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초여름 날씨를 보인 4월 중순, 기자는 광릉에 있는 국립수목원에서 열리고 있는 ‘식물세밀화전’ 취재하기 위해 포천으로 향했다. 첨단 사진술이 보편화된 오늘날 왜 굳이 식물세밀화를 그릴까 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다. 수목원이 가까워지자 쭉쭉 뻗은 전나무가 눈에 들어오고 공기는 한층 상쾌하다.
사진으로 불가능한 묘사 가능
“식물세밀화는 사진이나 표본이 줄 수 없는 정보를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장식이나 사치가 아니에요.”
낙엽송 목재로 멋들어지게 지어진 산림생물표본관에서 기자를 맞은 국립수목원 이유미 박사는 기자의 성급한 질문에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차를 권한다. 최근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라는 책을 펴내기도 한 이 박사는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식물학자로 수목원의 생물표본연구실을 책임지고 있다.
“물론 식물표본이나 사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표본은 이미 말라버린 상태다 보니 원래의 색과 형태를 알기 어려운 경우가 있죠. 사진도 그렇습니다. 한 앵글에서 본 모습이기 때문에 식물의 모든 특징을 보여주지 못할뿐더러 주위의 흙이나 다른 식물 등과 겹쳐져 구분이 안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식물학자들이 식물을 제대로 연구하는데는 이들 자료와 함께 식물세밀화도 필수적이다. 식물을 그린 그림의 역사는 동서양 모두 꽤 오래됐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세밀한 그림은 분류학의 아버지인 식물학자 린네가 활동하던 1700년대부터 등장했다. 당시는 컬러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라 식물분류도감의 그림은 화가들이 일일이 색을 입혔다고 한다.
그 뒤에도 식물세밀화는 화가들과 식물분류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발전돼 왔다. 세밀화는 수목원이나 표본관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아이템이기 때문에 영국의 큐가든이나 미국의 뉴욕식물원 등 선진국의 식물원은 자체적으로 세밀화가를 양성하고 있을 정도다. 국내에서도 몇몇 화가들이 식물세밀화를 그려왔지만 개인적인 활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작품들은 그림으론 성공했을지 몰라도 식물학적 정보를 주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식물학자들이 함께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 박사는 국립수목원이 세밀화 작업을 주도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곳에서라면 식물학자들의 지식과 세밀화가들의 예술적인 역량이 결합해 학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3명의 세밀화가가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업은 먼저 광릉숲에서 자라는 식물을 대상으로 했다.
광릉요강꽃을 비롯해 광릉숲을 대표하는 1백50여종의 식물을 그려낼 예정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지금까지 작업해온 작품 5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작업이 마무리되면 ‘소중한 광릉숲 식물’ 이라는 도감을 만들 계획이다.
이 박사를 따라 세밀화실에 들어가자 백색종이와 수채화 팔레트가 눈에 들어온다. 3명의 화가들이 한손에는 나뭇가지나 풀을 들고 다른 손에는 붓을 든 채 작업에 여념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연필과 붓 같은 작업도구는 물론 큼직한 확대경와 현미경도 눈에 들어온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보름 이상 걸립니다. 굉장한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죠.”
붓을 내려놓고 기자와 인사를 나눈 이승현씨의 말이다. 원예학과에 진학한 이씨는 대학 2학년 때 조경스케치를 배우다 식물세밀화를 알게 됐다. 대학에서 식물을 공부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여러 단계를 거치기 때문.
먼저 야외에 나가 식물을 스케치하고 사진을 찍어둔다. 이때 눈에 띄는 식물의 특징들도 메모해둔다. 대체로 꽃이 핀 상태의 식물을 택한다. 보기에도 좋을뿐더러 생식기관인 꽃은 식물을 분류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실내에서 보고 그릴 견본도 준비해온다.
이렇게 기초 준비가 끝나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이때 이유미 박사 같은 전문가들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된다. 해당 식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특이한 구조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면 정확하고 풍부한 정보를 담은 그림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밀화 제작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전시실이 있는 산림박물관으로 향했다. 역시 목재로 만들어진 전시실 내벽을 빙 둘러 50여개의 액자가 나란히 걸려있다.
“와!”
실물을 보는 듯한 생생한 형태와 색조, 섬세하게 묘사된 디테일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우리가 그냥 지나치는 숲속에 이처럼 아름다운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식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식물세밀화는 사람들이 좀더 쉽게 그런 아름다움에 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셈이죠.”
이씨의 설명이다. 어떤 그림에는 맨눈으로 보기 어려운 씨앗이나 꽃의 모습까지도 자세히 묘사돼 있다. 이런 부분들은 확대경이나 현미경을 보면서 그린다고 한다.
시골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아지풀 그림도 있다. 줄기 위에 털이 복숭한 강아지 꼬리를 닮은 부분은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원추꽃차례다. 이렇다보니 정확한 꽃의 형태를 맨눈으로 보기 어렵다. 세밀화를 보니 소수(小穗)라고 부르는 강아지풀의 꽃이 잘 묘사돼 있다.
그 옆에는 딸기 비슷한 식물 그림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뱀딸기’라고 써있다. 줄기가 땅을 기면서 길게 뻗고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는 식물의 특성이 잘 묘사돼 있다. 사진으로는 이런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서 일행은 스케치북을 들고 숲으로 들어갔다. 4월 중순이라 아직은 꽃이 핀 식물이 많지 않다고 한다. 5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야생화가 피기 시작해 장마가 시작되기 전까지 꽃들이 만발하는데, 이때가 가장 바쁜 시기라고.
한참을 걷다보니 나무그늘에 오롯이 자리를 잡은 백작약 한포기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줄기 위에 호두알보다 조금 작은 꽃봉오리가 봉긋이 솟아있다. 꽃이 피려면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단다. 작약과(科)의 다년초인 백작약은 풀한포기에 꽃이 한송이만 피는 식물이다.
저편에는 자주색 꽃이 핀 작은 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군데군데 들국화 비슷한 노란색 꽃이 핀 종류도 보인다.
“아, 저기 얼레지가 있네요. 참 예쁘죠. 이 노란꽃은 복수초고 여기 현호색도 보이네요.”
이씨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연한 남색의 나팔꽃처럼 생긴 작은 꽃이 숨어있다. 화가들은 각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연필을 움직인다. 허리를 굽혀 얼레지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일부는 꽃잎 6장이 모두 뒤쪽으로 말려 있다.
“얼레지의 꽃은 만개하면 꽃잎이 이렇게 뒤로 젖혀집니다. 곡선이 정말 우아하죠.”
스케치를 하던 이씨의 설명이다. 노란색이 선명한 복수초는 초봄에 쌓인 눈을 뚫고 피어난다해서 ‘얼음꽃’ 이라고도 부른다.
스케치를 하다보면 에피소드도 많단다. 특히 광릉숲에는 뱀이 자주 출몰해 그림을 그리다가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한두번이 아니라고. 한참을 그리다가 사진을 찍고 숲을 내려왔다.
식물 연구 기초자료로 활용
“표본이나 세밀화는 식물을 연구하는데 기본이 되는 자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이런 작업에 소홀했습니다.”
이유미 박사는 선배 학자들이 평생동안 모은 견본들도 보관을 잘못하거나 분실해 남아있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그 결과 많은 학자들이 우리나라의 식물 견본을 보러 일본이나 러시아 등 외국 박물관을 찾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대학은 돈이 되지 않는 이런 기초작업까지 돌볼 여유가 없는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결국 이런 일은 국립수목원 같은 국가기관의 몫으로 남게 됐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유엔의 생물다양성보존협약에 가입돼 있습니다. 가입국은 자국의 동식물 목록을 제출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준비가 돼 있지 않아요.”
한반도가 좁은 땅덩어리라고 말하지만 정작 어디에 어떤 식물이 얼마나 자라는지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가 되지 않은 상태다. 또 식물을 나타내는 명칭도 아직 정리가 돼 있지 않다. 소나무를 두고도 문헌에 따라 소나무, 솔, 적송 등으로 부르기 때문에 데이터베이스화가 어렵다. 이렇다보니 많은 정보가 쌓여있어도 제대로 활용 못한다.
“현재 통일된 식물 명칭을 정해 싣는 ‘국가표준식물목록’ 을 만들고 있습니다. 40여명의 식물분류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죠.”
뒤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나라도 식물세밀화 제작이나 표준식물목록 작성 등 식물학 연구에 기반이 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비꽃의 작은 꽃잎 속에,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의 솜털 달린 씨앗 속에 감춰진, 우주처럼 다양하고 재미난 세상을 알았으면 했습니다.”
이 박사는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식물세밀화는 전문가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일반인들이 식물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식물을 사랑하게 되는데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