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희는 이번학기 과학반 수업을 맡게 된 이화여자대학교 WISE 센터 학생들입니다. 여러분을 만나게 돼 반갑습니다.” 단정하고 편안한 차림의 여대생 5명이 목련만큼이나 환한 웃음을 지으며 3월 서울 중암중학교 교단에 섰다. 과학반 학생들은 대학생 언니, 누나와의 만남이 설레인 듯 눈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이날은 한달에 한번 있는 전일제 수업이 있는 날. 예년의 과학반 수업과는 달리 이번학기는 대학생 언니, 누나들과 함께 한다. 중암중학교에서 이번학기 주제로 선택한 것은 ‘미래의 운송수단’이다. 첫시간인 오늘은 로켓증기보트를 만든다. 학생 6명씩 한조를 이루고 대학생 언니, 누나가 한명씩 각조를 맡았다. 실험이 끝나면 조별로 보트경연대회도 벌일 참이다.
대략적인 실험 소개가 끝나고 조별로 보트 제작에 들어갔다. “선생님, 이거 이렇게 만들어주세요.” 하지만 뭐든지 다 들어줄 것만 같던 언니, 누나는 단호하다. “궁금한 건 물어볼 수 있지만, 만드는 건 직접 해야 해요.” 처음엔 머뭇머뭇하던 아이들이 차츰 하나둘씩 준비된 재료를 집어들고 나눠준 프린트물과 비교하며 실험을 시작했다.
쓱싹 쓱싹, 어떤 조는 벌써 나무판지를 톱으로 쓸고 있다. 배 모양도 가지각색. 길고 가는 배, 통통하고 넓적한 배, 제법 유선형으로 만들어지려는 배. 또 어떤 학생은 아까부터 연신 구리관과 씨름이다. 자연스럽게 조 안에서 역할 분담이 이뤄지면서 각자 자신의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한쪽에서는 스티로폼을 나무판지에 붙이면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스티로폼이 위에 오느냐, 나무판지가 위에 오느냐를 가지고 실랑이하던 아이들이 배에 추진체로 양초를 붙여야 한다는 한 아이의 말에 ‘그럼 나무판지가 위에 와야겠구나’하며 의견을 모았다. 정해진 시간이 다해가면서 아이들의 손놀림도 빨라졌다.
시행착오 거치며 저절로 원리 깨달아
드디어 2시간 가까운 제작을 마치고 조별로 배를 띄워보는 시간이 됐다. 신나게 보트를 만들던 아이들의 표정이 준비된 수조에 배를 띄우면서 실망으로 가득찼다.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물에 뜨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배의 앞뒤 무게균형을 맞추면 된다는 누군가의 말에 아이들은 다시금 자기 조의 배를 손보느라 바빠졌다. 스티로폼을 덧붙이는 아이, 나무조각을 잘라 붙이는 아이, 양옆에 보조나무를 덧대는 아이, 심지어 가위를 붙여 전투함을 만드는 아이 등 다양한 모습이다.
양초에 불을 붙이자 증기를 뿜어내며 배가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를 보면서 아이들은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이해했다. “아, 선생님, 로켓도 이런 원리인거죠? 그럼 여기에 불을 더 붙이면 더 빨리 가겠네요?”라며 한 학생이 양초에 성냥개비를 잔뜩 올려놓았다. 훅 하는 작은 폭발음과 함께 배는 좀 전보다 더 힘차게 나아갔다. “그런데 구리관에 물을 가득 넣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증기가 밖으로 나와요?”라며 한 아이가 물었다. 온도가 높아질수록 기체의 부피가 증가하고, 구리관 안과 밖의 압력차로 증기가 나온다는 WISE 학생의 설명으로 아이들은 기체의 온도와 부피, 압력과의 관계인 보일-샤를의 법칙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아이들의 궁금증은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다. 촛불에 아무리 구리관을 가깝게 해도 보트가 잘 나아가지 않던 조는 결국 촛불이 심지에서 가까울수록 오히려 온도가 낮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제 아이들의 배는 신나게 달렸다. 오늘 배운 내용이 정말 재미있었다며 다음번에는 무엇을 배울지 벌써부터 궁금한 눈치다.
한달 후 서울의 양강중학교 과학놀이반. 이 학교는 특별히 과학반이라 하지 않고 과학놀이반이라 이름지었다. “과학반이라고 하면 이름부터 너무 딱딱하잖아요. 아이들이 과학을 친근하게 느끼도록 과학놀이반이라 부르기로 했어요”라며 김경화 과학교사가 설명했다.
이 과학놀이반은 유달리 여학생이 많은 것이 특징. 김경화 선생님은 “처음에는 여학생이 남학생의 도전적인 자세에 밀리지만 최종 결과물을 놓고 보면 오히려 더 꼼꼼하게 잘 수행하는 경우가 많아요. 여학생들에게는 초기에 과학을 직접 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번학기 WISE와의 두번째 시간인 이날의 주제는 ‘스스로 물 마시는 새’. 각자 앞에 놓인 준비물로 새를 만들기 시작했다. 탁구공을 잘라서 새 머리를, 가는 유리관은 알코올 램프로 구부려서 새 부리를, 철사로는 새의 머리와 부리를 지탱할 수 있는 몸통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높은 비커에 담긴 물을 빨아올리는 유리관을 보며 모세관 현상, 물의 응집력과 표면장력, 기압, 사이펀 원리를 이해했다. 실험에 참가한 유희원(양강중 1) 양은 “언니들이 와서 수업하니까 더 재미있어요”라며 즐거운 표정이다. 작년부터 WISE의 동아리로 활동하고 있는 양소영(이화여대 화학과 00학번) 양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더 많이 배우게 돼요. 과학을 한다는 것에 대해 전에 없던 보람과 자긍심을 느낍니다”라고 말했다.
2학기부터 확대 운영할 계획
작년에 처음 선보인 WISE의 ‘찾아가는 실험실’이 이번학기 서울지역 총 10개 중학교에서 운영되면서 좋은 출발을 보이고 있다. 찾아가는 실험실이란 예비여성과학자 5-6명이 조를 이뤄 한달에 한번씩 일선 학교로 직접 찾아가 한학기 과학반 수업을 전담하는 프로그램이다. 아이들은 WISE가 준비한 다양한 주제의 실험에 참가하여 스스로 흥미를 갖고 직접 만들어봄으로써 과학적 원리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WISE 거점센터장 이혜숙 교수(이화여대 수학과)는 “오히려 너무 성공한 과학자보다는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대학생 언니와의 만남을 통해 아이들은 과학에 좀더 자신감을 갖게 된다. 또한 교사로 참여한 대학생들도 이런 기회를 통해 과학하는 자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앞으로 과학자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큰 도움을 받는다”며 이 프로그램의 취지를 말했다. 이 교수는 또한 “이 프로그램뿐 아니라 다른 WISE의 활동들이 앞으로 청소년의 이공계 진로선택에 도움을 주고 여성과학기술인 양성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기 바란다”며 희망을 밝혔다.
WISE는 2학기부터 찾아가는 실험실을 확대 운영할 예정이며, 과학캠프나 사이언스 페스티벌과 같은 다양한 행사도 차츰 전국적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여성과학기술인 길러내는 WISE
이화여자대학교를 거점센터로 두고 있는 WISE(Women Into Science & Engineering)는 여성과학기술인력 양성을 목표로 2001년부터 정부에서 적극 추진하는 프로그램이다.
WISE의 활동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온라인 멘토링 프로그램. 멘토링이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용어로 스승(멘토)과 제자(멘티) 간의 지속적인 후견인 제도를 뜻한다. WISE의 멘토링 프로그램은 매주 멘토와 멘티가 온라인에서 만나 과학기술분야의 최근 동향이나 연구방법, 미래가능성 등을 얘기한다. 멘토로는 현직 여성과학자나 여대학(원)생들이, 멘티로는 초·중·고 여학생들이 참여한다.
WISE는 온라인상에서의 한계를 다양한 오프라인 프로그램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찾아가는 실험실이 대표적 예이며, 대학이나 연구소의 연구실·실험실 초청 탐방 프로그램, 멘토와의 하루, 현장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인턴십 프로그램, 과학캠프 등 활동 범위도 다양하다.
WISE는 현재 강원(연세대), 대전∙충남(공주대), 부산∙경남(신라대), 제주(제주대) 등 4곳에 지역센터를 두고 있으며, 인천(인하대), 충북(교원대), 광주∙전남(조선대), 전북(전북대∙군산대) 지역에서도 서울의 거점센터를 중심으로 활동중이다. WISE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는 WISE 공식 홈페이지(http://www.wise.or.kr)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