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비와 생활비 전액이 보장된다는 유학조건은 교육경비가 사회적 지출이 돼야 한다거나 왜 조국을 떠나야만 하는가란 질문을 회피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봉건관료제의 전통 탓인지 학문하는 사람을 신격화하는 우리네 사고방식 안에서는 어떤 유학생이든 자신이 하는 일이 편협한 개별과학의 한 패러다임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실토하기에 역부족이다. 그러기에 유학생들의 글이란 으레 자신의 환경과 삶이 조국의 현실에 비해 선택받은 것임을 확인시키는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는 유(類)의 글이 되고 만다.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활이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가를 시인하거나 학문에 종사함은 소재를 조금 달리하는 평범한 인간노동에 불과하다는 자명한 사실을 알리려고 시도하면 뭔가 유학생활에 제대로 적응치 못한 사람으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군대 간 아들의 '아무튼 잘 있다'식의 편지와 유학간 딸의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는 막연한 소식을 주름이 깊어가는 우리 어머님들이 온전히 믿지 못하시면서도 읽어야하는 한 우리는 자신의 유학체험을 좀 더 정직히 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정신 선진국 전유물 아니다
울컥 쏟아지는 눈물을 가리기 좋을만큼 높다란 칸막이가 쳐있는 김포공항의 출국대.
'이기고 돌아오라'며 불끈 쥔 주먹을 높이 치켜든 친구들과 갸날픈 손으로 연신 눈시울을 훔치시는 어머님을 뒤로하며 총총히 빠져나온 그곳은 너무나도 극적으로 잘 꾸며진 상징적인 새출발의 장소였다.
학비를 포함한 생활비 전액이 학위 전과정을 통해 보장된다는 유학조건에의 만족은 '교육경비는 개인에 의한 부담을 넘어서 사회적 지출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나 '우리가 왜 바다 너머의 먼나라로 가야 하는가'라는 역사적인 질문을 회피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비행기를 탄 순간부터 덮쳐오는 깊은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그 사회내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싶던 막막함도 어느덧 주어진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갔다.
한국에서 왔다고하면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한번쯤 물어보곤 하는 사람들. 세계 최강국 명문 주립대의 학생임을 자부하는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소리는 빛보다 빠르지 못하고 마르크스는 소련사람이 아니며 백악관은 뉴욕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신있게 거부하곤 했다. 그러는 그들이 대만과 본토에서 온 두 중국인의 다정한 대화의 모습을 부러워하고 일본과 중국의 천문학전통을 격찬하는 교수의 강의에서 목청을 돋우며 뭔가 말하려는 나의 행동을 기괴함 이상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UCLA는 수십만의 우리 동포가 살고 있는 L.A. 코리아 타운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인 해안쪽으로 20여분 남짓 달리면 만날 수 있다. 이 곳의 천문학과는 전원 박사학위 과정인 20여명의 대학원생과 16명의 교수진으로 구성돼있다.
연구분야는 방대해서 적외선 관측에 의한 성간물질의 이해를 중심으로 작게는 태양 연성 갈색왜성(brown dwarf) 크게는 우리 은하 중심 정상은하 및 폭발은하(Star burst galaxy) 특이은하(active galaxy)의 여러 관측적 특성 또 더 나아가서는 우주흑체배경복사 및 대규모 물질분포에까지 이른다. 90년에 조직된 적외선천문학팀은 물리학과와 함께 당분간은 세계최대가 될 하와이 케크(keck)천문대의 적외선 사진기 개발을 마무리 하고있고 또 신설된 천체물리학 그룹은 독자적인 교육과정을 개발, 운영 중에 있다.
이 중에 내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는 특이은하(active galaxies)에 관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특이은하들 중에 그 은하 내의 먼지입자들로 인해 분광학적으로 다른 특징을 보이는 은하를 찾아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백조자리의 Cyg A라는 강력한 전파은하의 수소 적외선 분광선 중에서 그간 먼지로 인해 관측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의 가스운동을 찾아낸 것이 주목할 만하다. 이 가스운동은 강력한 준항성(Quasar)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과학 생각해야
한 나라의 전반적인 기초과학 수준은 역설적이지만 사실상 군사와 산업으로 연관되는 거대한 경제와 정치적 조직 내에서의 상관관계 안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진국의 군산복합체에서 마땅히 지적돼야 하는 과학 및 과학교육의 중립적 순수성의 문제가 우리 유학생들에 의해 제기되는 일은 드물다. 그보다는 선진국의 풍족한 연구환경에 압도될 뿐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가 미국 등 기술선진국으로부터 무비판적으로 거대군사 및 산업기술을 수입하는 풍조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과학적 인식의 능력은 세대와 인종을 초월하는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합리정신의 귀결이지 거대기술의 수입과 서구의 과학전통을 격찬하기에 바쁜 사람들의 주장처럼 선진기술국의 전유물은 결코 아니다. 또 이런 보편적인 인간의 과학의식은 그 민족 및 사회의 특유한 옷을 입고서야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공위성을 띄우고 고집적 회로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하게, 제대로 된 못을 만드는 것이나 밝기가 일정하고 오래가는 형광등을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 이런 일들이야말로 나날이 선진국의 거대과학기술에 매몰되어가기만하는 민족의 과학정신을 되살려내고 우리의 미래를 밝혀줄 진정한 과학기술을 개척하기 위한 선결과제인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우리의 과학도들이 칸막이 쳐진 공항의 출발대로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민족과학정신이 그 칸막이 너머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들이 경험하게 될 것은 미국교수의 단순한 인사말을 잘못 이해해서 엉뚱한 일을 하고 당황해하거나 제대로 대화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조건 끄덕거리다가 난처한 일을 당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어느 날엔가는 엄청나게 위협적인 거대과학기술을 들여다가 결국 스스로도 전혀 이해치 못하는 일만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바다너머로 공부를 하러가는 한 우리는 왜 조국을 떠나 먼길을 가야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 대답은 교육 및 연구환경의 질이나 장학금의 액수, 학위기간동안 출판한 연구논문의 수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진정한 우리 민족과학의 원천인 어머님들의 갸날픈 손이나 높이 불끈 쥔 벗들의 손을 맞잡고 있음으로써 대답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조상들의 천문학은 남겨진 방대한 기록과 문헌이 증명하듯 당시의 중국과 아라비아의 수준을 위협할 만큼 높은 경지의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천문학은 근세에 접어들면서 여타의 고유한 지(知)적 전통의 운명이 그러했듯 긴 잠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 모두들 잠든 깊은 밤의 적막 속에서도 우리들의 자랑스런 과학의 뿌리를 되살리고자 일산과 관악산 소백산의 천문대를 지키는 젊은이들이 있음을 확신한다. 수백 ㎞밖에서 쏜 폭탄이 수m이내의 오차로 목표물에 명중하도록 유도하는 적외선 사진기 등 과학기술 선진국 학생들이 갖고 있는 거대기기 중 그 무엇도 제대로 갖춘 것이 없지만 우리 젊은이들은 오직 불타는 정열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밤잠을 설치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리라.
그들과 함께 숨쉬는 민족의 정기를 이 먼 타국의 땅에서도 느끼며 쏟아지는 정보와 부족할 것 없는 연구환경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의 학도들을 위한 인간적인 천문학의 방향을 명쾌히 갖지 못한 한 미래의 천문학자는 부끄러이 펜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