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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2. 알레르기 잡아먹는 기생충

인간 돕는 고마운 기생생물

1999년 국내 신문에 기생충을 뱃속에서 기른 ‘괴짜’ 의사의 이야기가 실렸다. 일본 도쿄의치대 후지타 고이치로 교수가 주인공이다. 후지타 교수는 자신의 장 속에서 촌충을 3년이나 길렀다. 당시 촌충을 구하기가 어려워 그는 어시장에서 불결한 생선을 골라먹고 겨우(?) 촌충에 감염됐다고 한다. 촌충은 장의 길이보다 길어지면 항문을 비집고 나온다. 후지타 교수는 빠져나온 촌충을 조금씩 끊어 연구재료로 썼다.

후지타 교수는 “기생충에 감염되면 좋은 점도 있다”며 “콜레스테롤과 체중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불필요한 영양분과 지방을 촌충이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세기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너무 뚱뚱해지자 일부러 촌충에 감염돼 6개월 만에 105kg에서 55kg으로 몸무게를 뺐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생충에 감염되면 알레르기 줄어

과연 영양 과잉의 현대인에게 기생충은 비만을 막는 동반자가 될까. 후지타 교수의 ‘엽기’ 주장이 현실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기생충은 현대 의학에서 꼭 나쁘거나 귀찮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기생충을 이용해 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의 비밀을 푸는 연구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기생충을 이용해 병을 치료하는 연구로는 단연 알레르기가 꼽힌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이뤄진 역학 조사 결과 기생충 감염과 알레르기 질환의 수가 반비례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봉, 에쿠아도르, 잠비아 등의 역학 조사에서 기생충 감염이 천식 증상을 완화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왜 기생충에 걸리면 알레르기가 줄어들까. 연세대 의대 신명헌 교수는 “알레르기 반응은 면역 시스템이 특정물질에 대해 지나치게 반응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생충에 감염되면 면역 시스템이 기생충을 공격하느라 에너지가 줄어들어 알레르기도 함께 감소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일본에서는 기생충 감염이 줄어든 1930년대 이후 면역 체계의 과민 반응으로 생기는 장염과 크론병이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다. 기생충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도 기생충 감염률이 떨어지면서 아토피 피부염이나 천식 등 알레르기 질환이 늘어났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과학자들은 면역글로블린E(IgE)라는 항체를 기생충과 알레르기의 연결고리로 주목하고 있다. 이 항체는 우리 몸에서 기생충을 공격한다. 동시에 히스타민의 분비를 촉진해 알레르기가 일어나게 한다. 즉 우리 몸이 기생충에 대항하기 위해 이 항체를 만들었는데 막상 기생충이 없으니 엉뚱한 것들을 공격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알레르기나 대장염를 치료하기 위해 몸 안에 기생충을 달고 살아야 할까. 상식적으로 그럴 수는 없다. 기생충 연구는 신약 개발과 새로운 치료 기술로 이어진다.
 

알레르기와 기생충 감염률은 반비례한다는 보고가 있다. 기생충이 지나치게 과민한 면역 시스템을 가라앉히기 때문이다.


신명헌 교수는 “기생충이 우리 몸에서 오래 살아 남았다는 것은 우리 몸을 그리 손상시키지 않고도 면역 시스템을 피하는 기술이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즉 기생충이 면역 시스템을 억제하는 물질을 분비하거나 직접 면역 세포를 죽인다는 것이다. 2004년 4월 ‘면역학 회보’에는 피 속에 기생하는 선충에서 염증을 억제하는 새로운 물질을 발견했다는 연구가 발표됐다. 신 교수도 장에 기생하는 아메바가 면역세포를 죽이는 과정 일부를 밝혀내 올해 4월 ‘면역학지’에 발표했다.

염증을 치료하는 약으로 가장 유명한 아스피린의 주성분은 처음에 버드나무 껍질에서 발견됐다. 기생충에서도 효과적인 염증 치료제 등 신약이 개발될 수 있다. 특히 기생충이 특정 세포를 죽이는 과정을 잘 응용하면 암세포를 골라 죽이는 기술도 가능하다. 신 교수는 “기생충이 신약 후보로 갖는 장점은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공존했다는 사실”이라며 “기생충 신약은 부작용이 훨씬 적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미 기생충으로 신약을 만드는 과학자들이 있다. 칼 짐머가 지은 ‘기생충 제국’에서는 십이지장충으로 알려진 구충에서 외과 수술용 혈액 희석제를 개발하려는 미국의 한 생명공학 업체를 소개하고 있다. 구충은 피를 빨아 먹기 위해 혈액 응고 단백질의 작용을 방해한다. 이 과정에서 구충이 분비하는 물질을 약으로 개발하려는 것이다.

미국 아이오와대 조웰 웨인스탁 박사는 더 ‘엽기적인’ 약을 기생충을 이용해 개발하고 있다. 아이오와대 의대 연구진은 1997년 궤양성 대장염에 걸린 환자 7명에게 동물의 장에 사는 기생충의 알을 몰래 먹였다. 이들은 기존 치료법이 전혀 듣지 않았던 환자였다. 2주 뒤 기생충 알이 부화하고 유충이 태어나면서 6명이 병에서 나았다.

웨인스탁 박사는 이점에 착안해 돼지편충알을 이용한 면역강화제를 만들었다. 돼지편충은 인체에 살 수 없어 알에서 깨어난 뒤 몇 주 머물다가 배설된다. 그 사이에 인간의 면역계를 자극해 항체를 많이 만들고 면역계를 안정시킨다. 물론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면역 기능이 크게 떨어진 환자들이 대상이다.
 

외국에서는 선충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많다. 선충 중에는 다른 생물의 몸 속에 사는 기생충도 있지만 독립생활하는 것도 있다.


암 공격하는 기생충

더욱 혁신적인 아이디어도 있다. 아직은 가설이나 구상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실현만 되면 기생충을 인간의 좋은 친구로 격상시킬 것이다.

하나가 기생충으로 암을 치료하려는 것이다. 서울대 의대 채종일 교수는 “톡소포자충이라는 기생충에 감염되면 몸 안에서 자연살해세포라는 면역세포가 늘어난다는 보고가 있다”고 밝혔다. 자연살해(NK)세포는 혈액 내 백혈구의 일종으로 체내에서 암세포를 직접 파괴하는 ‘특공대’ 면역세포다. 연구팀은 2, 3년 전 쥐를 대상으로 암과 기생충의 관계를 잠깐 연구했지만 아직은 결과가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인슐린을 만들지 못하는 당뇨병 환자를 기생충으로 치료할 수도 있다. 당뇨병 환자가 맞는 인슐린 주사를 유전자 변형 기생충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성균관대 의대 공윤 교수는 “우리 몸에 큰 해가 없는 기생충에 인슐린 유전자를 삽입한 뒤 인체에 감염시키면 몸 안에서 계속 인슐린을 분비할 것”이라며 ‘인슐린 기생충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기생충은 결코 필요없는 존재가 아니다. 기생충은 생태계의 균형을 조절한다. 지금은 ‘기생’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서로 이익을 주고받으며 ‘공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물이 수컷과 암컷으로 성이 나눠진 것도 기생충과 병균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생물학 이론도 있다. 미래에는 기생충이 애완동물 만큼 인간의 사랑을 받을지도 모른다.
 

덜 익은 돼지를 먹으면 걸릴 수 있는 갈고리촌충. 일본에서는 촌충에 일부러 감염돼 살을 빼는 연구도 아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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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김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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