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나카무라.”
이 호칭은 수백년 전 막부시대 일본의 어느 노예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1993년 청색 발광다이오드(LED, Light Emitting Diode)를 발명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미국 산타바바라 소재 캘리포니아대 재료물성공학부 나카무라 슈지 교수의 별명이다. 노벨 물리학상감이라는 엄청난 연구를 한 그가 왜 이런 엉뚱한 별명을 갖게 됐을까.
1954년생인 나카무라 슈지는 일본 도쿠시마대 공학부를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1979년 형광체를 제조하는 니치아화학공업이라는 작은 회사의 개발팀에 입사했다. 10여년을 이렇다할 성과없이 보낸 1988년 어느날이었다. 그는 은퇴를 앞둔 76세의 창업자 오가와 노부오 사장을 찾아가 청색 LED를 개발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낸다.
당시 이미 적색 LED와 녹색 LED는 개발됐으나 청색 LED는 세계 수천명의 연구자들이 매달리고 있었지만 이렇다할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 청색 LED 개발이 절실한 이유는 총천연색을 구현하려면 3원광, 즉 적색, 녹색, 청색의 빛이 갖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내벤처 형태로 홀로 연구를 시작한 그는 바로 시련에 부딪친다. 1989년 3월 새로 사장이 된 창업자의 사위가 연구 중단 압력을 가해왔기 때문. 나카무라 슈지는 이런 사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회의에도 불참한 채 주말도 없이 연구에 매진, 1993년 마침내 질화갈륨(GaN) 소재의 고휘도 청색 LED 개발에 성공했다.
그후 회사는 단숨에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 발명으로 나카무라 슈지에게 돌아간 보상은 2억엔도 아닌 고작 2만엔(약 20만원)의 수당과 과장 승진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해외학회에 참석할 때마다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이때 그를 만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서구의 과학자들이 붙여준 별명이 바로 ‘노예 나카무라’였다.
2천억원 지급판결
“나는 우리나라를 사랑했지만 우리나라의 시스템에는 실망했다.”
2000년초 미국 대학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여 홀연 일본을 떠나면서 나카무라 슈지가 남긴 말이다. 그의 이민은 일본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이공계 인재를 푸대접하는 일본은 미래가 없다’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그러나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말, 니치아화학공업은 그가 회사기밀을 유출했다며 소송을 걸었다. 이에 격분한 나카무라는 이듬해 회사가 특허를 독점 사용해 부당 이익을 얻었다며 2백억엔(약 2천억원)의 개발 대가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백억엔은 소송 최대 한계 금액이다.
올해 1월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일본을 강타했다. 1심에서 일본법원은 소송액 전액, 즉 2백억엔을 나카무라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덧붙여 “원칙적으로 나카무라 교수가 6백4억엔까지 받을 권리가 있다”는 언급까지 했다. 6백4억엔은 특허가 만료되는 2010년까지 회사가 얻게 되는 이익 1천2백8억엔(추정치)의 절반으로, 법원이 나카무라의 기여도를 50%로 판단한 결과다. 회사는 즉각 항소했지만 만일 최종 재판에서도 2백억엔이 확정된다면 나카무라는 1993년 받은 수당의 무려 1백만배를 받게 된다.
이에 앞서 히타치제작소의 전직연구원에게 광디스크 재생장치 관련 발명대가로 1억6천3백만엔을 지급하라는 판결도 있었다. 최근 도쿄지방법원은 아지노모토사가 인공감미료인 아스파르템 제조법을 개발한 전직연구원에게 1억8천9백35만엔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밖에도 여러건의 발명소송이 진행 중이거나 판결이 나고 있다. 바야흐로 지금 일본은 발명소송 붐이다. 이에 대한 반응도 엇갈리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회사에 큰 이익을 준 우수한 연구자와 기술자에게 보상하는 것은 일본 경제 활력의 회복으로 이어진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기업들은 “업계 현실을 무시한 판결이 계속된다면 연구기지를 해외로 옮길 수밖에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발명보상을 둘러싼 기업과 연구원의 다툼은 이웃나라 일본만의 일일까?
우리나라도 최근 발명 기여도를 둘러싼 소송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이중에는 청색 LED에 버금가는 대형 소송도 있었다. 바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시스템인 ‘천지인’ 특허 소송이다. 한글의 모음 창제 원리인 천(·), 지(ㅡ), 인(ㅣ)을 적용한 이 시스템은 ‘ㅣ · ㅡ’ 3개의 버튼으로 모든 모음을 표시할 수 있게 자모판이 구성된 기발한 아이디어 특허다.
천지인 소송 슬그머니 꼬리 내려
1994년 삼성전자에 다니던 두사람이 발명한 이 시스템은 삼성의 휴대전화가 업계 1위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95년 업무상 ‘직무발명’으로 권리를 양도받은 회사가 이들에게 준 보상금은 고작 21만원에 불과했다. 한편 회사가 얻는 이익은 특허가 만료되는 2015년까지 2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2001년 발명자의 한 사람인 최모씨는 회사가 특허를 가로챘다며 부당이익 반환청구소송을 냈다. 자판발명은 당시 그들의 업무와 무관한 ‘자유발명’이라는 주장이었다. 최씨의 소송대리인이었던 저스티스법률사무소의 김준효 변호사는 “이들의 소속부서는 자판발명과는 관련이 없었다”며 “따라서 이들의 특허권을 직무발명의 명목으로 양도받은 행위는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지방법원은 1심에서 삼성전자의 손을 들어줬고 최씨측은 즉각 항소했다. 그러다가 최근 삼성전자측과 최씨가 합의를 통해 소송을 취하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 변호사는 “현재 최씨와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회사측이 상당한 금액으로 사건을 무마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발명소송 중 연구원이 승소한 판결도 있다. 2002년 동아제약은 먹는 무좀약인 ‘이트라크나졸’의 사용허가권을 다국적 제약사인 얀센에 팔았다. 일시불 70억원과 판매량에 따른 로열티를 받는 조건으로, 이를 통해 동아제약이 얻는 수익은 2백억원으로 추정된다. 신약개발팀의 인원은 8명. 회사는 개발팀에게 2천만원의 포상금을 줬다. ‘신제품 등을 개발해 얻는 수익금의 5-10%를 연구원에게 지급한다’는 회사 사규와는 달리 고작 0.1%만을 지급한 셈이다.
개발팀의 주축이었던 왕씨는 퇴사후 회사가 약속을 어겼다며 소송을 냈다. 법정은 연구원들의 기여도를 5%로 인정, 10억원으로 책정한 뒤 이중 30%인 3억원을 왕씨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동아제약은 이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동아제약 관계자는 “신약개발과 관련해 출원한 특허가 여럿인데 아직 등록이 안된 것들이 있다”며 “관련 특허가 모두 등록되는대로 사규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할 예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추정수익이 2백억원이라는 부분과 참여 연구원 간의 기여비율에는 동의할 수 없어 항소를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정당한 보상이 이공계 살리는 길
“일본이 이뤄낸 고도성장의 원동력은 이과계통의 기술자가 필사적으로 연구개발해 제품의 고성능, 고효율, 저비용을 실현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같은 공적은 어느새 고급관료와 대기업 경영자의 것이 되고 말았다.”
나카무라 슈지 교수는 2002년 출간한 ‘좋아하는 일만 해라’라는 다소 감정적인 제목의 책에서 이공계를 홀대하는 일본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황을 얘기하는 듯하다. ‘사원의 발명은 회사 재산’이라는 의식이 만연한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 연구개발자가 정당한 몫을 인정받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은 발명보상 제도가 이미 정착돼 있고 연구개발자들의 목소리도 높다.
고생해서 독창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도, 사원들을 착취만 할 뿐 아무것도 보상해주지 않는 회사의 관행이 계속되는 한 이공계 기피현상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을까.
“연구개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발명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해야 기술붕괴를 막을 수 있습니다.”
김준효 변호사는 일개 직원이 회사를 상대로 자기 주장을 하기 어려운 우리 정서 때문이라도 법적 장치로 발명자의 이익을 보호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구에서는 개별 계약 제도가 확립돼 있습니다. 실력만 있다면 높은 연봉을 부르는 것은 물론 특허에 대한 지분, 스톡옵션 등 자기주장을 확실히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조건을 내걸었다간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취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해오고 있다. 그 결과 2001년 개정된 특허법 제40조 1항은 직무발명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하도록 명시 하고 있으며, 2항은 ‘보상금의 지급기준을 대통령령 또는 조례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아직까지 지급기준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
특허청 정성찬 사무관은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보상금 지급기준을 국가가 강제하는 2항은 무리한 조항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며 “결국 회사측이 보상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소송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선진국을 봐도 국가가 법적으로 관여하는 나라가 없고 자본주의체제에서 특허소송은 늘 있는 일이라는 얘기다.
한편 기업들도 최근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제 연구원들도 더이상 침묵하지 않을뿐더러 소송이 벌어질 경우 자칫 파렴치한 기업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법무법인케이씨엘의 김순영 변리사는 “최근 발명소송이 증가하면서 기업들이 발명보상 기준을 마련하느라 부심하고 있다”며 “앞으로는 사원의 노력으로 생긴 이익을 나눌 수 있는 마인드를 가진 기업만이 우수한 인재를 보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서구의 기업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원들의 권리를 인정해주고 있다. 미국 IBM은 연구원들이 특허를 획득하면 예상수익의 일부를 보상급으로 지급한다. MS와 오라클 등 IT 기업들은 매년 수십억원을 포상금으로 내걸며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개인별 연봉도 천차만별이어서 실력있는 과학기술자에게는 최고의 대우가 보장된다.
김준효 변호사는“발명 하나로 수백억원을 번 과학기술자가 나온다면 이공계가 이처럼 홀대받지는 않을 것”이라며“새로운 기술개발로 수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과학기술자가 제대로 대접받는 사회가 돼야 우리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의 특허분쟁은 이런 길로 나아가는데 겪어야할 진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