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 발표가 있을 즈음이면 많은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바람을 가졌다가 ‘역시나’ 하며 아쉬워한다. 올해도 다를 바 없이 모두들 과학 선진국 출신으로, 미국 국적이 6명에 러시아, 영국이 각각 한명씩이었다.
그런데 지난 4월, 신문에서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보도가 있었다. 어디에서는 우리나라가 5-15년 이내 노벨 과학상 수상이 가능하며, 그 중에서 서울대 교수들이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높다고 한 반면, 다른 신문에서는 서울대 교수들의 논문인용지수가 노벨상 수상자의 절반에 못 미친다며 노벨상 수상은 아직 요원한 꿈이라고 보도했다. 도대체 어떤 말이 맞는 것일까. 과연 국내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할 가능성은 있는 것일까.
경제는 11위, 노벨상은 무관왕
국내총생산(GDP) 규모로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 11번째의 경제 강국이며, 스포츠에서도 올림픽 1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과학도 이만큼 한다면 노벨상에서도 10위권은 아니라도 수상자 한두명쯤은 벌써 나왔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스웨덴 노벨 위원회 자료에 의하면 2003년 현재까지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낸 나라는 모두 27개국이다. 올해까지 총 4백95명의 수상자 가운데 미국 국적이 2백11명으로 단연 우위였으며, 그 뒤를 영국 73명, 독일, 64명, 프랑스 26명이 따르고 있다. 이웃 일본은 수상자 수에서 9명으로 10위를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낼 수 있을까. 역대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을 분석해보면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몇몇 대학과 연구기관 출신들이 노벨 과학상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졸업생 중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대학은 미국의 14개 대학, 영국의 3개 대학, 네덜란드의 1개 대학(4명 이상 수상)이었다. 우수한 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다는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다.
또 수상 당시 재직하고 있던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도 미국이 13개, 독일 4개, 영국 3개, 프랑스 2개, 스웨덴 1개(5명 이상 수상)로 위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 대학에 우리나라 우수 학생들을 유학 보내는 것이 노벨상 수상을 앞당기는 일일까. 최근 그렇지만은 않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자연대는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낼 수 있을지를 알기 위해 역대 수상자들을 분석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낼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당장 나올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노벨상 척도 ‘논문인용도’
최근 대학에선 논문수가 과학자들의 주요한 평가기준이 되고 있다. 세계과학논문 인용지수(SCI)에 등재된 학술지에 몇편을 발표했다는 보도가 잇따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SCI 논문수만으로는 그 연구가 얼마나 중요하며 나아가 과학자가 노벨상을 탈만한 사람인지를 알 수 없다. 과학자가 어떤 연구를 수행한 후 그 결과가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인용될 때 과학계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며, 이 결과가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보통 노벨상 수상자들은 어떤 연구결과를 발표한 다음 평균 18년 동안 다른 과학자들이 그 결과가 인용되다가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수상하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ISI사는 지난 45년간 출간된 논문의 인용지수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는데, 지난 25년간의 일정 수 이상의 인용지수(총인용지수)를 가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는 13명, 화학상 수상자는 33명이었다. 이들의 평균 인용지수는 물리학상 수상자의 경우 5천5백8회, 화학상의 경우 4천8백71회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 인용지수를 가진 과학자가 있다면 조만간에 노벨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현재 5천회 이상의 인용지수를 가진 물리학자는 전세계적으로 1백90명이며, 화학자는 1백71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4.7%, 8.8%가 노벨상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국내에서 이 정도 논문 인용지수를 가진 과학자는 없다. 5천회 바로 밑의 기준은 1천회로 보는데 다행히도 여기엔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 서울대 16명, 포항공대 13명, 한국과학기술원(KAIST) 9명의 교수가 이 기준을 통과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인용지수 1천회 이상의 서울대 교수 평균은 물리분야가 2천3백69회, 화학분야가 1천6백23회였다. 이 사실을 두고 노벨상 수상자의 논문 인용지수의 절반에도 못 미치므로 우리나라 과학자가 노벨상을 타는 일이 요원해 보인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무조건 비관할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 이들 과학자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부족한 부분을 채울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5-15년 내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이런 전제 하에 나온 말이다.
또 우수한 학생들이 유학을 가지 않고서도 국내 대학에서 노벨상의 꿈을 키울 조건도 만들어지고 있다. 서울대의 자료에는 외국의 유명 물리학과와 국내 물리학과를 비교한 내용이 들어있다.
비교 대상이 된 학과들은 지난해 ‘미국 뉴스 앤 월드 리포트’지의 조사 결과 미국내 물리학과 경쟁력 2위를 차지한 하버드대, 산타바바라 소재 캘리포니아대(UCSB, 10위), 브라운대(28위), 인디아나대(32위) 등이다. 이들 대학 물리학과 교수들 가운데 논문 인용지수가 1천회 이상인 사람들의 비율을 조사한 결과, 하버드대가 70%로 1위였으며 그 뒤를 UCSB(58%), 브라운대(41%), 서울대(32%), 인디아나대(29%)가 이었다.
문제는 인용지수의 질. 서울대 국양 교수(물리학부)는 “인용지수가 1천회가 넘는다하더라도 2백회 5개가 모인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한 논문으로 1천회 정도의 인용지수를 보여야 세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으며 나아가 노벨상까지 넘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국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한 논문으로 인용지수가 1천회를 넘는 과학자가 10여명 정도 된다. 일본의 노벨과학상 3년 연속 수상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국을 찾는 과학자들
한때 노벨상 수상자의 연구실에 가야지 노벨상을 탈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아시아권 수상자가 적은 것도 그 때문이라는 설명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또 수상의 영예를 차지한 아시아 출신 과학자들도 대부분 노벨상 수상자나 후보군에 들어가는 과학자들의 지도를 받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화의 물결은 국가간, 대학간 정보 격차를 무너뜨리고 있다. 최근 국내외에서 우리나라 젊은 과학자들이 유명한 과학저널에 표지논문을 게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예전에는 외국에서 알지도 못하던 지방대 교수들도 많다. 이제 국내에서도 좋은 논문만 발표하면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이 공동연구를 하자고 알아서 찾아온다고 한다. 또 창의적 연구진흥사업과 같이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연구에 대한 지원이 이뤄진 점도 젊은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제대로 된 인용지수를 쌓아가는 과학자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한때 노벨상 후보 추천권을 가질 수 있는 대학과 연구기관을 육성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후보 추천권이 있다고 해서 바로 노벨상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벨상 위원회는 전세계 4천여 기관에 후보 추천을 의뢰, 그 가운데 약 2백50-3백명을 선정한 다음 전문가들의 면밀한 심사를 거친다.
과학자들은 후보 추천권을 갖기 위해 대학과 연구기관에 지원하는 것보다는 우수한 과학자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연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노벨상 후보가 될만한 사람들을 키워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들이 속한 연구기관도 후보 추천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란 말은 과학계에 가장 적합한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