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
파란 장미의 꽃말이다. 파란 장미는 자연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의 위스키 제조회사인 산토리(Suntory)와 호주 벤처인 플로리진(florigene)이 유전자를 조작해 파란 장미를 만들었지만, 실제 색깔은 파랗다기 보다는 연보라에 가깝다. 아직까지 진정한 의미의 파란 장미는 탄생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최근 일본에서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과학자들이 파란 국화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국화 역시 장미만큼 파란색을 구현하기 어려운 꽃으로 꼽혀왔다.
분홍 국화에 유전자 두 개 넣어
7월 26일 일본 국립농업식품연구소(NARO, National Agriculture and food Research Organization)와 산토리 공동연구팀은 순수한 푸른색에 가까운 국화를 개발해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했다. 지금까지 파란 장미, 파란 카네이션 등 많은 종의 꽃에서 파란색을 구현했다는 연구들이 있었지만, 모두 파랑보다는 보라에 가까웠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노다 나오노부 NARO 연구원은 논문에서 “우리가 이렇게 완벽한 파란색을 만들어 낸 것은 정말 우연이었으며, 우리조차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도 그럴 것이 연구팀은 분홍 국화에 딱 두 개의 외부 유전자를 넣어주는 매우 간단한 방식으로 파란 국화를 피우는 데 성공했다. 이 유전자는 초롱꽃에서 추출한 ‘F3'5'H(플라보노이드 3',5'-하이드록시레이스)’와 나비콩에서 가져온 ‘CtA3'5'GT’다.
꽃잎이 푸른색을 내는 이유는 ‘안토시아닌’이라는 색소 때문이다. 이 색소는 탄소 6개로 이뤄진 육각형 고리 3개가 이어진 형태다. 각각의 고리에 어떤 물질이 붙느냐에 따라 빨간색을 띠기도 하고 푸른색을 띠기도 한다. 빨간색을 띠면 ‘시아니딘’, 푸른색을 띠면 ‘델피니딘’이라고 부른다(120쪽 참고).
문제는 안토시아닌이 델피니딘이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효소 유전자가 있는데, 이 유전자가 ‘파란 유전자(blue gene)’로 불리는 F3'5'H다. 이 유전자는 산토리와 플로리진이 1990년대 파란 장미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페투니아에서 얻었다.
파란색 유전자 구조 바꿔 성공
하지만 F3'5'H만으로는 완벽한 파란색이 나오지 않았다. 산토리 연구팀이 F3'5'H를 추출한 건 1991년이었지만, 장미 색이 푸르스름하게 바뀐 건 5년 뒤인 1996년이었다. 연구팀은 F3'5'H를 수 차례 장미에 삽입했지만, 장미 색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델피니딘은 정상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양이 적고 색의 강도가 약해 푸른 빛을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산토리 연구팀은 수백 종의 장미 중 델피니딘이 세포 내 소기관인 액포에 잘 축적될 수 있는 생체 조건을 가진 장미 40여 종을 골라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07년 델피니딘이 전체 색소의 최대 95%를 차지하는 파란 장미를 최초로 피우는 데 성공했다(doi:10.1093/pcp/pcm131).
하지만 ‘산토리 블루 로즈 어플로즈(SUNTORY blue rose APPLAUSE)’라고 불리는 이 장미는 파랑보다는 보라에 가깝다. 연구진 역시 홈페이지를 통해 “여전히 진정한 의미의 파란 장미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델피니딘이 이렇게 많은 데도 파란색을 구현할 수 없었던 건 색의 진하기 탓이다. 같은 델피니딘이라도 화학 구조에 따라서 푸른색의 진하기가 달라진다.
파란 국화를 개발한 NARO 연구팀은 이 사실에 주목했다. 자연적으로 푸른색 꽃잎을 가진 나비콩은 액포의 산성도(pH)가 7 이상인 반면, 장미와 국화의 액포는 pH5 정도로 약산성이라는 차이를 발견했다. 액포가 산성일 때 델피니딘은 보라색을 띤다. 진한 파랑을 띠는 델피니딘을 만들기 위해서는 pH가 높아야 한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액포의 pH를 바꾸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pH의 변화가 개체의 전반적인 대사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pH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델피니딘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유전자를 찾았다. 이 유전자가 바로 나비콩에서 찾은 CtA3'5'GT다. 이 유전자로부터 발현되는 효소는 델피니딘에 당을 결합시켜 구조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탄생한 파란 국화(아래 사진)는 지금까지 생명공학 기술로 피어난 파란 꽃들 가운데 가장 파랑에 가깝다. 닐 앤더슨 미국 미네소타대 원예학과 교수는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에 “(이번에 개발된 파란 국화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파란색”이라고 평가했다.
표피세포 모양 따라서도 꽃 색 달라져
과학자들이 인위적으로 푸른색을 만들어내기까지 무려 20여 년이 걸렸다. 그 이유는 꽃잎의 색을 결정하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다.
델피니딘 같은 색소는 주로 잎의 표피세포에 존재한다. 잎은 크게 상면표피, 책상조직, 해면조직, 하면표피 등 4개 조직으로 세분화 하는데, 표피세포에는 상면표피와 하면표피가 포함된다. 색소는 주로 상면표피에 저장돼 있다. 하지만 어두운 색의 꽃잎에서는 하면표피와 책상조직에서도 색소가 발견된다.
가령 푸른색의 무스카리(Grape hyacinth)는 책상 조직에, 튤립은 하면표피에 색소가 있다. 해면조직에는 색소가 없지만, 두께와 밀도가 꽃잎의 채도에 영향을 준다. 해면조직이 두껍고 밀도가 높으면 꽃잎 색이 옅어진다.
표피세포의 모양도 중요하다. 잎의 표피세포가 원뿔형이면 세포 표면에서 빛을 많이 흡수하기 때문에 꽃잎의 색이 진하고 어두워진다. 반면 편편한 형태의 표피세포는 빛을 많이 반사해 색이 옅어진다. 이는 온도와도 관련이 있다. 온도가 섭씨 30도 이상이면 표피세포는 납작한 모양으로 바뀐다. 반면 섭씨 10~20도에서는 상면표피의 두께가 두꺼워져 잎의 색이 진해진다.
캐시 마틴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대 대사생물학과 교수팀은 밝은 자주색(마젠타)의 금어초 꽃잎의 표피세포가 원뿔 모양에서 납작하게 바뀌고 이 때문에 꽃잎이 옅은 분홍색으로 변하는 사실을 확인했다(doi:10.1038/369661a0). 수박풀(Hibiscus trionum)은 표피세포를 덮고 있는 큐티클이 접혀 있어 빛의 회절이 일어나고, 이 때문에 보는 각도에 따라 무지개 색을 띤다.
온도와 빛의 양에 따라서 꽃 색이 변하기도 한다. 대체로 온도가 높으면 색이 밝아진다. 백합, 국화, 장미 등 꽃에 들어 있는 안토시아닌 함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반면 온도가 낮아지면 색이 진해진다. 이는 안토시아닌의 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발현과 관련이 있다. 온도가 높으면 유전자 발현이 덜 되고, 결국 안토시아닌의 양이 줄어 색이 밝고 옅어지게 된다.
빛의 세기, 파장, 광(光) 주기 등도 안토시아닌의 양에 영향을 미치고 꽃 색깔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백합목에 속하는 월하향은 강한 빛에서는 보랏빛을 띠는 붉은색을 내지만, 빛의 강도가 약한 곳에 있으면 그 색이 발현되지 않는다. 일본 규슈대 연구팀이 섭씨 25도에서 자연광의 55% 정도에 해당하는 빛만 유지하면서 월하향을 재배한 결과 하얀색에 가까운 꽃이 피었다. 75~100%의 빛을 유지하자 본래의 자주빛이 되살아났다.
어렵사리 개발한 푸른 국화를 언제쯤 실제로 볼 수 있을까. 이번 연구의 주역인 노다 나오노부 NARO 연구원은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유전적으로 개체를 수정하는 것만큼 상업화하는 데에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며 “일정한 색과 품질을 가지는 푸른 국화를 만들기 위한 후속 연구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