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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경고음 내는 땅다람쥐

흡혈박쥐가 피를 나눠먹는 이유

어젯밤 칠레산 와인의 향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다윈의 식탁 둘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이타적인 행동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열띤 토론이 전개될 것이다. 이 쟁점은 좀더 전문적으로는 “자연선택이 어떤 수준에서 작용하는가?”라는 물음이 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1976)라는 책 한권으로 진화생물학 대가의 반열에 오른 D팀의 주장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어떻게 이타적인 개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역설했다. 반면 굴드는 자연선택이 궁극적으로 유전자의 수준에서 작용한다는 도킨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닐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비판해왔다.

오늘 D팀에는 도킨스를 따라 유전자선택론을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는 리브가 참여했고 G팀에는 집단선택론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데이빗 윌슨이 토론자로 합류했다. 어제 사회를 본 소버는 데이빗 윌슨과 함께 집단선택론을 강력히 주장해온 당사자이기 때문에 토론의 공정성을 위해 오늘은 생물철학자 스티렐니가 마이크를 잡는다.
 

(그림) 집단선택론의 모형


사회자(스티렐니): 반갑습니다. 오늘의 사회를 맡은 킴 스티렐니입니다. 어제는 자연선택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하는지에 관해 열띤 토론을 펼쳤습니다. 공지된 대로 오늘은 자연선택에 대해서 한번 더 논의를 하되 주로 자연선택의 단위 문제에 초점을 맞춰볼까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연선택이 과연 어느 수준에서 작용하는가? 유전자인가, 개체인가, 아니면 집단인가?’라는 물음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물음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면 문제를 이렇게 바꿔보죠. ‘도대체 협동 행동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가?’라고요. 그래도 낯설게 느껴지신다면 이렇게 묻겠습니다. ‘왜 당신은 남을 돕습니까?’

사실 남을 돕는 행동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은 다윈 자신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많은 육식 동물, 가령 늑대나 사자, 침팬지 등은 협동을 통해 사냥을 하고 고기를 나눠먹습니다. 피를 구하는데 실패한 흡혈 박쥐는 자기 숙소에 있는 다른 동료에게서 피를 얻어먹습니다. 여러 종의 새는 협동적으로 자식들을 돌봅니다. 심지어 자기 자식 낳기를 포기하고 평생 동안 여왕개미를 섬기는 암컷 개미와 같은 극단적 행위도 있습니다. 모두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고 남을 돕거나 남과 협동하는 행동들입니다. 왜 이렇게 손해볼 만한 짓을 할까요. 이런 행동들은 도대체 진화론적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오늘의 주제는 협동의 진화에 관한 것입니다.

도킨스(D팀): 사실 ‘피범벅이 된 이빨과 발톱’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경쟁만큼은 아닐지라도 생명의 협동은 자연계에 꽤나 널리 퍼져있는 현상입니다. 게다가 자연선택이 기본적으로 개체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면, 자기 자신의 적응도를 훼손하면서까지 다른 개체와 협동하는 듯 보이는 현상은 분명히 설명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지요.

실제로 다윈은 많은 진사회성 곤충(가령 개미나 벌, 말벌 등)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자기 희생적 행동이 자신의 자연선택 이론에 위협이 될까봐 전전긍긍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협동의 진화에 관한 물음이 다윈 이후로 진화생물학의 중심에 자리잡아왔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못됩니다.

사회자: 그렇다면 다윈 이후로 어떤 설명들이 제시됐나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도킨스(D팀): 20세기 전반에 수행된 협동에 관한 연구들은 많은 양의 경험적 자료를 축적하긴 했지만 불행히도 협동이 어떻게 진화하는지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조류학자 에드워즈 식의 엉성한 집단선택 이론이 널리 퍼져있었죠. 예를 들면 ‘왜 같은 종의 맹수들은 죽기살기로 서로 싸우지는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에 진화생물학자 윌리엄즈는 ‘집단을 위해’ 존재하는 형질은 자연선택에 의해 개체군 내에서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때문에 그 형질이 진화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집단선택에 의해 설명됐던 협동 사례들이 개체 수준에서 작용하는 자연선택 과정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음을 자세히 보여줬습니다.

리브(D팀): 잠시 화면을 봐주시겠습니까(왼쪽 그림). 미국의 저명한 만화가 랄슨은 이 한컷의 만화를 통해 협동이 왜 일어나기 어려운지를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줬습니다. 모두가 줄줄이 강물 속에 빠져 죽는 상황에서 맨 마지막에 튜브를 두르고 강물에 뛰어드는 얌체 나그네쥐를 보십시오. 이 배신자는 저런 상황에서 가장 큰 이득을 챙기는 놈이 되지 않겠습니까. 생명의 진화에서 배신의 유혹만큼 달콤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협동의 진화는 분명 수수께끼입니다.

사회자: ‘이기적 유전자’는 바로 이런 수수께끼를 풀어보자고 쓰여진 책 아닙니까?

도킨스(D팀): 그렇습니다. 저는 집단선택론에 대한 윌리엄즈의 비판을 적극적으로 계승해 자연선택이 개체보다는 오히려 유전자의 수준에서 작용하며 동물의 협동 행동은 유전자가 자신의 복사본을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한 전략으로서 진화해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유전자의 눈 높이에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동물의 수많은 이타적 행동은 겉모습으로만 이타적일 뿐 유전자의 시각으로는 되레 이기적입니다.

이렇게 뒤집어보면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이며 운반자일 뿐입니다. 주체가 인간 개체에서 유전자로 바뀌고 마는 셈이죠. 하지만 엄밀히 말해 저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자연·인간·사회를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전달해준 해설가였지 혁명적 발상의 최초 진원지는 아니었습니다. 이 공로는 다윈 이후의 가장 뛰어난 이론생물학자라고 평가받던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해밀턴에게로 돌아가야 마땅합니다. 지금 화면에 나오는 ‘해밀턴의 규칙’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단순합니까. 하지만 동물의 수많은 행동이 이 규칙만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정말 우아하고 강력한 공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토론회를 갖게 된 것이 결국 그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는군요.

사회자: 비전문가들을 위해 해밀턴의 규칙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리브(D팀): 제가 해보죠. 만일 두 사람(톰과 제리)이 있는데 톰이 제리를 도와줌으로써 손해 c를 입었고 반대로 제리는 이득 b를 봤다고 해봅시다. 여기서 r값은 톰의 유전자를 제리도 가질 확률로서 흔히 ‘유전 연관도’라 불립니다. 예컨대 둘 사이의 관계가 형제·자매인 경우에는 0.5, 친부모 자식사이에도 0.5, 조카인 경우는 0.25, 사촌인 경우에는 0.125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톰이 제리를 도와주게 만든 유전자가 개체군 내로 퍼지려면 ‘r×b ― c >; 0’이라는 조건이 만족돼야 합니다. 이게 바로 해밀턴의 규칙이 뜻하는 바입니다.

도킨스(D팀): 예를 들어 물에 빠진 친척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게 만드는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해봅시다. 1명의 친척을 위해 물에 뛰어들어 죽는다면 이타적 행동을 일으킨 그 유전자는 이 행동으로 인해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2명 이상의 형제(또는 자매), 4명 이상의 조카, 8명 이상 사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해밀턴의 규칙은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유전자가 개체군 내로 확산될 것을 예측합니다. 바로 이 점이 개체나 집단의 수준에서 이타적 행동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간과한 부분입니다. 개체는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본을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 고안해낸 하나의 장치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니까요!

사회자: 그러고 보니 20세기초의 전설적 생물학자 홀데인이 언젠가 선술집에서 “나는 2명의 형제나 8명의 사촌의 생명을 위해 목숨을 던질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 유명한 일화가 생각나는군요.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기적 유전자 이론의 기세에 눌려있던 집단선택 이론이 최근에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는 것 같은데요. 안 그렇습니까 윌슨 교수님?

데이빗 윌슨(G팀): 간혹 저를 어제 토론자이셨던 에드워드 윌슨 교수인 줄 착각하고, “드디어 윌슨 교수가 집단선택론자가 됐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모두 웃음). 저는 하버드 대학에 연구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 대학에 계신 에드워드 윌슨과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그건 그렇고, 저는 앞에 계신 도킨스 교수가 이타성의 진화와 자연선택의 단위 문제에 대해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연선택은 유전자 수준에서 작용합니다. 하지만 개체와 집단의 수준에서도 작용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요?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한 개체군 내에서 이타적인 놈들은 이타적인 놈들끼리 이기적인 놈들은 이기적인 놈들끼리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고 합시다. 중국어로는 이런 현상을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부른다지요. 이렇게 되면 이기적인 개체들로 인한 전체 집단의 붕괴를 막을 수 있어서 결국 이타성이 진화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가 자연선택의 유일한 단위라고 주장하는 도킨스 교수는, 집단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막고 협동을 강제하는 이런 집단선택의 메커니즘을 무시한 셈입니다.

사회자: 그런데 윌슨 교수님, 언뜻 보아서는 교수님의 집단선택 메커니즘이 1960년대까지 유행했던 집단선택론과 별 차이가 없어보이는데요?

데이빗 윌슨(G팀): 그렇지 않습니다. 화면을 한번 보시겠습니까(그림). 왼쪽 그림은 1960년대까지의 집단선택 모형이고 오른쪽은 저와 소버 교수가 주장하는 새로운 집단선택 모형입니다. 왼쪽 그림을 보세요. 어떤 개체군에 이기적인 개체 하나만 있어도 세대가 여러 번 바뀌면 개체들이 모두 이기적인 놈으로 변해 결국 개체군이 소멸하고 말죠. 이런 상황에서는 랄슨의 나그네쥐에서와 같이 이타성이 진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른쪽 그림은 뭔가 달라요. 거기서는 이기적인 놈들은 이기적인 놈들끼리 이타적인 놈들은 이타적인 놈들끼리 만나 번식을 한 후에 혼합단계에서 한번 섞인 다음, 다시 새로운 집단을 이뤄 번식하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세대를 거치면서 개체군 내에서 이타적 개체들이 점점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집단선택에 의한 이타성의 진화입니다.

굴드(G팀): 저도 기본적으로 윌슨 교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윌슨 교수가 생명체의 다양한 수준, 예컨대 유전자, 개체, 집단의 모든 수준들에서 자연선택이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계시다면, ‘집단선택론’이라는 용어보다는 오히려 ‘다수준 선택론’이 더 낫지 않을까요?

데이빗 윌슨(G팀): 좋은 지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요즘 그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다닙니다.

굴드(G팀): 저는 한발 더 나아가서 생물 종의 수준에서도 자연선택이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요. 종이 갖고 있는 특성들 중 어떤 것들은 그 종을 멸절의 길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다른 특성들은 오히려 그 종을 더욱 번성케 합니다. 예를 들어 수많은 변이들로 구성돼 있는 종이 있다면 그 종은 이런 특성 때문에 그렇지 않은 종에 비해 환경 변화에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구성원들이 넓게 분포돼 있는 종은 좁은 서식지에서만 사는 다른 종에 비해 변화에 대해 완충 능력이 더 뛰어나 멸종 위기를 더 잘 견뎌낼 수 있습니다.

리브(D팀): 그건 아닙니다! 종 수준의 선택은 다른 집단 수준의 선택하고도 성격이 다르거든요. 집단 수준의 선택에서는 구성원의 배신이 늘 문제가 됩니다만 종 선택의 경우에는 그런 배신의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굴드(G팀): 음,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어쨌든 유전자 수준을 넘어서는 상위 수준들에서 자연선택이 엄연히 작용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도킨스(D팀): 사실 저도 그 점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방금 윌슨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아주 특수한 조건이 만족될 때에만 집단 수준에서 자연선택이 작용합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유전자뿐입니다. 제가 유전자를 ‘불멸의 코일’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유전자는 복제의 단위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선택의 단위죠. 개체나 집단은 기껏해야 그 유전자를 운반하는 ‘운반자’에 불과합니다.

리브(D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윌슨의 선택 모형은 그것이 집단이든 다수준이든 상관없이 수학적으로 보면 도킨스 교수의 유전자선택론으로 포섭될 수 있습니다. 윌슨의 ‘집단’을 개체보다 상위 수준에 존재하는 ‘운반자’로 간주하면 그만이니까요.

데이빗 윌슨(G팀): 물론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형질이 진화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만 맞는 주장입니다. 자연선택의 과정에 대한 물음, 즉 ‘그 형질이 어떻게 진화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도킨스 교수의 유전자선택론과 저의 다수준선택론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바닥에 정지해 있는 장난감 자동차를 양쪽에서 민다고 칩시다. 만약 왼쪽에서 미는 힘인 5N이고 오른쪽에서 미는 힘이 10N이라면 자동차는 오른쪽에서 5N의 힘을 받은 듯 굴러갈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보고 ‘자동차가 5N의 오른쪽 힘을 받고 왼쪽으로 굴러간다’고 말한다면 이건 분명한 착각입니다.

저는 집단 ‘내’의 구성원에게 작용하는 자연선택의 힘과 집단들 ‘사이’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의 힘을 모두 고려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리브(D팀): 처음에는 개체나 집단이 유전자를 운반하는 운반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으실 겁니다. 수많은 사례가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선택에 의해 이타적 행동이 진화했다고 설명되는 동물은 개미나 벌 등의 사회성 곤충만이 아닙니다. 가령 땅다람쥐(Spermophilus beldingi)는 독수리와 같은 포식자가 주위에 나타나면 경고음을 내곤 하죠. 이 경고음을 듣고 다른 땅다람쥐들은 곧 피신하지만 정작 경고음을 낸 자신은 포식자의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이타적 행동이 진화했을까요? 코넬대의 행동생태학자 셔먼 교수는 이런 경고음이 ‘친척들’을 위험에 잘 대처하도록 돕기 위해서 진화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이 다람쥐의 경우에 수컷은 성장한 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비친족 집단을 이루고 사는데 비해 암컷은 계속적으로 친족 집단 속에서 지냅니다. 그런데 실제로 관찰을 해보니 수컷 다람쥐보다는 암컷이 더 자주 경고음을 냈죠. 즉 수컷은 경고음을 내봤자 자신의 친족이나 자식에게 별 도움이 안되지만 암컷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암컷이 더 자주 경고음을 냈던 것이죠. 땅다람쥐의 이런 이타적 행동은 유전자선택 모형으로 아주 잘 설명됩니다.

굴드(G팀): 저도 땅다람쥐에 대한 셔먼의 연구 결과는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에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간에게는 소위 문화라는게 있죠.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 조종을 당한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러면 내가 이렇게 토론회에 나와 떠드는 것도 내 속의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본을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어떤 원리가 동물에게 모두 적용된다고 해서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확장·적용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봤지만 인간에 관해서는 책 전체 분량의 10분의 1 정도도 할애를 안 하셨더군요. 그래 갖고서야 어떻게 유전자선택론이 인간에게도 잘 들어맞는다고 설득하시겠습니까. 데이빗 윌슨 교수의 최근 주장처럼 인간의 특성(도덕성과 종교성)은 집단선택에 의해 진화했다고 봐야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도킨스(D팀): 미안합니다만 말은 똑바로 합시다. 저는 그런 공수표를 날린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 책에서 영감을 얻은 진화심리학자들이 인간의 경우에도 동물에서와 같은 몇가지 진화원리들이 잘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줬죠. 딱 한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캐나다의 진화사회심리학자 데일리와 윌슨 교수는 1974-1983년 동안 캐나다에서 일어난 자식 살해 사건들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계부모에 의한 자식 살해 위험이 친부모에 의한 위험보다 엄청나게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죠. 두살 이하 아기의 경우에는 무려 70배나 차이가 납니다. 이런 놀라운 현상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이기적 유전자 이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유아 살해는 자신의 유전자가 섞이지 않은 자손에게 엄청난 양의 양육 투자를 하기 곤란한 경우에 부모에 의해서 벌어지는 비극일 수 있습니다.

굴드(G팀): 자꾸 그런 결론을 내리니까 제가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비판하는 것 아닙니까.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얼마나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 고작 이기적 유전자로 설명하고 맙니까? 사회과학자로서 기본이 안돼 있는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려니 참 답답하네요.

사회자: 토론의 열기가 뜨겁다 못해 다소 험악하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이거 어쩌죠? 약속한 시간이 다 됐습니다. 이타적 행동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에 관한 오늘의 토론에서 우리는 유전자선택론과 집단선택론의 첨예한 대립을 봤습니다. 이런 견해차는 도대체 집단, 개체, 그리고 유전자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을 갖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인간이 유전자의 생존 기계에 불과하며 인간의 이타성이 이기적 유전자에서 비롯됐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이쯤에서 다윈의 식탁 둘째날을 접겠습니다. 진화의 속도에 관한 쟁점들을 갖고 내일 다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실제로 다윈은 이타성의 진화 문제를 집단선택의 관점에서 해결하려 했다. 최근 30-40년간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눌려 이단으로 전락한 집단선택론이 최근에 다른 형태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것을 보니 어쩌면 무덤 속의 다윈이 목에 힘을 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들었다. 물론 해밀턴은 불편해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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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장대익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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