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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가 컴퓨터 속으로 들어온다

BT와 IT가 만드는 가상세포의 세계

 

BT와 IT가 만드는 가상세포의 세계


얼마 전 KAIST 대사공학연구실에서는 희한한 대결이 벌어졌다. 연구실에서 개발한, 세포 내 대사과정을 분석하는 가상세포 프로그램 ‘메타플럭스넷’ 과 실제 세포가 같은 시간 동안 얼마나 숙신산을 많이 만드는지를 겨룬 것. 숙신산은 체내 대사 결과 생성되는 물질이므로 이번 대결은 얼마나 대사가 효율적으로 이뤄지는지를 겨룬 셈이다.

실제 세포는 여러번 실험을 해서 대사과정이 효율적으로 이뤄지도록 만들었고, 컴퓨터 가상세포는 효율적인 대사과정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제시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실제 세포보다 가상세포가 10배나 더 많은 숙신산을 만들어냈다.

최근 정보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탄생한 컴퓨터 가상실험이 생명공학과 의학 전반에 걸쳐 혁신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유전자, 단백질에서 출발해 세포와 조직을 거쳐 기관을 형성한다. 기관들이 모이면 하나의 유기체가 된다. 각 구성요소들은 상호 복잡한 관계를 가지며 생명체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작은 단세포에만도 수천, 수만개의 성분과 반응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반복적이고 범위가 작은 기존의 분자생물학 연구만으로는 생명체의 기능과 구조를 밝히는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컴퓨터에 가상실험 환경이나 모델을 만들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드는 실험을 대신하려는 것이다.
 

KAIST 대사공학 국가지정연구실에서 개발한 가상세포 프로그램 ‘메타플럭스넷’ 의 화면. 세포 내 대사과정을 실제처럼 시뮬레이션한다.


생명현상 시뮬레이션 피지옴 프로젝트

크게는 우리 몸을 이루는 기관에서부터 작게는 세포 단위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가상 실험모델을 구성할 수 있다. 여기에는 생물학·수학·물리학·전산학 지식뿐만 아니라 모델링, 최적화 기법과 공학적인 원리가 총동원된다. 즉 가상실험의 출현 이면에는 방대한 양의 생물학 실험 정보를 한꺼번에 얻어내는 초고속 분석(High-throughput screening) 기술, 생명현상을 수학적으로 풀어내는 계산생물학, 생명체 내부의 활동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시스템생물학의 노고가 숨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각기 다른 분야 연구자들의 협력이 가상실험 프로젝트의 성공을 좌우한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한 미생물의 유전자 지도를 1년 이상 걸려 완성했다. 이제는 불과 며칠 밖에 걸리지 않고, 다양한 수준의 생물학 정보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다. 이제 이런 정보와 첨단 가상실험 기술을 이용해 복잡한 생명현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피지옴’ (Physiome) 프로젝트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이다.

피지옴은 유전자 서열부터 단백질 구조, 세포의 기능 등 생명현상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자료화, 정량화한 다음 이를 통합해 가상조직과 인간모델을 만드는 분야다. 분자부터 조직과 유기체에 이르기까지 그 기능과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수학적으로 모델링해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먼저 인체를 구성하는 기관에 대한 가상모델을 살펴보자. 과학자들은 인체를 피부, 호흡계, 순환계, 중추신경계, 생식계, 림프계, 근골격계, 비뇨계, 소화계, 특정감각기관 등으로 나누고 각 기관별 연구를 한창 진행 중이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 영국, 미국의 국제공동 연구인 ‘카디옴’ (Cardiome) 프로젝트는 유체의 흐름과 전기역학 원리를 적용해 심장이 뛸 때 심근이나 혈관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시뮬레이션으로 예측하는 것이다. 가상심장은 가상세포 덩어리로 구성돼 있고 가상산소와 당을 소모하며 실제 심장처럼 뛴다. 최근 영국 의약품 개발자들은 심장마비와 혈액순환 장애 치료약을 만드는데 가상심장을 활용하고 있다.

조직 가상모델은 크게 근육, 신경, 결합조직, 상피조직으로 나뉘어 연구되고 있다. 이 분야의 가장 큰 문제는 서로 다른 공간의 조직모델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구조와 기능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나타낼 것인가다. 가상조직은 약물전달시스템에 활용 가능하다. 주사제나 붙이는 패치처럼 피부로 들어가는 약의 경우 가상모델을 이용해 약 성분이 특정 부위에 얼마나 잘 전달되는지를 알 수 있다. 피부 내부와 외부를 하나의 가상모델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공간적인 차이를 정확히 표현해야 약물의 이동을 사실에 가깝게 예측할 수 있다.

가상세포로 효율적인 생물모델 설계
 

3차원 가상심장모델^돼지 심장으로부터 측정한 자료를 바탕으로 뉴질랜드 오클랜드대가 만들었다.


가상모델 연구는 세포 수준의 연구가 가장 활발하다. 가상세포는 살아있는 세포를 시뮬레이션하는 모델이므로 세포를 구성하는 수많은 단백질과 분자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수식으로 나타내야 한다. 이를 이용하면 환경을 변화시키거나 유전자를 조작했을 때 세포 내부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실험하지 않고도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특정한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넣었을 때 세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세포 내 특정 물질을 어떻게 더 많이 만들 수 있는지, 병에 걸린 세포가 어떻게 사멸하거나 암세포로 변하는지를 예측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실제 실험의 오차를 줄일 수 있다.

일본 게이오대가 개발한 ‘E-세포’ 가 대표적인 예다. E-세포는 mRNA 전사, 단백질 해독, 에너지 생성, 인지질 합성 같이 세포 생존에 필수적인 기능을 가상모델로 구현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세포 전체를 하나의 시뮬레이션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미 코네티컷대가 개발한 ‘버추얼 세포’ 의 경우 컴퓨터 언어인 자바(JAVA)를 이용해 가상세포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신경세포 내에서 칼슘이온이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관찰했다.

필자의 연구팀에서도 다양한 신종미생물 가상세포모델을 만들어 대사공학 연구를 진행 중이다. 즉 포도당과 유당을 숙신산, 아세트산, 에탄올로 바꾸는 대사과정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화학반응을 수학식으로 만들어 그 결과를 컴퓨터에서 예측한 것이다. 가상세포에서 불필요한 메커니즘을 없애고 특정 유전자를 조작한 결과 10배 이상의 숙신산을 더 생산하는 새로운 슈퍼미생물을 설계하는데 성공했다. 이 모델을 숙신산 대량생산에 산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추가 연구가 진행 중이다. 또 이 가상세포의 환경을 여러가지로 변화시켜 숙신산 이외의 다른 물질들도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이 밖에도 가상세포는 학생들이 의학이나 생물학을 공부할 때 활용될 수 있다.

가상생체모델과 더불어 최근 중요하게 연구되는 분야는 가상질병모델이다. 질병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고 예측함으로써 신약 후보물질이 실제 효과가 있는지를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 최근 캐나다에서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가상조직을 만들어 이 병에 관여하는 물질의 움직임과 세포의 변화를 시뮬레이션했다. 스위스 제약회사 호프먼 라로슈는 자사의 고혈압 치료제 미베프라딜에 대해 미 식품의약국(FDA)이 1천명의 임상시험 결과를 요구하자 1백명에게만 실제 임상시험을 하고 나머지는 가상심장으로 실험, 안정성을 입증해 시판 허가를 받았다. 또한 영국에서도 노화에 대한 가상세포, 가상조직, 가상유기체모델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BASIS’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또한 의사가 수술하기 전 가상환자를 수술하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실제 환자의 상태를 예측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의 한 건강자문회사가 개발한 ‘아르키메데스’ 란 이름의 가상환자는 의사가 심장병이나 당뇨병을 진단, 치료하기 전에 모의실험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시간·비용·노동 집약적 실험 대체

20세기에는 정보기술이 반도체와 인터넷 산업의 발전을 주도했다. 21세기에는 생명과학기술이 중심이 돼 산업 발전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향후 의약품을 포함한 생명공학 제품의 시장규모는 급속히 성장할 전망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과 엄청난 비용, 수많은 인력이 수반되는 기존의 실험방법은 급증하는 시장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 부족하다.

따라서 가상생체모델을 이용한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는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다. 유전체(Genome), 전사체(Transcriptome), 단백체(Proteome), 대사체(Metabolome), 흐름체(Fluxome)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 수학적, 공학적으로 모델링함으로써 실제 세포에 점점 더 가까운 가상세포가 개발되면 이것이 생물학 실험을 상당 부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연구실은 2003년부터 과학기술부 지원으로 ‘시스템생물학 국책 연구개발 사업’ 을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실제 세포와 좀더 가까운 가상세포를 개발할 예정이다. 생명공학 선진국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우리 기술의 경쟁력이 돋보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가상세포(in silico cell 또는 virtual cell)

세포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반응을 수식으로 만들어 컴퓨터에 입력해 실제 세포와 비슷한 환경을 만든 프로그램 또는 가상모델. 이를 이용하면 어떤 약물을 주입하거나 조건을 변화시켰을 때 실제 세포에서 일어날 반응을 실험하지 않고도 컴퓨터만으로 예측할 수 있다. 생물학 분야의 수많은 반복실험을 대체하는 효율적인 연구방법으로 최근 각광받고 있다.

2004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이동엽 선임연구원
  • 이상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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