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경쟁이 한창이던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68년 9월 14일, 옛소련의 바이코누르우주센터에서 달을 향해 한대의 우주선이 발사됐다. 이를 추적하던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달을 돌아 지구로 돌아오는 이 우주선에서 러시아말을 감청하게 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녹음장치에 의한 목소리로 밝혀졌지만 달 경쟁에서 옛소련이 미국을 앞서있다는 적신호였으며 미항공우주국(NASA)은 준비중이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앞선 것으로 보였던 옛소련의 유인 달 선회 비행은 실제로는 이뤄지지 못했으며 계획자체가 비밀에 붙여졌다. 옛소련인들은 왜 달에 가지 못했을까. 유인 달 선회 계획의 전모를 살펴보자.
옛소련과 미국 사이에 달 경쟁이 시작된 1960년대 초, 양쪽 모두는 달착륙에 앞서 유인 우주선을 달 주위에 보냈다가 무사히 회수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른바 유인 달 선회 계획은 달 레이스에서 1차 종목이었다. 이를 위해 옛소련은 여러 방법을 모색했으며 결국 UR-500K/L-1이란 이름의 계획이 진행됐다. UR-500K란 달 탐사선 발사를 위해 개발된 플라톤로켓을 말하며 L-1이란 소유즈우주선을 개조한 달 여행용 우주선이다. L-1에는 2명의 승무원이 탑승하고 6일 분량 이상의 산소와 음식 등이 실리게 된다.
L-1이 달에서 지구로 재진입할 때 옛소련의 영토에 착륙하기 위해 ‘더블 딥’(double-dip)이란 특별한 궤도진입법이 도입됐다. 이것은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사거리가 짧은 미사일을 먼 거리의 미국 영토까지 보내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다. 더블 딥이란 간단히 말해 물수제비다. 낮은 각도로 던져진 돌은 물속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수면을 몇번 튀어오른다. 마찬가지로 우주선을 대기와 충돌키켜 튀어오르게 해 속도를 줄임으로써 재진입시의 마찰열도 줄이고 착륙진입지점을 옛소련의 영토가 있는 곳으로 옮겨보자는 것이다.
공중에서 폭발시킨 본드4호
이를 위해 소유즈우주선을 대폭 개조했는데, 무엇보다 UR-500K 로켓의 추진력 부족으로 무게를 크게 줄여야만 했다. 그 결과 소유즈의 3개 모듈중 궤도모듈과 비상사태를 대비한 여분의 추진장치가 제거됐으며 태양전지판의 크기도 줄어들었다. 그 대신 복잡한 대기 진입법을 실현할 자동항법장비와 자세조정 엔진이 부가됐고 하강모듈에는 진입과정에서 발생하는 고열을 견딜 수 있도록 방열막이 강화됐다.
1967년 3월부터 시험비행이 이뤄졌으나 발사체의 문제로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68년 3월 서방세계에 목적을 숨기기 위해 단지 탐사체란 뜻의 '존드4호'로 명명된 L-1이 처음으로 지구 궤도를 벗어나 달에 도달할 만큼 긴 타원궤도로 발사됐다. 존드4호는 달의 반대편으로 발사됐는데, 이는 장거리 통신과 지구 재진입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존드4호가 진입 중 항법장비의 고장으로 예상지점에 착륙하지 못하게 되자 공중에서 폭발시켰다. 그후 3회에 걸친 추가 발사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고 7월21일에는 발사대에서 로켓이 폭발, 3명의 기술자가 죽기도 했다. 이때쯤 CIA는 존드가 유인 달 선회 비행을 준비하는 예비임무를 맡고 있음을 파악하고 NASA에 정보를 전달했다.
1968년 9월 15일, 거북이 등 실험용 생명체가 탑승한 존드5호가 무사히 발사돼 3일간 달 주변을 돌고 나서 지구로 향했다. 발사과정과 통신, 우주공간의 방사선에 대한 생명 생존 실험 등에서 대성공을 거둔 존드5호는 더블 딥에 의한 궤도진입만 남겨둔 상태였다. 하지만 역시 항법장비에 문제가 생겨 무려 20G(1G는 지구의 중력가속도)에 달하는 중력가속도로 곧장 대기권에 진입했고 인도양에 떨어졌다. 존드5호는 달 비행 후 지구로 회수된 최초의 우주선이다.
1968년 11월 10일에는 존드6호가 발사됐고 처음으로 더블 딥에 의한 방법으로 옛소련의 영토에서 우주선을 회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캡슐에서 산소가 새는 바람에 탑승한 생명체가 질식사하고 말았다. 결국 모두 회수는 됐지만 인간이 탑승했다면 사망했을 것이다. 옛소련은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하지만 실패한 부분은 모두 비밀에 부쳐졌다.
다음번 12월 발사는 사람이 탑승한다는 첩보가 돌았고 미국은 부랴부랴 지구주위에서 비행할 아폴로8호의 목표를 달로 변경했다. L-1과 달리 달까지의 예비 생명 실험도 거치지 않은 무모한 시도였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미국이 달로 우주선을 발사할 수 있는 시기는 12월 21일이었고 옛소련에서는 12월 8일이었다. 옛소련이 미국을 앞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당시 옛소련의 달 발사체와 자동항법장비의 수준으로는 우주비행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옛소련은 지나치게 자동항법장비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우주비행사들조차 이런 자동항법비행이 조종사에 의한 수동비행보다 10배나 더 어려운 기술이라고 회고했다. 결국 옛소련 상부는 미국의 움직임을 알고도 존드7호의 유인비행을 승인할 수 없었다. 결국 미국의 아폴로8호만이 달을 향해 출발했다.
L-1의 ‘코스모노트’(cosmonaut, 우주비행사의 옛소련식 명칭)인 포포비치, 비코스키, 레오노프가 아닌 아폴로의 ‘애스트로노트’(astronaut, 미국식 명칭)인 보어만, 로벨, 앤더스가 달 상공을 날았다.
달 선회 비행계획을 추진해 온 옛소련의 과학자와 우주비행사들에겐 좌절과 비극의 날이었다. 결국 L-1 계획은 정치적인 이유로 취소됐고 비밀에 부쳐졌다. 그후 존드7호가 무인으로 1969년 8월에 발사됐는데 달 선회, 더블 딥 진입, 착륙까지 계획대로 완벽하게 이뤄져 옛소련 과학자들을 안타깝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