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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로미오처럼 날 좋아하지만 시간은 줄리엣의 아버지처럼 냉정하다.
 

김희정(연세대 수학과·3)


'도대체 왜 수학을 전공하느냐'는 질문을 내게 하면서도, 복잡한 미적분 문제를 풀고 있는 후배가 있다면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사랑하는 아우야, 5분만 놀다가 같이 풀어보자. 수학은 우리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우릴 사랑하거든".

●- 굳어버린 사고구조 때문에…

단순히 국어보다 수학을 잘하고, 영어보다 물리를 훨씬 좋아해서 이과반을 선택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수학을 마주할 기회가 많았다. 시간이 나는대로 온통 단어와 숙어를 암기하는데 바쳐야 하는 영어보다는 풀때마다 거의 어김없이 해답이 나와주는 수학문제에 더욱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자연히 수학문제 풀이노트가 영어단어를 암기한 연습장보다 배쯤 높이 쌓여갔다. 한 페이지가 넘는 복잡한 계산문제나 머리아픈 증명문제의 해답이 가져다주는 쾌감은 최고의 기쁨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최고의 즐거움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는 물리학을 전공하고 싶어했다. 또 도시공학을 전공할 생각도 했다. 조금 더 뚱단지 같았던 생각을 말한다면 미술대학엘 가서 그래픽 디자인을 배워보고 싶어하기도 했다.

이렇게 굉장히 많은 것을 하고싶어하고, 또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덤벼들던 '꼬마 여학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삭막하다고 하는 '수학'으로 밀어놓었던 분은 고등학교 2학년때 담임이시던 수학선생님이었다. 키가 큰, 귀공자다운 용모를 가지신 그 선생님은 열심히 공부를 하시는 분이었다.

지금도 여전하시지만 매일 저녁 일정한 공부시간을 정해 놓으시고-그때는 전화조차 받지 않으신다-공부하시는 선생님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실까, 지겹지도 않으실까, 날마다 무슨 공부할 것이 저렇게 많으실까…. 연신 감탄으로 선생님을 보다가 드디어는 선생님을 그처럼 사로잡은 수학을 나도 공부해보기로 결심해버린 것이다.

그 후부터 나는 소설 속의 줄리엣처럼 무작정 수학을 좋아하게 되었다. 누가 '왜 수학을 전공하려 하느냐'고 물을 때면 으례 '수학을 사랑하지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비록 선택의 동기가 엉뚱했지만 대학 3학년인 지금까지 지겹다는 생각은 커녕 책을 펼 때마다 갈피갈피에서 애정이 솟아나는 걸 보면 그 선택이 내게 가장 적절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대학에 와서 바뀐 것이 있다면 요즘은 내가 수학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보다 수학-나의 영원한 로미오-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기하학에 특히 흥미가 있었다. 미술대학에의 미련인지는 몰라도 함수가 그림으로 표현되고, 그림을 간단한 수학적 함수로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입학만 하면 기하학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던 내 기대는 2학년을 마칠때까지 연기되어야 했다. 현대수학 미적분학 고등미적 집합론 미분방정신 선형대수…. 기하학과는 전연 상관없어 보이는 과목들은 왜 그렇게 많고 또 왜 그렇게 어려운지.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면서 엉엉 울고싶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불합리한 입시교육으로 인해 생겨난 비논리적이고 녹음테이프 같은 사고구조때문에 더욱 애를 먹었다. '1이 제일 작은 자연수임을 증명하라'는 데는 말도 못하고 손수건만 물고 있었고, '자연수와 정수의 갯수가 같음을 증명하라'할 때는 연필만 돌릴수밖에 없었다. 비논리적으로 뒤죽박죽 엉켜버린 내 머릿속을 정돈하는데 1년반은 족히 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지금은 제법 흉내는 내는지 '여자가 그렇게 매사를 재고 따지면 팔자가 세진다'는 남학생들의 핀잔을 듣기도 한다. 참으로 길었던 2년을 보내고 오지않을 줄 알았던 3학년이 되어 정식으로 기하학에 입문했다. 아직도 몇개의 난관은 가로 놓여있지만 내 로미오는 날 사랑하니까 안전하게 통과시켜 줄거다.

난 '계획표의 여왕'이란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답게, 요즘도 책상앞에 세개쯤의 계획표를 붙여놓는다. 연간계획표 주중계획표 또 일일 시간표 두루두루 색칠까지 해가며 만들어 붙인다. 한 학기 한 달 한 주가 시작될 때마다 온 방안을 어지럽히는 나를 엄마께선 꼭 국민학교 1학년 학생이 첫 방학숙제 하는 것 같다고 놀릴 정도다. 그렇지만 오래된 습관 때문인지 한주일이라도 거르면 일주일 내내 불안해지기 때문에, 학생이라고 불리기보다 아가씨라고 불릴 때가 더 많은 지금에도 내 계획표를 고집하게 된다.

수학은 로미오처럼 날 좋아하지만 시간은 줄리엣의 아버지처럼 나에게 냉정해서 항상 매몰찬 악역을 도맡는다. 대학에서 희로애락이 어우러진 네개의 성적표를 받으면서,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순전히 누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했느냐의 문제라고 나름대로 결론지었다.

내 경우에는 언제나 조금 더 관심을 갖고 더 많이 공부한 것이 확실히 성적이 좋았다. 좋아하는 과목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나의 투자를 가장 냉철히 판단하도록 만드는 것이 '시간'이다. 나는 나의 노력을 가장 간단하게 수치화시키는 것이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 공부했다면 2시간만큼의 노력이 공부에 투자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노력은 항상 최상의 상태라는 가정아래.

그런데 아침에 포근한 이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평소보다 두시간 더 잤다고 하면 그 두시간은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있는데도 낭비되어 버리는 시간이다. 이 시간들은 너무나 냉정해서 내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아무래도 내가 계획표를 고집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시간의 냉정한 판단이 두렵기 때문이다.

●- '또 모르지'를 배우면서

계획표 예찬론을 좀 더 늘어놓자면 이렇다. 계획표는 후에 내 생활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공해준다. 낭비된 시간 뿐만 아니라 꼭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생활이 엉망이 되는 것도 비참하지만 엉망이 된지도 모르는 것은 더 비참하다. 계획표 세우는 습관을 가진 다음부터는 적어도 내 생활이 정상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끝난 뒤 청소하기에는 귀찮아도 계획표를 꾸밀 때 만큼은 우선 색칠하고 그림그리는 것이 재미있다. 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어서 좋다. 항상 후회로 끝나는 계획이라도 세울때만큼은 그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실행될 것 같아 항상 기분이 좋다. 그러다보면 복잡한 미적분 문제로 혼란스럽던 머리도 어느새 차분해지고, 친구들한테 항상 환영받지는 못하더라도 또한번 시도해봐야지.

"아우야, 계획과 평가라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화창한 봄날 집에 있어야 할 때, 기분전환으로 한번쯤 시도해 보지 않겠니?"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났고 이제 본격적으로 내 공부를 할 때가 왔다. 아마도 방학이 시작될 때까지는 거의 매주 시험에 시달릴게다. 나는 내가 수재나 천재라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공부할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를 다하고, 친구를 사귈때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이 사랑할 수 있길 원한다.

어떤 위대한 업적들을 보더라도 언제나 그것에 걸맞는 엄청난 노력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처음 학생이 되면서 '노력이 학생들의 최선의 행동양식'이라고 배운다. 그런데 우리 노력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계획적인 것보다 계획적인 것이, 바합리적인 것보다 합리적인 것이 좋다. 내 계획표가 여기서도 큰 몫을 담당해내지 않을까?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동안 비록 위상수학이 '또모르지'(영어로 topology인데 학생들은 '또모르지'라고 부른다)로 남아있어도, 이 세상이 젊은이들의 순수한 열정으로 아름답게 남아있는 한, 지금 당장은 바쁘고 삭막한 생활이 될지라도 우리가 계획표를 꾸미며 사는 동안 세상이 합리적으로 발전해 주리라고 믿기에 마지막으로 감히 후배들에게 권한다.

자, 우리 미적분으로 다시 돌아가볼까?
"아우야, 5분쯤 쉬고 나니 머리가 맑아졌니? 같이 풀어보자. 내 로미어는 분명히 네게도 친절할거야…. 대강당 옆의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정말 곱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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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김희정 3학년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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