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다루는 의사로서의 신성한 다짐인 히포크라테스 선서,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슈바이처 박사. 의사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통해 쌓아온 인류에 대한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의사들이 그런 신성한 의무에 충실했던 것은 아니다. ‘의사들의 전쟁’은 한편으로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의사들과, 또다른 한편에서 개인의 영예와 현실적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싸워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의사나 의학자들에게 생명의 존엄성 이상의 가치는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 책의 내용은 다소 충격적일지 모른다. 의학 발전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감사와 환호 대신, 기존 세력의 비방과 질투를 감당해야 했던 현실에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임산부들을 죽음으로 내몬 산욕열의 원인이 의사들의 불결한 손에 있다고 주장했던 제멜바이스의 생을 보자. 그는 시신을 만지는 의사의 손이 명예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빈의학계에서 추방당하고 의사직을 잃었으며 결국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제멜바이스가 기득권층의 특권의식 때문에 불행해진 경우라면, 사회적 관습과 종교적 편견의 희생양이 된 사람도 많았다. 혈액순환론을 주장했던 윌리엄 하비가 그렇다. 하비가 활동했던 17세기는 간에서 만들어진 혈액이 심장을 통해 신체 말단까지 흘러가 사라진다고 믿었던 갈레노스의 이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갈레노스의 학설은 신체 각 기관의 기능과 역할을 영혼이라는 개념과 연관시켜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따라서 갈레노스와 대조되는 하비의 이론은 의학을 넘어서 종교적으로 위험한 사상으로 취급됐고, 그는 평생 동안 종교론자들의 박해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 의학적 발견이 때로는 국가 간의 자존심 경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소아마비 백신의 안전성과 우수성을 놓고 펼쳐진 소크와 세이빈의 논쟁, 에이즈 바이러스 발견을 두고 벌어진 갈로와 몽테니에의 분쟁이 그런 경우다.
소크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해 제2의 파스퇴르로 불리며 주목을 받았지만, 안전성 문제로 세이빈 및 동료 백신 연구가들과 긴 전쟁을 벌여야 했다. 또한 에이즈는 1983년 미국인 로버트 갈로와 프랑스인 뤽 몽테니에에 의해 동시에 밝혀졌지만, 최초 발견의 영예를 서로 차지하려는 양국의 대결로 10년이 지나서야 그 실상이 알려지게 됐다.
‘의사들의 전쟁’은 환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에피소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역사다. 생명과 권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의 욕심이 비단 의료계 내부의 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아픈 역사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우는 순수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