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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제2회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의 끼,끈,꾀,꿈

변대규


변대규




“황당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디지털 셋톱박스 소매시장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주)휴맥스의 변대규 대표이사는 자신의 무기를 ‘황당하리만큼 무모한 도전정신’이라고 말한다.

변 사장은 박사 학위를 받고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동료, 후배들과 벤처 창업을 결의했다. 하숙생 신분으로 기술신용보증기금을 두드려 주택담보 하나 없이 창업자금을 구했으며, 창사 초기 ‘소니에의 도전’이라는 신문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는 아무리 회사가 어려워도 소니 같은 대기업을 이끄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공부를 할 때나 기업을 할 때나 원하는 목표를 달성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하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른 목표를 세우게 된다는 것. 그는 청소년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것도 도전의식이 없기 때문으로 본다. 그가 보기에 이공계에서는 일등부터 꼴찌까지 저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자격증을 따는 소수만이 성공하는 다른 분야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도전의식으로 가득찬 변 사장이지만 그의 좌우명은 너무도 평범한 ‘깊이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자’다. 그를 최고의 벤처기업가로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늘 처음엔 성적이 중간 정도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쯤 되면 많이 향상됐습니다.” 마찬가지로 휴맥스도 갑자기 화려해졌다가 사라지는 회사가 아니라 한단계 한단계 완벽하게 다지면서 갈수록 발전하는 회사라는 것이다.

그가 대학에서 제어계측과를 선택한 것도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과학기술이 세상에서 큰 힘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만은 있었다는 것. 역시 대학 입학 때보다 졸업 무렵 성적이 더 나았고, 원하던 대로 박사학위를 땄지만 변 사장은 자신이 교수나 엔지니어가 될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제어계측의 기본은 수학인데, 후배 한명이 너무 잘했어요. 95%까진 따라가겠는데 더이상은 안되더군요. 그래서 기술을 잘 이해하는 경영자가 오히려 내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변 사장은 경영학 공부를 시작했다. 책으로 만난 피터 드러커 교수가 그의 경영학 스승. 또 조직과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 인문학 서적들도 파고들었다. 이해가 안되면 무조건 반복해서 읽어 결국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경영자로서 그의 또다른 자질은 늘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줬다는데 있다. 변 사장은 어린 시절 전학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실시된 반장 선거에서 당선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처음 보는 친구들도 왠지 믿음이 간다고 느낄 만큼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창업자금 하나 없는 그를 연구자로 잘나가던 동료, 후배들이 선뜻 따라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변대규 사장은 1989년 창업한 벤처 1세대다. 공정자동화기기를 목표로 했다가 우연히 노래방 자막 처리기 개발에 뛰어들면서 CD가요반주기와 디지털 셋톱박스를 개발했다. 휴맥스는 현재 이 분야 디지털 셋톱박스 소매시장에서 40%에 가까운 시장점유율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휴맥스도 IMF경제위기가 한참이던 1997년 위기를 맞았다. 독일의 한 방송사와의 대량 수출계약이 파기됐고 국내 거래처가 부도처리되면서 22억원이 고스란히 날아가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이때의 경험은 무척이나 소중합니다. 당시 공원에서 혼자 고민하면서 그때까지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스스로 깨우쳤습니다.” 변 사장은 도전과 실패를 겪은 인생은 깊이가 있다고 본다. 자신이 경영에 대해 뭔가 배운 것도 휴맥스가 잘나갈 때가 아니라 어려울 때였다는 것이다.

휴맥스도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다른 벤처기업들처럼 사옥과 공장을 속속 세우는 등 확장 전략을 펼쳤다. 변 사장은 생산부문을 외주로 돌리고 휴맥스는 제품개발과 마케팅에 주력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해나갔다. 휴맥스 기술진들은 바이어가 이런저런 기능을 요구하면 근처 호텔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맞춰주는 근성으로 시장을 개척해나갔다.



세계 디지털 셋톱박스 시장은 필립스, 노키아, 톰슨 등 거대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방송사들은 이들 회사로부터 디지털 셋톱박스를 대량 구매해 소비자들에게 직접 공급한다. 전체 시장 가운데 80%가 여기에 해당한다.

휴맥스는 대신 20%에 해당하는 개인 소매 시장에 초점을 맞췄다. 휴맥스는 지난해 매출 3천5백80억원, 영업이익 9백90억원을 기록했으며, 미국, 일본, 독일, 영국, 인도 등지에 현지 법인을 갖고 있다.

변 사장은 최근 휴맥스의 미래전략을 디지털 가전 분야로 정했다. 이에 따라 휴맥스는 디지털TV의 경우 디지털 지상파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기능이 내장된 LCD TV를 출시해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지역에 수출할 예정이며, 향후 PDP시장에도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2006년까지는 동유럽과 중국에 자체 생산라인을 갖춘다는 방침이며 이를 위해 연구-생산-마케팅 분야에 5백-6백억원을 투입할 것이라고 한다.

변 사장은 인생의 격을 종종 얘기한다. 그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인생을 꿈꾼다. 천재과학자나 예술가와 같은 격은 되지 않더라도 미래 사람들이 먹고 살 대기업을 만드는 것이 자신이 갈 수 있는 최고의 인생이란 것. 인생을 건 그의 도전을 기대해보자.

손 욱


손욱




손 원장이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63년. 전쟁 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며 경제 개발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당시 기술자들은 자부심이 대단해 회사 바깥에서도 근무복을 입고 다녔어요. 기술자들은 결혼 상대 1순위로 꼽혔지요.”

공대생이 된 그는 졸업 뒤 한국비료공업에 입사해 3년 동안 현장 근무를 했다. 지방 근무가 고달프기는 했지만 모든 기계를 다 다뤄보았다. 몇년 뒤 삼성전자로 옮겨 30년 가까이 삼성의 기술경영자로 잔뼈가 굵은 그에게 신입사원 초년병 시절 현장에서 얻은 기계에 대한 지식은 평생의 밑천이 되고 있다.

그가 현재 일하는 곳은 세계 최고의 기술이 나온다는 삼성종합기술원. 삼성전자 기흥단지에 가면 아름다운 정원에 우뚝 선 현대식 건물을 볼 수 있다. 15년 전 고 이병철 회장은 기술원에 자신의 집무실을 만들고, 고급 기술자 집단을 키우고자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준공 한달 후 이 회장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손욱 삼성종합기술원장은 첨단기술에 대한 이 회장의 유지를 이어 8백50명의 연구진을 이끌고 있다. 5-10년 뒤 삼성 계열사가 먹고 살 첨단기술을 개발하고 계열사가 해결 못하는 기술적 난제를 푸는 게 그의 일이다.



삼성종합기술원은 민간 최대의 연구소이고 전체 연구원 중 3백80명이 박사지만 정작 원장은 대학 졸업장밖에 없다. 하지만 34년 동안 기술개발, 기획, 전략,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그의 경험과 해박한 지식은 박사들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 “박사가 되면 시야가 좁아 기술융합시대에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 있어요.”

손 원장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이 있듯이 수많은 첨단기술을 어떻게 꿰어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만들 것인지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최근 많은 벤처기업의 몰락도 기술은 있지만 기술경영 능력 부족으로 기술이 제 가치를 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츠와 기 소르망도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취약한 기술경영 능력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한 점을 그는 상기시킨다.

그는 삼성의 ‘기획통’, ‘혁신통’으로 통한다. 1980년대 중반 삼성전기의 기술연구소장으로 일할 때 무려 20여개의 신규사업을 성공시켜 매출이 수조원에 이르는 국내 최고의 종합부품회사로 만들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삼성SDI 대표이사로 일할 때는 ‘프로세스혁신’과 품질혁신, 고객만족을 달성하기 위해 개발된 21세기형 기업경영 전략인 ‘6시그마’를 국내 최초로 도입해 회사의 경영 위기를 돌파했다. 6시그마의 한 예는 불량품을 10의 6제곱인 1백만분의 1 단위로 줄인다는 것이다.



4년 전 삼성종합기술원장이 된 그는 현재 기술원도 혁신중이다. 좋은 기술을 가진 전문가는 많으나 이들이 협력해 시너지를 내는데는 취약하다고 본 것. 그래서 기술경영 교육을 대폭 강화하고 경영품질혁신 방식인 ‘6시그마’를 연구개발 분야에 처음 도입했다. 또 연구원 1인당 10명의 해당 분야 최고 연구자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토록 했다.

현재 기술원 연구원의 연평균 교육시간은 1백시간. 1인당 교육비는 2백50만원으로 미국의 유수한 기업인 GE나 시스코의 교육비를 능가한다. 삼성의 전자제품이 세계 최고가 된 것도 이런 체계적인 기술관리 시스템 덕분이다.

그의 저력은 왕성한 독서에서 나온다. 이공계 출신이면서도 그만큼 해박한 역사지식과 식견을 갖고 있는 인물을 찾기 힘들다. 그의 운전기사는 “차에서 단 한번도 자지 않고 책을 읽는 분은 처음 본다”고 말한다. 특히 경영과 역사책을 많이 본다. 기획부서에서 일할 때는 일본 마쓰시타의 기업경영에 대한 책을 1백50권이나 읽었다. ‘전통 속의 첨단공학’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가끔 “책을 몇가마니 읽었느냐”고 물어 부하 직원들을 질리게 한다.



그의 별명은 흔들리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신념대로 이루어낸다고 하여 ‘흔들바위’. GE의 신화를 이룩한 기술경영 CEO 잭 웰치에 비유해 ‘한국의 잭 웰치’로도 불린다. 그는 GE의 경영품질혁신 방식인 6시그마를 확산시켜 ‘6시그마의 전도사’란 별명도 갖고 있다. 그는 서울대에 개설한 기술경영전략 과정을 통해 올봄부터 대학에도 6시그마를 전파하고 있다.

그의 꿈은 21세기에는 한국을 기술 강대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은 15세기 세종 때, 18세기 영·정조 때에 이어 3백년 만에 다시 민족 중흥기를 맞이했다고 보는 그는 “지금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잠재된 능력과 가능성을 발휘할 최적의 시기”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각해 그는 정말 걱정이 태산 같다. 그래서 초등학교까지 찾아다니며 아이들에게 과학의 꿈을 심어주고 있다. 지난해부터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과 함께 용인 지역 17개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과학실험교실을 열고 있는 것.

“과학기술자의 노력에 힘입어 소득 1만달러 시대를 열었지만 그 주역이 누구인지를 한국 사회는 잘 모르고 있다”는 그는 “청소년이 주역이 될 10-20년 뒤에는 세상이 많이 달라져 과학기술자야말로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인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재웅


이재웅




국내 벤처부호 1위의 성공한 사업가답지 않게 이재웅 사장은 수줍음이 많다. 시원시원하고 호기있게 말하기보다는 차근차근 조용히 얘기하는 스타일이다. 대부분의 공대출신 과학자들처럼 그도 역시 자신의 얘기를 드러내 자랑하는 일에 익숙지 않지만,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힘은 수줍음 아래 가려진 묵직함에 있다.

물론 그 동안엔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는 석사학위까지 마친 전산과학을 중단하고 전공을 바꿔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또 창업을 위해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하기도 했다. 변화와 도전이 포함된 복잡한 여정이었지만 그가 시작한 인터넷 사업은 IMF경제위기 속에서도 꾸준히 외길을 걸었다.

그는 무뚝뚝하지만 드러나지 않게 꾸준히 변화를 모색한다. 그가 이끄는 다음커뮤니케이션도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꾸준히 변화를 겪었다. 다음은 초기에 인터넷 문화공간을 표방하며 사이버 전시관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95, 한국패션넷, 광주비엔날레 인터넷 중계 등을 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러다가 한메일 서비스로 사업모델을 다각화하고, 지금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회사의 성격도 여러번 바뀌었지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문화공간’이라는 다음의 모토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관통하는 핵심이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그는 부모님에게서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개인용 컴퓨터로 출시된 애플컴퓨터였다. 마냥 신난 그는 밤새는 줄도 모르고 컴퓨터의 마력에 푹 빠져들었다. 핀란드에서 리누스 토발즈가 외할아버지의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며 새로운 운영체제 리눅스의 꿈을 가졌던 것처럼, 그에게도 컴퓨터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줬다. 이 때문일까, 그는 자연스럽게 공대로 진학했고 컴퓨터를 다루는 전산과학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었다. 인지과학으로 전공을 바꿔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는 새로운 모험에 나섰다.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늘 한결같은 부모님의 든든한 후원은 큰 힘이 됐다. 모두 공대를 졸업한 부모님은 그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것이다.

인지과학은 지식이 기억의 내부에서 어떻게 구조화되는지를 밝히는 학문으로 인지심리학, 언어학, 인공지능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는 학문이다. 때문에 다양한 학문 영역을 두루 공부해야 했는데, 다행히도 어려서부터 읽은 다양한 책들이 큰 자산이 됐다.

게다가 파리의 문화는 이 사장의 사고를 유연하게 해줬다. 당시 파리에서는 IT 분야의 급속한 발달로 인터넷이 생활 속에 파고들고 있었다. 앞선 세상에서의 새로운 경험은 비로소 그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다. 그동안 둘러온 길은 사람의 향기를 그리워한 그가 사람 사는 세상을 찾아가는 여행이었다.



“인터넷은 도구를 뛰어넘는, 변혁 그 자체입니다.” 이 사장은 인터넷을 이렇게 표현한다. 새로운 물결이 밀려오는데, 기존의 사고에 안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전산과학을 하면서 정보기술의 기본 원리를 충분히 습득했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분야의 일을 할 수 있을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전산과학은 단순한 학문에 그치지 않고 미래 그 자체였다. 귀국해서 세운 회사는 그렇게 사업을 개시했다. 문화를 콘텐츠로 하고 인터넷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었다. 1995년 4월 처음으로 오픈한 사이버 갤러리 ‘이미지, 이미지전’은 하루에 1만명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성공적인 시작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창업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익을 내야만 했다. 아직은 시작단계인 인터넷 시장에서 뚜렷한 수익모델을 찾아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우선 사람이 모이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메일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메일 서비스는 언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는 무료 개인 전자메일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밤새워 서비스를 점검하는 일이 잦았지만 행복한 나날이었다. 지금 다음은 외국의 대형 사이트를 제치고 포털 사이트 분야에서 굳건한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인터넷의 변화와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었을까? 그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산과학을 통해서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방법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 기술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됐기 때문에 그 기반으로 비전을 세울 수 있었던 거죠.”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체 게바라)

그는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 전설적인 남아메리카 혁명가의 삶을 다룬 ‘체 게바라 평전’을 꼽는다. 그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사회에 관심을 갖고 여러 분야의 책을 읽으며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을 큰 자산으로 생각한다. 때문에 요즘에도 힘들거나 지칠 때면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그 속에서 해법을 찾는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거둔 그는 줄곧 한 우물을 팠다는 것을 강조한다. 프랑스에서 인터넷을 처음 접하고는 지금까지 8년 동안 줄곧 외길로만 승부를 걸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도,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좋아서 취미로 하던 일을 좀더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어서 사업에 뛰어들었다니, 그 꾸준함의 결과가 이런 열매로 맺어진 것이리라.

인터넷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새로운 끈이다. 그 끈을 씨줄로 날줄로 이어주는 튼튼한 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 그의 희망이다. 그것이 바
로 역동적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미래형 사회, 그가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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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완 기자
  • 안은영
  • 사진

    박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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