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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분자 하나로 컴퓨터 메모리 기능 수행

나노세계에서 초집적회로 구현한다

정보처리의 속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칩 제조 기술은 머리카락의 두께에 해당하는 마이크로(${10}^{-6}$) 수준에서 원자와 분자가 속해있는 나노((${10}^{-9}$) 단위로 전환중이다. 이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2가지 방식으로 나노세계로 접근해가고 있다. 하나는 원래 큰 덩어리였던 것을 나노수준으로 세밀하게 새기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단위가 되는 블록으로 쌓아서 만드는 방식이다. 전자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쪼개나간다고 해서 ‘top-down’(하향식)이라고 하고, 후자는 아래에서부터 쌓아올리면서 만든다고 해서 ‘bottom-up’(상향식)이라고 한다.

top-down 방식은 지금까지의 칩제조 방식의 연장선상이다. 실리콘과 같은 무기물에 패턴을 만드는 방식인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방식으로는 나노단위로 접근하면서 제조공정이 복잡해지고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문제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 bottom-up 방식은 아직 상당히 초기이기는 하지만 top-down의 문제점을 타개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런데 나노수준의 단위블럭을 이용하는 bottom-up 방식에서는 현재 top-down 방식에서 널리 이용되는 실리콘 반도체와 같은 무기물질을 사용하기 어렵다. bottom-up 방식에는 유기물질을 이용해야 가능하다. 무기물로는 벽돌처럼 원하는 크기를 갖는 단위블록을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기물인 금속은 그 안에 원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돼 있어 분자블록으로 나눌 수 없다.

하지만 유기물은 이를 구성하는 분자들 자체가 수nm(나노미터) 크기다. 또한 유기물은 원하는 크기로 쉽게 설계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렇게 작은 유기분자가 정보를 처리하는 트랜지스터의 기본특성인 전류의 on/off를 구현하고 신호의 증폭 기능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유기분자들을 레고쌓기처럼 조립하면 집적회로를 제조하는 일이 가능하다. 또한 기존의 화학적인 방법을 이용하면 유기분자를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으로 합성할 수 있어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그림1) 유기물 분자를 이용한 전자소자


1974년 이론 등장, 20년 후 실험 성공


bottom-up 방식은 분자가 알아서 모양을 구성하는 자기조 립의 장점이 있다.


유기분자를 이용해 전자회로를 만들 수 있다고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미국 IBM 연구원이었던 아비람과 라트너다. 이들은 1974년 하나의 유기분자에서 전자를 잘 잃는 부분인 ‘전자 주게’(Electron Donor)와 전자를 잘 받아들이는 부분인 ‘전자 받게’(Electron Acceptor)를 갖고 전자소자를 구성하는 이론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이 전자소자는 전자 주게와 전자 받게를 갖는 유기분자 한개로 된 층을 이용한다. 이 유기분자 단층은 한쪽면이 전자 주게로, 그리고 다른 한쪽면은 전자 받게로 정렬되도록 한다. 그리고 유기분자 단층을 2개의 전극과 맞물리게 한다. 이때 전자 주게의 면을 (+)전극에, 전자 받게의 면을 (-)전극에 닿도록 한다. 그러면 (-)극의 전자는 유기분자의 전자 받게로 이동한 후 분자를 통해 전자 주게로 가서 (+)극으로 최종적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방식을 통해 한방향으로만 흐르는 다이오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이론은 1997년에야 실험적으로 증명됐다. 미국 앨라배마대 멋저 교수는 유기분자 소자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20년이 넘도록 실험에 성공하지 못했던 까닭은 유기분자 단층과 두 전극을 붙이는 일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먼저 1개의 전극을 바닥에 배치하고 그 위에 유기분자 단층을 덮는다. 이때 유기분자 단층의 두께는 고작 2-3nm 정도. 때문에 유기분자 단층 위로 또다른 전극을 코팅하면 전극을 이루는 금속입자가 매우 얇은 유기분자 단층을 찢어버리고 만다.

뒤늦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현재 유기분자 소자는 개발에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과학자들은 유기분자 단층의 크기를 작게 만듦으로써 소자의 크기를 줄이고 있다. 초기에 단층을 이루는 유기분자수가 수만개였던 것이 지금은 1천개 정도를 다루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궁극적으로 과학자들은 한개의 유기분자만으로 된 소자를 만들기를 원한다.

현재 집적도는 펜티엄4의 1백배

최근에는 유기분자가 실제로 스위치, 도선, 트랜지스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이 알려졌다. 지난해 10월 미국의 HP사와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대의 공동 연구팀은 유기분자를 이용한 메모리 소자와 논리 소자를 구현했다.

이들은 2개의 고리가 서로 맞물려있는 구조를 가진 캐티난(catenane)이라는 유기분자를 이용했다. 이 유기분자는 1개의 고리가 (+)전하를 띠고 다른 고리의 일부분과 맞물려 있는 안정적인 상태를 이룬다. 그런데 두번째 고리의 일부분에 전자를 빼면(산화), 그 부분이 (+)전하를 띠게 된다. 그러면 원래부터 (+)전하를 띠는 첫번째 고리와의 전기적인 반발력 때문에 고리가 회전한다. 다시 전자를 주입시켜주면(환원), 원상태로 돌아온다.

이처럼 외부에서 전자를 넣고 빼줌으로써 고리 모양이 바뀌는 점을 이용해 ‘0’과 ‘1’의 2가지 상태를 구현할 수 있다. 현재의 실리콘 칩이 트랜지스터와 캐패시터를 이용해야만 이와 같은 2가지 상태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다.

구체적으로 캐티난 유기분자를 이용해 0과 1의 상태를 구현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HP사와 캘리포니아대 공동 연구팀은 유기분자 단층의 위아래로 여러 줄의 전극을 배열했다. 이때 아래쪽 전극은 가로 방향, 위쪽 전극은 세로 방향으로 정렬시키면 위와 아래의 전극이 교차하는 부분이 생긴다. 바로 이 부분이 트랜지스터와 동시에 캐패시터와 같은 소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위아래 전극에 전류를 흘려주게 되면 교차하는 부분에서 캐티난 유기분자가 전자를 받았을 때와 전자를 잃었을 때 고리 모양이 달라지면서 0 또는 1을 의미하는 두가지 상태를 구현할 수 있다.

따라서 좁은 공간에 전극이 교차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소자의 집적도를 높일 수 있다. 현재 이 방식으로 도달한 최고의 집적도는 1μm2의 면적에 64비트다. 이는 1μm2에 위아래 각각 8개의 전극을 배치한 것을 의미한다. 이 정도의 집적도는 top-down 방식으로 제조된 실리콘칩의 집적도와 비교할 때 펜티엄4의 약 1백배 정도에 해당한다.

앞으로 1-2년 사이에는 약 1만배에 이르는 집적도로 발전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면서도 현재의 top-down 방식에 비해 제조공정이 매우 간단하기 때문에 비용이 1/10 정도밖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유기분자 소자가 당장 실용화되기는 어렵다. 실제로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기능을 동작하려면 여러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우선 이 소자에 충분한 전압과 전류를 흘려줄 수 있는 구동회로 부분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개발된 유기분자 소자로는 구동이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실리콘 칩과 별개로 제조되기보다는 초기에 실리콘 기술과 복합된 형태의 분자전자소자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림2) 캐티난 유기분자를 이용한 소자


분자전자공학의 시대로

또한 실질적으로 유기분자 소자가 성공적으로 개발되기 위해서는 관련된 다양한 기술들이 동시에 발전돼야 한다. 예를 들면 새로운 컴퓨팅 구조, 신뢰성이 있는 소재 및 소자 구조, 양산성이 있는 나노선 제조 기술, 그리고 나노분자 소자 안의 정보를 바깥 세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방안, 즉 마이크로 크기의 전선으로 나노크기 소자에 정보를 쓰거나, 지울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 등이 그러한 기술에 속한다.

하지만 유기분자 소자는 기존의 소자가 갖는 정보 저장과 처리 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맛 또는 냄새와 같은 센서 기능은 물론 분자 모터의 기능도 할 수 있다. 미래에는 설탕 입자만한 기판에 지금의 펜티엄보다 더 고집적의 메모리 소자, 수백가지의 다양한 특성을 감지해낼 수 있는 센서, 분자수준의 기계 등 분자전자공학 시대를 이끌어갈 전망이다.

2003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김영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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