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내 인생의 황혼으로 가는 긴 여행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1994년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면서 국민들에게 한 말이다. 당시만 해도 일반인들은 치매를 그저 노인에게 오는 노화과정쯤으로 여길 뿐 심각한 질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진솔한 고백으로 치매가 조기진단의 중요성과 함께 연구비 지원 같은 국가적 역량이 집결돼야 할 중요 질환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년층 비율이 점차 늘어나면서 점차 노인성 뇌질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내 부모가 이같은 질병에 걸리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대표적인 노인성 뇌질환의 면면을 낱낱이 짚어보자.
제2의 유아기 알츠하이머병
인생은 60세부터! 그러나 60세부터 맞게 되는 최대의 적이 있으니, 바로 치매다. 셰익스피어가 ‘제2의 유아기’ 라고 부른 이 질병은 65세 이상 노인 1백명 중 1명 꼴로 발병하고, 그 후로는 5년이 지날 때마다 발병률이 2배씩 증가한다. 평생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던 부모님이 어느날부터 가족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며, 대소변도 못 가린다면 가족 모두에게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국내 치매 인구는 고령화 현상으로 인해 급증하는 추세다. 1995년 65세 이상 노인 중 치매 발병률은 8.3%이며, 2020년에는 9% 정도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를 적용하면 2015년에는 치매 노인 수가 약 52만7천명에 이를 것이다. 치매는 대부분 알츠하이머병에서 유래한다. 알츠하이머병 초기에는 건망증, 기억상실, 시간이나 장소에 대한 감각상실 증상이 나타나며 집중·계산·말·판단이 어려워진다. 말기에 이르면 환자 스스로가 자신을 전혀 돌볼 수 없다.
알츠하이머병은 환자가 사망한 후 부검해서 얻은 뇌 조직 연구를 통해 마지막으로 검증한다. 과학자들은 현미경으로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를 살펴본 결과 시냅스 주위에 아밀로이드라는 섬유물질이, 신경세포(뉴런) 몸체에 타우라는 단백질이 변형된 형태로 축적돼 있는 것을 관찰했다. 주의력, 기억, 학습과 같은 고도의 인식능력은 아세틸콜린, 소마토스타틴, 모노아민, 글루타메이트 같은 여러 신경전달물질이 신경세포 사이를 원활하게 교류하면서 이뤄진다. 그런데 아밀로이드와 타우가 쌓여 있으면 신경전달물질이 잘 전달되지 않아 신경계의 기능에 이상이 생긴다. 이것이 알츠하이머병의 주요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알츠하이머병 중 5-10%는 유전된 결과이며, 이런 경우 대개 60세 이전에 발병한다. 최근 과학자들은 아밀로이드를 만드는데 관여하는 유전자가 사람의 21번 염색체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1번 염색체에 있는 프레스닐린-1, 14번 염색체에 있는 프레스닐린-2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알츠하이머병이 생긴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염색체 19번에 있는 아포리포단백 유전자 또한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키는 주범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한해 10만명 정도가 알츠하이머병으로 사망하며, 대개 폐렴 같은 합병증이 주요 사망 원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5년 사망 원인 통계에 따르면 1986년 이후 치매와 같은 정신장애는 행동장애인 알콜 중독과 더불어 10년간 증가폭이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로, 6백60%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불행히도 현재 이 병의 치료는 흥분, 불안, 예측 불가능한 행동, 수면장애, 우울증과 같은 몇몇 증상에만 국한돼 있다. 또한 환자의 20-30%에서만 기억장애가 일시적으로 개선되고 있는 실정이다.
연구자들은 아밀로이드의 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전자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치료법을 개발중이다. 한 예로 아밀로이드가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 전에 아예 분해해버리는 효소 시크리테이즈가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키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삽입한 형질전환 쥐는 흥미롭게도 마치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이나 신경세포에 이상 증상을 나타낸다. 이런 동물모델도 연구에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 괴롭힌 파킨슨병
교황 요한바오로 2세, 히틀러, 모택동, 캐서린 햅번, 무하마드 알리, 마이클 제이 폭스. 이들의 공통점을 알고 있는가. 나이 들어서 모두 파킨슨병으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다. 파킨슨병은 근육이 떨리거나 경직되고 움직임이 둔해지는 증상을 보이는 대표적인 운동장애 질환이다. 미국에서 현재 1백만명 정도가 이 병에 시달리고 있다. 국내의 경우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으나 인구 1천명 당 1명의 비율로 파킨슨병이 발병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1950년대 후반 파킨슨병 환자를 부검한 결과 뇌에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양이 매우 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후 1960년대에 뇌로 들어가 도파민으로 변형되는 약물인 레보도파를 투여해 이 병을 치료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레보도파가 도파민으로 변형되는 과정이 뇌로 흡수되기 전에도 일어나는 문제가 드러났다. 레보도파가 뇌 밖에서 다량의 도파민으로 바뀌면서 오심, 구토, 식욕감퇴 같은 부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현재 레보도파는 뇌 밖의 대사를 억제시킬 수 있는 다른 약제와 혼합해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파킨슨병은 유전적인 요인보다는 살충제와 같은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후반, 한 불법 약물제조자가 마약의 일종인 헤로인과 같은 물질을 찾기 위해 엠피티피라는 화학물질을 우연히 합성했다. 그런데 이 물질이 파킨슨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즉 엠피티피가 뇌에서 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를 파괴하는 물질로 변환돼 파킨슨병을 유발하는 것이다. 최근의 파킨슨병 연구는 기본적으로 이같은 엠피티피 모델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파킨슨병에 걸리면 중추신경계 외부에 있는 신경세포군인 신경절의 일부분이 비정상적인 과민 반응을 일으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꼬이거나 춤추는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절개수술로 이 부위를 파괴하면 파킨슨병의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최근에는 뇌에 전극을, 흉부와 복부 피부 밑에 전기생성장치를 삽입, 뇌에 고주파의 파동을 가해 자극받은 부위가 전기적인 휴지기 상태가 되도록 해 근육의 움직임을 억제하는 뇌심부 자극술도 증상을 호전시키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외에도 도파민을 생성하는 태아의 신경세포나 줄기세포를 이식하는 치료법도 활발히 연구중이다.
비정상 단백질 헌팅턴의 위력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몸이 다소 뻣뻣해 보이고 종종 몸을 움찔하는 등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헌팅턴병 환자를 본 것이다. 이 병은 서서히 진행하면서 증상이 하나씩 추가되는 양상을 보인다.
얼굴을 부자연스럽게 찡그리는 것은 뭔가 이상이 있다는 첫번째 신호다. 다음 단계에서 점차 멍한 상태로 변해가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얼굴, 팔, 다리가 마치 춤을 추는 듯 연신 움직인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으면 정도가 심해진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지적능력도 저하된다. 후기에 접어들면 매우 난폭해지거나 아니면 반대로 매우 의존적이고 수동적이 된다. 심한 경우 치매와 정신이상이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 헌팅턴병의 발병률은 인구 10만명 당 4-8명이며, 우리나라의 경우 정확한 통계치는 없으나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1993년 과학자들은 헌팅턴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밝혀냈다. 이 유전자는 뇌에 널리 분포하는 헌팅턴이라는 단백질을 만든다. 이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 글루타메이트가 35개 이상 반복돼 비정상적인 형태가 되면 세포 내에서 독성을 유발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정상적인 헌팅턴 단백질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인생의 황금기인 30-50대에 헌팅턴병이 발병한다. 헌팅턴병은 일차적으로 중추신경계 중 근육운동을 통제하는 부위와 사고, 지각, 기억의 중추인 대뇌피질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발병 후 10-20년이 되면 걷고, 말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결국 모든 신체기능을 상실한다. 하지만 이 병을 앓는 환자는 대부분 침대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결국 심장병이나 호흡기 질병 같은 합병증, 또는 자주 넘어져서 발생하는 머리 부상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진단은 세부적인 임상검사, 가족력, 뇌 촬영 등으로 이뤄진다. 이 병의 원인 유전자가 발견된 후에는 간단한 유전학적 검사로도 진단이 가능해졌지만, 이에 따른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헌팅턴병 유전자를 지녔다고 진단을 받은 사람이 향후 고용이나 보험, 심지어 혼인에까지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특별한 치료법이 없기에 임상의사, 연구자, 상담가들은 윤리적, 사회적 면을 충분히 고려해서 검사의 전과정이 엄격하게 이뤄지는 진단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알츠하이머병과 마찬가지로 동물모델이 헌팅턴병의 기전을 연구하고 치료법을 개발하는데 많이 사용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앞으로 줄기세포가 헌팅턴병으로 잃어버린 뇌세포를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도 기대하고 있다.
모든 질병과 마찬가지로 노인성 뇌질환도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규칙적인 운동과 취미활동으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한다. 또 과도한 흡연과 음주를 삼가고, 즐겁고 긍정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생활을 보장하는데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