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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새로운 인재상

인간의 수행능력 도약 위한 발걸음

14-16세기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화를 부활시키고자 일어난 운동이다. 인간의 지적능력과 창의성을 발휘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다. 그래서 당대에는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한 전인(全人)을 요구했다.

실제로 최고 전형으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가이자 과학자, 기술자, 사상가였다. 그는 모나리자와 같은 예술품뿐 아니라, 인체해부, 빛과 그림자의 연구, 새의 비행, 지질학, 식물학, 입체 기하학을 거쳐 수류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 등의 분야에 여러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전문성을 강조하는 오늘날 다빈치를 닮고싶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자신의 일과 관련된 분야의 지식을 쌓는데 만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르네상스 시대가 다시 부활할 조짐이 보이고 있다.

2000년 나노전문가가 처음 제시

미국은 대통령의 과학기술정책 자문기구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요구에 따라 2000년부터 매년 수백만달러가 지원되는 국가나노기술진흥계획(NNI, National Nanotechnology Initiative)이라는 대규모 국책사업을 실시해오고 있다. 이를 포함한 나노과학기술 프로젝트들을 조율하고 관련 정책을 내놓는 전문가들이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에 소분과를 구성하고 있다.

이 분과를 이끌어가는 미하일 로코 박사는 2000년 과학기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첨단 신기술인 나노기술(NT, NanoTechnology), 생명기술(BT, BioTechnology), 정보통신기술(IT, Information Technology)과 인지과학(CT, Cognitive Science), 이들 4개의 과학기술을 융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코 박사는 이들의 앞 글자를 딴 NBIC이라는 과학기술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로코 박사의 첨단신기술 융합 아이디어는 원자와 분자 세계의 단위인 나노에서 비롯됐다. 1나노미터(nm)는 10억분의 1m로, 수소원자 5개가 한줄로 늘어섰을 때의 길이다. 그런데 최근 생명을 비롯한 물질의 연구와 이를 응용하는 기술이 나노 단위까지 내려와 있다. BT는 너비가 2nm인 DNA 이중가닥이 주요 연구대상이고, IT의 경우 대표적인 기술인 실리콘 칩에서 회로의 선폭을 수십nm 또는 그 이하로 줄이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NT의 경우 나노 단위에서 비롯된 기술분야이므로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로코는 나노기술 전문가와 함께 그의 생각을 꾸준히 발전시키면서 공감대를 형성해나갔다. 그리고 2001년 12월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이를 주제로 각계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참석한 워크숍을 개최하는데 주도적으로 앞장섰다. 여기에서 논의된 이야기들은 ‘인간의 수행능력 향상을 위한 기술의 융합’(Converging Technologies for Improving Human Performance)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로 만들어졌다.

이 보고서에는 ‘NBIC가 21세기의 강력한 툴(tool)이 될 것이며, 앞으로 20년 간 현재 봉착해있는 과학기술의 한계를 극복해줄 것’이라고 기술돼 있다. 이와 함께 첨단 과학기술의 융합 목적을 분명하게 짚었다. 그것은 ‘인간의 수행능력 향상’이었다. 바로 이것이 3대 핵심 첨단기술에 인지과학이 포함되는 까닭이다. 물론 인지과학도 마이크론(10-6m) 단위의 신경세포에서 나노 수준의 구체적인 생체전달분자로 내려와 있기도 하다.

인지과학과 첨단과학기술의 만남이 보여주는 미래상은 SF소설과도 같다. 보고서에는 NBIC가 인간의 수행능력 향상이라는 기본 목적뿐 아니라 과학기술을 포함한 사회, 경제 등에 전반적인 변화를 불러오리라고 기술돼 있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일의 효율, 학습능력 향상, 개인의 감각과 지각능력의 강화, 의료에서 혁신적인 변화, 개인뿐 아니라 집단의 창의성과 뇌의 상호작용을 통한 효율 높은 의사소통기술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새로운 전문용어 개발 필요


최근 인지과학의 연구대상은 10-6m의 마이크론 단위의 뇌 신경세포에서 10-9m의 나노 단위의 신경전달물질로 좀더 깊이 내려왔다.


예를 들어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센서와 컴퓨터가 개발돼 건강상태, 주변의 위험물질에 대한 인간의 지각능력을 높일 수 있다. 또 나노로봇이 개발돼 사고로 인한 신체 일부분을 치료하거나 노화에 따른 뇌의 기능 저하도 극복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과 기계가 직접 의사소통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가 개발되면 신체로부터 정신을 다운로드할 수 있어 화성과 같은 다른 세계로 전송하거나 다른 신체로 옮길 수 있다. 또한 사회가 어떻게 행동하고 진화하는지를 예측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등장해 파시즘이나 미국에 테러를 일으킨 과격단체의 흐름을 제거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 인간게놈프로젝트처럼 대규모의 인간인지프로젝트(Human Cognome Project)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우선 과제 중 하나로 내놓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 기술들이 융합하는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유형의 인재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즉 다양한 분야에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지면서 그들을 잘 융합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전분야에 능한 르네상스식 전인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NBIC가 21세기 신 르네상스 시대를 부활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융합기술 주창자들은 교육의 전면적인 개편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나노단위에서 우주단위까지 물질세계의 통합적 이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르네상스식 인간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대학이나 대학원 차원이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기본은 과목이 아니라 학제간 교육 프로그램이 된다.

이 보고서는 융합교육의 좋은 예로 미 과학재단이 실시하는 대학원통합교육연구지원(IGERT, Integrative Graduate Education and Research Traineeship)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IGERT는 1997년부터 학제간 연구와 교육을 진흥하기 위한 경쟁 프로그램으로, 매년 새로운 학제간 교육대학원을 선정해 총 2백90만달러를 지원한다. 2002년까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미국 내 대학원은 1백여개다.

한편 세분화된 전문용어가 각 분야 전문가 간 의사소통의 장벽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새로운 전문용어가 개발돼야 한다. 또 각계 사회 조직이나 언론도 융합기술이 가능하도록 개편돼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 단지 정부가 수백만달러를 들이는 연구 프로젝트를 과제로 내놓는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융합이 일어나도록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핵융합이 쉽게 일어나지 않듯이 말이다.

디지털 통합에 BT와 NT 결합

이와 같은 신기술 융합에 대한 관심은 미국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도 그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1998년 여러 분야가 관여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는 의도에서 개방적 융합연구추진제도가 마련됐다.

2001년 12월에는 ‘새로운 가치와 시스템 창출을 위한 횡단적 연구개발’이라는 제목의 건의안이 종합과학기술회의에 제출됐다. 일본의 종합과학기술회의는 미국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처럼 국가 과학기술정책에 관한 기구로, 총리가 의장이다. 이 회의 결과 지난해에는 ‘횡단적 과학에 의한 유비쿼터스 정보사회 연구’라는 선도적 연구과제가 추진됐다. 이 과제에서는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사회까지도 융합 대상에 포함된다.
일본의 과제명에 포함된 ‘횡단적’이라는 말은 융합을 의미한다. 서로 관련이 없던 과학기술분야가 점점 같은 목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기차의 선로가 나란했던 것이(수직적) 하나의 목적을 위해 동시에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는 일이 생긴다(횡단적)는 것과 같다. 즉 횡단적 과학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분야가 참여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정보통신이 가능한 사회를 연구한다는 말이다. 일본의 경우 융합을 통해 IT분야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전략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이언모 상무는 “융합은 일본의 경우처럼 IT에서 처음 시작됐다”고 말한다. 그 첫번째는 PC업계였다. 초창기 PC업계는 IBM, 애플 등 몇개 회사만 존재했다. 이 회사들은 개발경쟁이 심하지 않았고 독자적으로 발전해갔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말에서 1990년 초 세계적으로 수많은 PC 회사들이 생기면서 경쟁이 모든 PC 업계들에서 심화됐다.

이와 함께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네트워크의 발달로 IT에서는 영상, 음성, 데이터 등 서로 다른 종류의 미디어가 하나의 정보통신기기에서 서비스되면서 디지털 통합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현재는 IT뿐 아니라 BT와 NT까지 융합해 언제 어디서나 정보통신을 수행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기술로 나아가고 있다. IT 강국인 일본은 첨단 신기술의 융합을 통해 미래의 시장을 선점하려는 것이다.

‘결합’ 강조하는 한국


융합은 영상, 음성, 데이터 등 다른 종류의 미디어가 하나의 IT 기기에 통합되면서 시작됐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분위기는 어떨까. 미국과 일본의 움직임과 비교해볼 때 행보가 빠른 편이다. 지난 3월 박호군 과학기술부 장관은 앞으로 5년 동안 과학기술정책의 근간이 될 계획을 대통령에 보고했다. 이때 중요하게 내세운 것이 바로 BT, IT, NT 신기술의 융합이었다. 박 장관은 “반도체 다음으로 우리나라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초일류 기술이 필요하다”면서 “차세대 초일류 기술은 현재의 주력산업과 첨단 신기술을 결합한 분야, BT, IT, NT 등 신기술이 서로 융합하는 분야에서 선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과학기술부는 지난해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신기술 융합과 관련한 움직임을 주시했다. 이와 함께 융합기술에 대한 계획을 세워 올해 연구를 본격적으로 착수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부는 올 1월 말부터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과 20여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구개발정책연구회를 운영했다.

이 연구회에서는 융합기술을 크게 4개로 나눴다. BT와 IT가 결합한 BIT, NT와 IT의 NIT, NT와 BT의 NBT, 그리고 우주기술(ST, Space Technology), 환경기술(ET, Environment Technology), 인지과학과 3가지 첨단 신기술이 결합하는 시스템통합기술(SIT, System Integration Technology)이 그것이다. 연구개발정책연구회는 이들 4개 분야에 해당하는 유망 기술 31가지를 선정했다.

그리고 지난 4월에는 융합기술에 대한 분위기 조성과 의견 수렴을 위해 공청회가 열렸다. 여기에서는 융합신기술의 의미가 무엇인지, 연구개발이 필요한 까닭이 무엇인지, 그리고 국내외 동향과 전망, 추진전력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이후 5월에는 신기술융합사업 추진계획이 발표됐다. BIT, NIT, NBT, SIT에 속하는 31가지 유망 기술의 프로젝트를 올해부터 2-3년 동안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전략이었다. 올해는 이 중 5개 기술이 시작된다. BIT의 유용바이오소재 정보화 및 설계기술개발, NBT의 나노-바이오 측정·제어기술개발, NIT의 나노정보소재합성기술개발과 나노광정보저장기술개발, 그리고 SIT의 차세대시큐러티기술개발이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융합신기술의 의미와 추진전략을 비교해보면 우리나라만의 특징과 현실을 볼 수 있다. 미국은 신기술 간 융합의 목적을 ‘인간의 수행능력 향상’에 두고 있다. 즉 하나의 목표를 향해 기술이 수렴(converging)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이와 달리 앞으로 혁신이 일어나는데 장애가 되는 한계를 이들 기술의 융합이 극복하게 해줄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융합기술은 1990년대 후반 들어 본격화된 학제간 연구개발에 바탕을 둔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학제간 연구나 교육이 이미 보편화된 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지 못한 실정이다. 아직까지 학제간 연구개발 프로젝트도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따로따로 진행해가고 있다. 때문에 정부는 이번 신기술융합사업을 통해 다른 분야의 과학기술자들이 함께 연구할 수 있게 ‘의도적으로’ 묶어준다는 환경 조성에 큰 의미를 둔다.

지금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융합기술 육성을 위한 연구개발 프로그램이나 전략이 없었다. 단지 기존 IT, NT, BT 분야의 연구개발 프로그램과 연계해 소규모로 연구가 진행된 정도다. 이번에 시작한 신기술융합사업이 처음으로 정부 연구개발사업에서 융합을 강조하는 사업인 것이다. 신기술융합사업은 타 분야 연구자 간 결합이 실제로 이뤄지기 위해 세부 사업에 다양한 기술분야의 연구인력집단들이 ‘반드시’ 참여해야 하고 컨소시엄 형태로 구성된 연구팀을 적극 ‘우대’한다고 명시했다.

한편 우리는 융합기술과 관련한 교육에 대해서 미흡한 편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연구기술의 융합에 바탕이 되는 학제간 교육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정부는 신기술융합사업을 통해 연구와 병행한 융합기술전문인력 양성을 추진하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즉 구체적인 신기술융합사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인력을 양성해 나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융합전문가 양성기관으로는KAIST의 바이오시스템학과가 있다. 정부는 신기술융합사업을 추진하면서 정부출연연구소와 대학이 연합한 정부출연연구소연합대학원대학을 설치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2003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박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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