 특별한 기법 없이 땔감으로 온도를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다음 어느 정도 고온이 되면 땔감이 재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땔감을 던지기를 계속 반복해 도자기가 충분히 산소를 공급받도록 구울 수 있다. 이것이 산화불 방식이다. 반면 환원불은 땔감이 완전히 다 타서 재가 되기 전에 또 땔감을 계속 던져 의도적으로 그을음을 발생시키면서 가마 내부에 불완전연소가 생기도록 한다.
이처럼 환원불을 사용하면 땔감이 불완전연소해 일산화탄소가 발생한다. 이 일산화탄소는 청자 표면의 산소와 결합해 이산화탄소로 방출되면서 청자 표면에는 산소가 부족해지고, 이 때문에 철 이온이 ${Fe}^{3+}$이온에서 ${Fe}^{2+}$이온으로 환원된다(Fe₂O₃+CO→2FeO+CO₂). 결국 고려청자의 비취색은 환원불로 구워 철 이온이 환원되면서 ${Fe}^{2+}$가 생성돼 나타나는 것이다.
김 교수팀은 광전자 스펙트럼 분석법을 사용해 이런 사실을 증명했다. 고려청자를 굽기 전 태토의 광전자 스펙트럼 피크는 산화제이철(Fe₂O₃)의 ${Fe}^{3+}$에서 나타나는 피크와 일치했다. 반면 청자 시편의 태토층과 유약층의 스펙트럼에는 ${Fe}^{3+}$뿐만 아니라 ${Fe}^{2+}$에서 나타나는 피크가 명확히 관찰됐다.
‘원조’ 반도체, 고려청자
이 실장은 이런 연구 결과를 토대로 고려청자를 재현했다. 그 결과 12세기 고려청자가 세월이 지나면서 색깔이 다소 퇴색한 점을 제외하고는 재현된 고려청자와 동일한 특징을 지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드디어 고려청자 색의 1천년 비밀이 풀린 것이다. 김 교수는 “강진군의 흙을 사용한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이천 지역의 흙을 강진 흙처럼 잘 섞는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색깔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김 교수팀은 고려청자 색의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고려청자가 반도체의 특성을 지닌다는 것.
반도체는 기본적으로 에너지 간격이 존재해야 한다. 김 교수팀은 산소의 이동과 철 이온의 환원으로 불연속적인 에너지 준위가 발생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에너지 간격을 측정했다. 그 결과 고려청자는 에너지 간격이 큰 반도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전기저항과 홀(Hall) 상수를 측정해 고려청자는 n형 반도체라는 특징도 확인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반도체는 유독성환경에 노출될 때 산화해 반도체 기능을 상실한다”면서 “고려청자는 이런 점에서 1천년을 견딘 친환경 반도체”라고 설명했다.
세계 제일의 반도체 국가 대한민국의 저력은 바로 1천여년 전 고려청자를 굽기 시작한 조상들의 지혜에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