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박테리아가 말하는 익사체의 비밀

부패실험용 동물로 25kg 돼지가 적임

영화 ‘공공의 적’(강우석 연출, 설경구·이성재 주연, 2002)에는 조규환이란 파렴치한 인물이 나온다. 직장에선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유능한 펀드매니저지만,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사람을 죽일만큼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다. 부모에게 돈을 빌리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칼로 무자비하게 노부모를 살해하는 일까지 저지른다. 영화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이런 패륜아들을 ‘공공의 적’이라 부르며, 그들을 통쾌하게 응징하는 과정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영화에서 용의주도하게 살인을 저질렀던 조규환이 범인으로 밝혀지는 방식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가 자신의 부모를 어찌나 세게 칼로 찔러댔던지 그의 손톱이 부러져 사건현장에 떨어진다. 아들의 손톱이 떨어진 것을 본 어머니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식이 범인임이 드러날까 봐 그 손톱을 집어삼키고 죽는다. 그러나 형사는 부검실에서 피해자인 어머니의 목구멍에서 문제의 손톱을 발견한다. 만약 어머니가 삼킨 손톱이 위장으로 넘어갔다면 위액에 녹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어머니의 목을 칼로 찌르는 바람에 그 손톱이 위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목구멍의 상처 부위에 걸려 발견됐던 것이다. 아들에 의해 죽어갈 때도 자식을 먼저 생각했던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의 숨통을 끊기 위해 목까지 무자비하게 찔러댔기에 결국 덜미를 잡히게 된 아들의 어리석음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죽은 자의 말을 들어라

흔히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범행현장에 놓인 시체에는 사건이 발생하는 동안 있었던 끔찍한 일에 대한 세세한 정보가 은밀한 방식으로 기록돼 있다. 이런 시체를 해부하고 검사해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시체 손상 정도를 조사하며 사망시각과 원인을 규명하는 일을 ‘부검’이라고 한다. 최근 법의학 지식이 빠른 속도로 축적되면서 사체 연구를 통해 범인에 관한 단서를 찾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일본 만화가 마모라 고다가 그린 ‘여검시관 히카루’(원제 반짝반짝 히카루, 1995)를 보면, 살인사건을 조사하는데 부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게 된다. 이 만화에는 시체 부검을 통해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여검시관 히카루의 활약상이 담겨있다.

동경에 있는 명문 T대 의학부를 다니는 히카루는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중이다. 히카루의 은사이자 법의학 권위자인 타도코로 신사쿠 교수의 추천으로 검시관을 생각하고 있던 중 학교 안에서 벌어진 난로폭발사고의 진상 규명에 참여하면서 히카루는 검시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특히 “살아있는 사람은 아프거나 가렵다고 고통을 호소할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한마디도 할 수가 없어. 우리 검시관들은 사자(死者)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임무라네”라는 타도코로 교수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아 법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다.

히카루는 토막난 시체를 조사해 어떻게 살해됐는지 밝혀내고, 지진현장에서 발견된 두개골 뼈 조각과 치아 조각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사연을 추적해내는 등 뛰어난 법의학 지식으로 매번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한다. 그러나 더욱 돋보이는 점은 죽은 자에 대한 연민 때문에 그들의 억울한 진실을 들어주고자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다.

비누처럼 변하는 시체


두개골에서 특히 치아 부분은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유용하다. 치아의 형태가 사람마다 다르고, 치아에는 보철처 럼 남다른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시체를 해부해 사망단서를 찾아내는 작업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세밀한 부검과 사건현장의 법의학적 조사가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여검시관 히카루’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에 법의학자의 사건현장 조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가 있다.

가뭄으로 말라버린 삼림지대의 한 연못에서 시랍화된 시체가 발견된다. ‘시랍’이란 시체의 수분이 증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학작용이 일어나 시신이 비누와 같은 상태가 되는 현상을 말한다. 히카루는 치아 마모 정도를 조사해 시체가 15-30세 정도의 여성임을 알게 된다. 완전히 시랍화되기 위해선 3-4년 이상 걸린다는 점에 착안, 그 즈음 실종됐던 이 지방의 여성들을 조사한다. 그러나 그런 실종자는 기록에도 없고 한달이 지나도록 신고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히카루는 과학도다운 호기심으로 다시 한번 사건현장을 조사하다가 현장 주변 산중턱에 산업 폐기물이 불법으로 버려진 현장을 발견한다. 문득 뭔가를 깨달은 히카루는 현장의 토질표본을 채취해 과학수사연구소에 조사를 의뢰한다. 검사결과 토질에서 수산화나트륨이 발견된다. 이는 지방산 트리글리세리드와 결합해 비누를 만드는 성분이다. 폐기물 불법 투기장에서 흘러나온 화학물질이 토질을 오염시켰고, 이로 인해 시체의 시랍화가 빠르게 진행됐던 것이다. 수사는 다시 활기를 되찾고 최근 실종된 여성까지 범위를 확대한다. 결국 8개월 전에 실종된 여고생과 치아 형태가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녀의 남자친구로부터 순순히 자백을 얻어낸다.

이같이 검시가 제대로 되려면 법의학자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법의관이 반드시 현장에 가서 시체가 놓여있는 상태와 주위환경을 살피고, 법의학적 조사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히카루 검시관이 매번 직접 사건현장에 찾아가는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다.

시체 부검을 통해 범인의 단서를 찾아내는 일은 주로 상처가 난 부위나 위 속의 음식물, 허파 속 이물질 등을 통해 이뤄진다. ‘여검시관 히카루’의 첫번째 에피소드는 익사체의 허파 속에서 발견된 박테리아가 사건을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전형적인 예다.

어느날 한 부랑자와 어린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결국 익사한 사건이 벌어진다. 어린이의 부모는 평소 아이들을 상대로 시간을 보내던 부랑자가 큰비로 물이 불어난 강에서 수영하자고 어린이를 부추겨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두번의 부검 끝에 히카루는 아이의 허파 속에는 박테리아가 없는데, 부랑자의 허파 속에는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한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연못물은 자연계와 가까워 순수한 형태의 플랑크톤만이 존재하지만, 강물에는 부영양화된 물을 좋아하는 조류와 박테리아가 함께 존재하는 특징이 있다. 이를 통해 히카루는 어린이가 놀다가 연못에서 빠져 죽은 것이고, 어린이의 시체가 비에 휩쓸려 강물로 떠내려오자 시체를 건져내려고 강물에 뛰어든 부랑자도 익사했던 사건임을 밝혀낸다. 이처럼 부검은 사망원인과 사건경위를 포착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죽으면 거인 되는 이유


사람이 죽으면 몸이 굳어지고 피부에 빨간 부분이 나 타나며 체온이 낮아지는 등 다양한 시체현상이 나타난다. 이후 시체는 눈에 띄게 부풀어오른다


살인사건 수사에서 사망시각, 즉 사후 경과시간을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수많은 법의학자들이 1백년 이상 이 문제를 연구해 왔으나, 안타깝게도 아직 사후 경과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이 없어 법의학 분야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사후 경과시간은 사람이 사망한 후 보이는 여러가지 시체현상을 통해 추정돼 왔다. 예를 들어 사망하면 일시적으로 근육이 풀어졌다가 점차 굳어지는데, 이런 현상을 ‘시강’(시체 경직)이라 부른다. 시체의 관절이 잘 펴지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시체의 굳은 정도를 통해 사망시간을 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사망 후 혈액 순환이 멈추면 적혈구들이 혈관을 따라 시체의 가장 낮은 부분으로 이동해 피부에 빨간 부분이 나타나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것을 시반(혈액 침추)이라고 부르는데, 그 정도를 측정하면 사후 경과시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체내에서 열을 만들어내는 화학적인 작용은 정지하지만, 열을 복사하고 전도하는 체열 발산 현상은 지속돼 시체의 체온이 점점 내려가 결국 주위온도와 같아진다(때론 수분증발로 피부가 주위온도보다 더 낮을 수도 있다).

체온 하강이나 시체 경직, 시반 등 초기 시체현상이 일어나고 나면, 시신이 눈에 띄게 부풀어오르는 현상이 벌어진다. 생명활동이 정지되면서 개체가 갖고 있던 방어기전도 동시에 소멸돼 대장 내에 정상적으로 존재하던 미생물과 외부세균이 증식하는 이른바 ‘부패 현상’이 시작된다. 이 시기에 시체는 부풀어올라 거인처럼 변하기 때문에 가족조차도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이 시기가 되면 초기 시체현상도 모두 사라져 썩고 있는 유기물(시체)을 먹고 사는 부식자를 연구해야만 사망원인과 사후 경과시간을 판단할 수 있다.

파리가 알려주는 사망시간

사망 후 시체에 모인 수많은 곤충을 연구해 사망원인과 사후 경과시간을 추정하는 학문을 ‘법곤충학’이라 한다. 특히 파리의 유충인 구더기의 생태는 사후 경과시간을 추정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준다.

법의학에 관한 최초의 역사적 사례 연구는 13세기 경 중국에서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1235년 중국의 현장감식 전문가 성츄가 쓴 ‘오류의 척결’이란 책이다. 성츄는 자신의 책에서 한 마을에 벌어진 살인사건에서 파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이야기한다. 그 마을 사람 중 하나가 낫에 의해 수차례 난도질당해 살해됐는데, 어떤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방 판사는 마을 주민들에게 각자의 낫을 갖고 모이도록 명령을 내렸다. 사람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 모이자, 마을 주민 중 한사람의 낫에 파리떼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칼날과 손잡이에 남아있던 피와 살조각 때문에 파리가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파리의 유충이 구더기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고깃덩어리나 썩은 시체에 파리가 알을 까서 구더기가 생긴다는 점을 알면서 파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법곤충학 입문서인 ‘파리가 잡은 범인’(해바라기, 2002)의 저자 리 고프 교수에 따르면, 잔혹한 살인사건과 관련해 곤충학적인 증거가 널리 이용된 때는 1930년대 중반부터라고 한다. 구더기가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통해 사후 경과시간을 추정하는 방법이 그때부터 사용됐다는 말이다.

부검은 질병 연구에도 필요


부검은 사망원인, 질병상태 등을 알아보기 위해 시체를 해부 하고 검사하는 일이다. 살인사건에 연관된 경우뿐만 아니라 질병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준다. 사진은 영화‘아나토미’의 한장면.


최근에는 시체 부패과정이 사람과 비슷한 동물을 택해 부패과정을 정밀하게 조사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25kg 정도의 돼지가 주로 이용되고 있는데, 가격도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인간 시체의 부패과정과 가장 비슷한 유형을 지닌 동물이라 미국에서 부패실험에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시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부패되며 어떤 곤충과 세균, 그리고 박테리아가 부패 과정에 참여하는지, 그리고 시체가 부패되는 동안 그들의 개체수와 생태는 어떻게 변하는지 면밀히 조사할 수 있게 됐다.

우리말에 ‘두벌주검’이란 단어가 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참형을 가하는 행위를 의미하는데, 해부나 검시를 당한 송장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부검을 두번 죽이는 몹쓸 짓으로 생각하거나 꺼림칙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부검률이 다른 나라에 비해 턱없이 낮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부검은 반드시 살인사건처럼 범죄와 연관된 경우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의 질병상태를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을 준다. 법의학의 발전은 말할 것도 없고, 장수의 비결을 알아내거나 알츠하이머 치매와 같은 노인병을 연구하는데도 부검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여검시관 히카루는 부검하기 전에 항상 합장하고 “아프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라고 기도한다. 부검을 하는 모든 검시관은 히카루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부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혐오감이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 법의학자뿐만 아니라 모든 의사의 마음이리라.

부검에 대한 소견

부검이란 사망원인이나 질병상태, 또는 시체 손상 정도를 규명하기 위해 시체를 해부하고 검사하는 일을 말한다. 특히 형사소송법에 의거한 범죄와 관계 있는 시체에 대한 부검을 ‘사법해부’라고 하는데, 범죄와 사인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이 주목적이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일부 국가와 미국의 일부 주(州)에서 시행되는 검시관제도에서는 검시관의 요청에 의해 부검을 할 수 있고, 미국 대부분의 주, 프랑스, 일본 등지에서 실시하고 있는 감찰의제도에서는 법의전문의가 직접 해부하는데 비해, 한국에서는 검사가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 부검을 요청한다.

그러나 모든 경우 실제의 부검은 의사가 한다. 부검은 그 방법에 따라 몇가지로 나뉘는데, 그 중 모든 장기를 하나하나 밖으로 꺼내 검사
하는 비르효(Virchow) 기법이 가장 많이 쓰인다. 때에 따라 원하는 위치에서 필요한 장기만열어서 검사하는 로키탄스키(Rokitansky) 기법
이나 머리∙목∙복강∙골반강 내의 몇몇 장기를 밖으로 꺼내 검사하는 루텔레(Lutelle) 기법이 많이 이용된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3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정재승 연구교수

🎓️ 진로 추천

  • 의학
  • 법학
  • 생명과학·생명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