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의 한 야적장. 검역이 끝나자 거대한 크레인이 굉음을 뿜기 시작한다. 곳곳에 쌓여있는 거대한 나무 원목들. 굵기와 크기, 길이까지 서로 다른 수십종의 나무들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얼마가 지나자 거대한 원목들은 육중한 대형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진다.
트럭에 실려간 나무들은 미국과 동남아시아, 뉴질랜드에서 들여온 원목이다. 대부분 건축재와 가구, 종이를 만들기 위해 배를 타고 멀리 수천km 물길을 건너왔다. 하지만 이제부터 나무도 다 같은 나무가 아니다. 나무들 사이에도 나름대로 품격이 있다. 생명에 귀천은 없지만 죽어 원목이 되면 신분이 갈리는게 나무의 운명이라면 운명. 하지만 꼭 비싼 나무가 좋은 원목이라고 대우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숨어있는 개성많고 별난 나무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철보다 강한 나무 새털보다 가벼운 나무
질주하는 열차의 안전은 누가 책임질까. 수천t 무게의 기차가 마음껏 철길을 달릴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무 때문. 흔히 철목이라고 불리는 아이언우드는 강철만큼 단단하기로 유명하다. 인도네이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늪지대에서 자라는 이 나무는 비중이 1을 훨씬 넘어 물에 가라앉거나 썩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무가 잘 썩지 않는 이유는 조직에서 스며나오는 페놀성분 때문인데, 이는 방충효과까지 있다. 또 철목은 흑단과 함께 고유의 강도와 색 때문에 검도용 목검의 재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철목이 무겁고 강하기로 소문났다면 가볍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무가 있다. 중남미 에콰도르 태생의 발사는 특수철재를 대신해 행글라이더 날개 골격에 이용된다. 가벼운 정도로 치면 나무 가운데 최고의 약골이다.
동남아에서 나는 마디카와 파독이란 나무는 조각이나 수석 밑받침의 재료로 사용된다. 단단하지만 세공용 칼에는 잘 깎이는 성질 때문이다.
목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향이다. 특히 대표적인 종이 향나무다. 독특한 향기로 옛날부터 가구나 불기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표현하기 힘든 단아한 색깔과 향기에도 불구하고 벌레가 모여들지 않는 것을 보고 나무향이 남성의 정력 감퇴에 뭔가 영향을 끼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한다.
편백나무도 이와 비슷한 특성이 있다. 일본에서는 히노끼라 하는데 물에 강하고 향이 그윽하다는 이유로 나무욕조의 재료로 많이 쓰인다. 이 나무도 흰개미를 쫓는 성분이 있어 건축재나 조선 분야에 널리 쓰였다.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에 일부 분포하고는 있지만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
캐나다 국기에 그려진 붉은 단풍잎은 단맛으로 유명하다. 북미지역 특히 캐나다에서 많이 자라는 이 나무는 일명 설탕단풍. 고로쇠처럼 수액을 채취해 끓이면 설탕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단풍시럽이 나온다. 캐나다에서는 설탕처럼 몸에 나쁘지 않은 건강음료로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
목재의 꽃은 악기
오래전부터 악기는 목재로 만드는 것이 정석이었다. 울림이 좋고 멋진 문양과 색을 가진 목재들이 소위 악기의 품격을 좌우하는 중요 요소로 고려됐다.
특히 피아노는 목재의 꽃이라 할 정도로 수많은 목재가 쓰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수목 전문업체인 영림목재 조용철 부장은 “1960-1970년대 피아노 한대엔 보통 2백여가지의 나무가 재료로 쓰였다” 고 말한다. 피아노 몸체에서 건반, 핵심이라 할만한 향판까지 각기 다른 나무를 사용했다는 말이다. 흰 건반을 만드는데는 스프루스, 검은 건반은 검은색을 띤 흑단이 사용됐다. 울림소리가 뛰어난 향판을 만드는데는 가문비나무 만큼 좋은 재료가 없다. 나이테가 촘촘히 박혀있고 간격이 일정한 가문비나무는 넓고 깊은 소리를 만드는 최고의 재료다.
나무와 악기의 상관관계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이뤄진 것은 바이올린이었다. 피아노 만큼이나 목재의 품질을 따지는 것이 바로 바이올린. 바이올린 소리는 현에서 나온 음파가 몸체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공명을 만들어내느냐로 결정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나무 재질과 몸체의 견고함, 나무판 두께가 공명에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명품 바이올린은 하늘이 만든 목재의 예술이란 말이 무리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50여개뿐인 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바로 그런 사례다. 스트라디바리를 분해해 주파수를 바꿔가며 진동을 조사하면 놀랍게도 공명주파수가 서양음계의 음간격과 정확히 일치한다.
개당 20억원을 호가하는 이 악기에 대한 비밀은 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죽은 뒤 꾸준히 진행돼 왔다. 하지만 제작의 노하우는 그리 쉽게 밝혀지지 못했다. 미국 테네시대 그리씨노 마이어 박사와 콜롬비아대 로이드 버클 박사 연구팀은 나무와 스트라디바리우스와의 관계에 대한 재미있는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팀은 기후와 우수한 음향을 만드는 나무 밀도와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이들은 악기에 사용된 목재가 오랜기간 지속된 겨울과 서늘한 여름에 성장했다는 공통점을 밝혀냈다. 15-19세기 중반 유럽에서 진행된 소빙기가 당시 악기 제작에 사용된 알프스의 가문비나무들에 영향을 끼쳤던 것. 연구팀은 1645-1715년 사이 70년간의 추위는 나무들의 밀도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바이올린이 만들어졌을 때 나무인 가문비나무, 낙엽송, 소나무의 연대기를 작성하다 1625-1720년 사이 나이테가 전에 없이 촘촘해져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스트라디바리가 태어나 활동한 시기와 거의 일치했다.
이처럼 촘촘한 나이테와 높은 밀도가 악기의 톤과 음색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전문가들 사이에 공통된 견해다. 물론 여전히 많은 전문가들은 아무리 좋은 나무라 할지라도 장인의 혼이 담겨있지 않으면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고 말한다. 나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튀는 문양이 더 값져
눈에 보기 좋은 나무가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 모른다. 하지만 색감만 좋다고 해서 명품 목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쓰임새에 맞춰 쓰이는 용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바이올린 몸체에 쓰이는 나무가 그런 사례. 품격에 맞게 색과 문양이 나와줘야 한다. 새눈 모양에서 파도모양까지 갖가지 희귀 나무결은 부르는게 값이다. 목재색도 형형색색 나무 종류에 따라 다르기는 마찬가지다. 붉은빛이 도는 참죽나무 목재는 악기의 외형 제작에 많이 쓰였다. 검은빛이 감도는 흑단은 은장도나 지휘봉의 재료로 주로 사용된다. 군사독재시절 별을 단 장군들 사이엔 권위를 상징하는 검은 지휘봉을 가져보는 것이 큰 인기였다.
전혀 의외의 색을 띠는 나무도 있다. 보라색을 띠는 목재는 중남미 밀림에서 건너온 퍼플하트. 색이 가진 특성처럼 자유분방한 음악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세련된 외형의 전자기타 같은 악기의 몸체로 제격이기 때문이다.
‘목재의 비밀’ 의 저자 국민대 엄영근 교수는 “목재색이 이처럼 서로 다른 까닭은 나무마다 다른 색의 고유한 추출물을 만들기 때문” 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태양빛을 오래 쏘이면 색이 변하곤 하는데, 이는 리그닌이라는 세포벽 주성분이 산화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종이를 오랫동안 햇빛에 노출시키면 색이 변하는 현상과 같은 이치라는 설명이다.
문양과 색깔은 아니지만 옹이도 새롭게 재평가 받고 있다. 그동안 옹이는 목재의 강도를 줄이는 주범으로 지목받아왔다. 옹이는 나무 지름이 커지면서 가지 밑부분이 줄기에 둘러싸여 생긴다. 줄기와 가지가 함께 성장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가지가 줄기 안에 파묻혀 줄기조직과 연결되면서 발달한 것. 옹이를 잘랐을 때 쐐기모양인 까닭은 가지의 아랫부분이 원추모양이기 때문이다.
가지가 죽어도 줄기는 계속해서 따로 성장하기 때문에 나중에 건조될 때 쉽게 빠져버릴 수 있다. 이 때문에 빠져버린 빈 공간이 일종의 흠으로 여겨졌다. 값비싼 나무들을 수시로 가지치기하는 이유도 옹이로 인해 생기는 결점을 없애기 위해서다.
옹이에 대한 생각은 최근 들어 많이 바뀌었다. 옹이의 자연적 모양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면서 오히려 자연산 옹이에서 틀을 짜 인조옹이를 만들어 사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인테리어 분야에서 활발히 자연 무늬로 옹이가 애용되고 있는 것이다.
활엽수가 더 많아
물론 이렇게 개성 강한 나무들이 처음부터 빛을 본 것은 아니다. 특수목은 처음엔 쓸모없는 잡목으로 분류돼 미국산 나왕과 소나무의 서자 취급을 받았다. 그러다 그 독특함이 눈길을 끌자 가구나 악기, 악세서리의 주재료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뒤늦게 빛을 발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학명을 제외한 이름이 시간이 흐르며 슬쩍 바뀌는 사례도 빈번하다. 지금은 홍송으로 불리는 더글라스퍼는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미송으로 불렸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통상명보다는 학명으로 알고 있는게 좀더 확실하다고 말한다.
이같은 목재들은 대부분 침엽수보다 활엽수에 집중돼 있다. 목재학자들은 활엽수를 좀더 진화한 수종으로 본다. 보통 목재의 특성은 수액이 이동하는 통로인 헛물관의 조직구조에 영향을 받는다.
이에 대해 엄 교수는 “침엽수에 비해 활엽수의 조직구조가 좀더 복잡하기 때문에 색, 향, 강도면에서 다양한 성질을 보인다” 고 설명한다. 침엽수는 활엽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직구조가 엉성하다는 것이다.
최근 웰빙 바람을 안고 친환경적 주택을 짓자는 얘기들이 심심찮게 제기된다. 목재주택을 짓자는 주장도 이런 목소리 가운데 하나. 그 사이를 슬쩍 끼어든 것이 바로 대나무다.
대나무는 그 이름과 달리 엄격히 말해 나무가 아니다. 대나무가 나무인지 풀인지 알아보려면 목본식물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목본식물은 여러해 동안 성장하는 다년생 식물로, 유관속 조직을 가지며 매년 생장하는 줄기가 있어야 한다. 대나무 역시 이런 특성을 갖는다. 그러나 다른 나무처럼 새롭게 수피를 만드는 형성층이 없기 때문에 풀로 분류된다. 하지만 최근 친화적인 마루용 소재로 목재 외에 대나무가 손꼽히고 있다. 나무가 아닌 풀임에도 성장속도와 나무적 특성 때문이다. 대나무는 바닥재에 많이 쓰이는 적참나무보다 더 단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접 수분에 많이 노출되면 변형이 생기는게 단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