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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통신 세계적 개척자 백운출

미군 장교에게 수학문제 풀어준 인연

광주과학기술연구원의 백운출 석좌교수(69). 백 교수는 광통신 분야의 개척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석학이다. 백 교수는 미 통신회사 AT&T의 벨연구소에서 22년간 근무했다. 벨연구소는 노벨상 수상자를 11명 배출한 세계적인 연구소다.

백 교수는 이곳에서 현재 광통신 분야의 핵심적인 기술인 광섬유가 실용화되는데 결정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이를 인정받아 1986년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세계적인 석학임을 증명해주는 동연구소의 펠로우로 선정됐다. 또한 미 공학원은 1998년 이미 한국에 돌아온 그를 공학회 펠로우로 선정했다.

1991년에 돌아온 고국에서 백 교수는 광주를 세계적인 광통신 메카로 성장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는 이번 11월에 개원 10주년을 맞은, 호남의 이공계대학원인 광주과학기술원의 제1호 교수다. 지난 10년의 짧은 기간 동안 그는 1호 교수로서 광주과학기술원을 세계적 수준의 광통신 교육연구기관으로 성장시켰다. 그 결과 광(光)주를 진정한 빛의 고장으로 성장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백 교수의 삶은 세계적인 공학자의 삶과는 무관해보였다. 한국전쟁 말에 해양대를 진학했고, 졸업 후 해군장교로 복무했다. 이런 그가 어떻게 세계적인 공학자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를 광통신의 세계로 이끈 빛은 언제부터 비추기 시작했을까.
기자가 그를 찾아갔을 때 테이블에는 본지에 게재할 목적으로 준비해둔 사진들이 나열돼 있었다. 그 중 해군복을 차려입은 흑백사진 한장이 눈에 띄었다.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건가요?”


백 교수는 1961년 6개월간 미 해군기지로 파견근무를 갔다. 사진은 돌아오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찍었다.


“1961년 해군 중위였을 때입니다. 당시 6개월 간 미 로스앤젤레스 해군기지로 파견근무를 나갔어요. 여기에서 내 인생을 바꿀 일이 일어났어요. 그 시작은 식당에서였습니다. 어느날 식당에서 미군 장교가 미적분 문제를 끙끙거리면서 풀고 있었어요. 그런 그에게 다가가 ‘도와줄까요?’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백 교수가 말을 걸었던 미군 장교는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대(UCLA) 야간과정을 다니고 있었다. 그 미군 장교는 전쟁과 가난으로 찌든 한국에서 온 사람이 자신의 수학문제를 풀어준다는데 놀랐다고 한다. 이후 백 교수는 가끔 저녁에 만나 그 미군장교를 도와주기 시작했고, 그 일이 입소문을 타고 주변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미군들 사이에서 백 교수의 능력이 아깝다면서 그를 도와주자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런 얘기가 오고가던 자리에는 해군병원의 안과의사인 중국계 미국인 장교가 있었다. 그 장교가 어느날 한보따리 짐을 들고 백 교수를 찾아왔다. 보따리에는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이하 버클리대), 스탠포드대, 캘리포니아공대의 안내 카달로그들이 들어있었다.

이 대학들은 백 교수에게 매우 생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버드대, 예일대, 프린스턴대가 미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라고 알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미군 장교는 이들 대학이 미국 내 최고 이공계대학이라며 한번 보라고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 일은 백 교수의 성공가도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됐다. 그 덕분에 그는 버클리대에 입학하게 됐다.

“해양대를 졸업하셨던데요, 그곳에 진학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내 고향은 경남 진주입니다. 그곳은 한국전쟁중 격전지라 폭격이 심했어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 날 정도였죠. 1952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그때는 대학갈 경제적 여건도 안됐구요.”

어릴 적 백 교수는 이공계로 진출할 생각이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문학적 취향을 가진 낙천적이고 감수성 많은 소년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를 바꾸게 한 것은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 그는 기술을 갖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긴박감을 느꼈다. 위대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보다 당면 과제인 먹고 살 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공계를 선택한 것이다. 고교 2학년 때까지 문과였던 그는 3학년에 올라가면서 이과로 옮겼다.

바로 대학갈 형편이 못됐기에 졸업 후 부산에서 1년 간 돈을 벌었다. 당시 부산에는 여러 대학이 임시로 옮겨와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멋진 타이틀보다 실리적인 해양대가 끌렸다. 우선 학비가 전액 면제인데다가 졸업 후 진로가 해군장교로 보장돼 있었다.

“버클리대에서 어떤 분야를 전공하셨나요?”

“플라스마유체공학으로 레이더를 연구했어요. 기관과를 졸업한 나로서는 플라스마유체공학이 가까운 영역이었죠. 기관은 기체, 액체, 고온을 다뤄야 하는데 플라스마유체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당시 플라스마공학은 막 시작됐어요. 그래서 물리학과 매우 가까웠고 수학과 물리학이 많이 동원됐죠. 시작단계라 비전도 잘 보이지 않는데다 어렵기까지 하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 분야를 잘 선택하지 않았어요.”

레이더 연구는 백 교수에게 AT&T의 벨연구소로 가는 길을 열어줬다. AT&T는 통신회사로 산하의 벨연구소에서 레이더, 트랜지스터 등 다양한 전자통신 장비가 개발되고 있었다. 그가 박사학위를 받을 즈음 버클리대를 찾아온 벨연구소 리쿠르터에게 채용됐다.

백 교수는 미개척지인 레이더 분야를 전공했던 것이 매우 운좋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누구든 처음에 참여해야 히트를 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야 그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장을 선 사람이 정글을 헤치고 나가기 힘들지만 그 뒤 사람들은 그 사람이 나아가는 길을 따라갈 뿐인 것처럼 말이다. 백 교수는 바로 이 선도적인 참여가 이후 자신을 성공하게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광통신 연구는 언제 시작하셨는지요?”

“벨연구소에 들어가고 1년쯤 지난 즈음이었습니다. 1970년 코닝에서 광섬유를 개발했어요. AT&T가 발칵 뒤집혔죠. 통신회사도 아닌데서 광섬유를 개발했으니까요. 회사는 1-2년 내로 광통신 분야를 쫓아가야 한다며 사람을 모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분야의 전문가는 매우 드물었어요. 그러다보니 레이더도 빛이니까 광학 분야라면서 나도 차출이 됐지요.”

레이더와 마찬가지로 백 교수는 광통신에서도 선두주자로 참여했다. 당시 광통신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이 전세계에서 이뤄졌다. 그는 연구소의 광통신 개발팀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진가를 빨리 발휘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얻었던 셈이다.

백 교수는 자신의 바탕지식인 레이더를 활용해 광섬유를 뽑아내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광섬유는 머리카락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가늘면서도 강도가 높고 투명해야 한다. 이런 조건의 광섬유를 만들어내려면 이전 재료가 되는 광섬유 모제를 2천℃ 이상에서 가열해야 한다.

백 교수는 레이더 빔을 통해 이 온도조건을 만족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세계 최초로 냈다. 그의 광섬유 합성방법은 현재 표준으로 쓰이고 있다. 백 교수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광섬유는 강도와 투명도 면에서도 최고이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광통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낸 공로로 1986년 백 교수는 AT&T의 펠로우가 됐다. 당 시 벨연구소 사장과 악수하는 모습.


“세계 최고의 이공계 대학과 연구소에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요?”

“버클리대도 최고의 인재들만 모이는 곳인데, 벨연구소에는 최고의 최고들만 모였더군요. 여기서 성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지요. 여기서 기죽지 말고 경쟁해보겠다고 맘먹었어요. 전쟁중 역경에서 살아나온 내가 여건이 좋은 이곳에서 당연히 성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백 교수는 집념의 사나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뚫고 나아가야 한다는 집념이 생겼다. 이런 집념은 한국에서 대학때 배운 것이 별로 없었던 그가 버클리대 석박사 과정으로 바로 진학해 무사히 그 과정을 마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리고 벨연구소에서도 다른 사람이 그를 쫓아오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요즘의 과외 공부가 학생들에게 별 효용이 없다고 본다. 공부란 그때그때 단계적으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지 어릴 적부터 준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육은 순조롭게 무리없이 그 단계에 맞게 진행돼야 한다고 본다.

“정상급 공학자가 될 수 있는 노하우는 무엇이었습니까?”

“우선 학자로서 마음가짐과 실력을 갖춰야겠지요. 이와 함께 기회를 잘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최소한 인생을 좌우할 기회가 세번 오고 그 중 하나만 잘 잡아도 성공한다는 얘기가 있죠. 나에게도 역시 세번의 기회가 있었어요. 버클리대 진학. 벨연구소로 진출, 광통신의 연구가 바로 그것입니다. 난 이 세번의 기회를 모두 잘 잡았어요. 그러면서 항상 선발주자로 일했다는 것이 또다른 노하우입니다. 덕분에 30년이 지나도 내 논문이 인용되고 있죠.”

백 교수는 광통신 연구의 탁월한 업적으로 1986년 AT&T의 부사장급인 펠로우가 됐다. 펠로우는 지금까지 한국인으로는 두명뿐이라고 한다. 펠로우는 세계적인 과학자를 증명하는 신분증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 펠로우가 된 후 한국에 이미 들어와 있었던 1998년 공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미 광학회 펠로우가 됐다.

백 교수는 버클리대에서 공부하면서 가끔씩 대학신문에 누구누구가 공학원 펠로우가 됐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자신과는 너무나 먼일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영원히 닿지 않을 것으로 보이던 영예가 이미 그에게 와 있다.

“어떻게 광주과학기술원의 제1호 교수가 됐습니까?”

“1992년 가을에 광주과학기술원의 초대원장인 하두봉 교수가 날 찾아왔어요. 당시 생산기술연구원 부원장이었을 때였죠. 그해 말 생산기술연구원 부원장의 임기가 끝나는데, 그 뒤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나에게 하 교수가 이곳의 1호 교수가 돼달라고 하더군요.”

1991년 백 교수는 새로 개원한 생산기술연구원의 부원장으로 국내로 들어왔다. 그는 이곳에서 광통신을 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로 이유 때문에 새로 시작하는 광주과학기술원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런 그를 하 교수가 세번 찾아왔다. 삼고초려가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1호 교수 자리를 승낙한 것은 아니었다. 세번째 찾아온 하 교수는 끝내 거절하는 백 교수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고 한다. 말씨가 비슷하다면서 말이다. 둘은 고향이 같았다. 이때 백 교수는 고향사람을 설마 못믿겠나 싶었고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백 교수는 1998년 미 공학원 펠로우가 됐다. 그는 공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이미 획득 했다. 이 외에도 그는 다양한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광주과학기술원이 개원 10주년을 맞았는데 소감은?”

“10년 전에는 지금의 모습을 상상도 못했어요. 단지 후발주자인 우리학교가 카이스트와 포항공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이공계대학의 한축이 되길 바라는 맘뿐이었죠. 하지만 지금 광주과학기술원은 세계 수준의 광통신 연구기관이 됐습니다.”

그는 제1호 교수로 부임하면서 정보통신학과장 겸 교학처장직을 맡았다. 이때는 처음부터 광통신을 키운다는 계획을 가졌다. 그는 십중팔구 불리한 상황인 후발대학에게 유리한 점이 뭔지를 고심했다. 그러자 나름대로 좋은 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우선 사람이 많으면 말이 많아 일이 성사되기가 어려운데 광주과학기술원엔 그런 점이 없었다. 처음에는 혼자여서 장비도입부터 교수채용까지 일관성 있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가의 좋은 장비를 들여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맞춰 우수한 교수를 채용했다. 인맥에 관계없이 우수한 교수를 뽑을 수 있었다. 좋은 장비와 우수한 교수가 있으니까 저절로 좋은 학생이 지원했다고 한다. 금새 좋은 연구결과가 나왔다.

그가 생각한 또다른 점은 영어강의와 영어논문이었다. 이 일은 어느 대학에서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교수채용공고에는 영어강의를 할 수 있는 사람만 지원하라고 명시했다. 영어강의는 금새 히트를 쳤다. 좋은 장비 덕분에 연구결과가 좋은데다 논문을 영어로 작성했기 때문에 외국 학술지에 쉽게 낼 수 있었다. 이곳을 졸업하는 학생은 외국 학술지에 대략 10개의 논문을 발표한다. 다른 대학의 경우 두편도 못내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이런 까닭에 광주과학기술원은 광통신 분야에서는 세계 수준의 연구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역사회 발전까지 가져왔다. 광주과학기술원은 광주 광산업의 모체가 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레이저를 발명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찰스 타운스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는 90세 가까운 지금도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첨단과학기술분야가 아니라 우주생명체를 찾고 있지요. 그를 닮고 싶습니다. 평생 연구하고 싶어요.”

백 교수는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도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이미 최고의 성취를 했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목표는 한평생 연구를 하는 것이다. 공학자로서 평생을 살아가겠다며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2003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박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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