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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분자생물학 만능시대 극복하는 통합생물학

진화와 발생으로 아우르는 이보디보의 첫 걸음

생물학은 DNA 구조 발견 이후 또하나의 변혁기를 맞고 있다. 분자생물학의 만능시대를 벗어나 이른바 ‘통합생물학’(integrative biology)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생물학의 역사는 한때 박물학이라 부르기도 했던 자연사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카를 폰 베어, 에른스트 헤켈 등 탁월한 생물학자들의 연구로 발생학이 생물학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를 잡는다. 물론 19세기 중반 멘델의 연구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하지만, 유전학은 20세기에 들어와 분자생물학적 방법의 도움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는 동안에도 자연사는 여전히 넓은 의미의 생태학 또는 야외생물학으로 꾸준히 발전해왔다. 과학사학자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전공분야에 따라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겠지만, 20세기 생물학은 크게 보아 자연사, 유전학, 실험발생학의 세분야로 나뉘어 발전했다.


자연사, 유전학, 실험발생학으 로 발전하던 20세기 생물학은 진화와 발생을 매개로 한‘진 화발생생물학’으로 통합되고 있다.


진화와 발생이라는 통합 용매

이런 가운데 흥미롭게도 한차례의 통합 움직임이 있었다. 1920-30년대에 집단유전학을 중심으로 진행된 이른바 ‘근대적 종합’(Modern Synthesis)이 그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발생학은 그 종합의 자리에서 철저하게 배제됐다. 정확하지 않고 정량적이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던 것이 15년 전부터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이라는 다분히 학제적이고 통합적인 성격을 띤 분야로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다. ‘이보디보’(Evo-Devo)라는 애칭을 가진 진화발생생물학은 표면적으로는 발생생물학과 진화생물학의 만남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대의 거의 모든 생물학 분야를 진화와 발생이라는 두 용매로 녹인 통합생물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예를 들어 유전학, 세포생물학, 생리학, 내분비학, 면역학, 신경생물학, 생화학, 생물물리학 등 생명현상의 물리화학적 메커니즘을 밝히는 기능생물학 분야와 행동생물학, 생태학, 진화학, 계통분류학, 고생물학, 집단유전학 및 각종 개체생물학을 포함하는 진화생물학 분야는 물론, 최근에 새롭게 등장한 생물정보학도 이보디보의 자원들이다.

어떻게 이런 환상적인 통합이 가능했을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른바 ‘호메오박스’(1백80개의 염기로 구성된 특정 DNA 단편)의 발견일 것이다.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루이스는 1940년대부터 초파리의 체절 형성을 조절하는 호메오 유전자를 연구했는데,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두명의 독일 생물학자에 의해 호메오박스의 염기서열이 밝혀졌다. 그 이후로 연구자들은 호메오박스가 초파리의 모든 세포 내에서 전사 과정을 정교하게 조절해 세포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스터 스위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루이스와 두명의 독일 생물학자는 호메오박스 유전자를 발견한 공로로 199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1980년대에는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초파리의 호메오박스가 쥐와 인간과 같은 척추동물에서도 발견된 것이다. 예를 들어 초파리의 발생과정에서 배아의 전후 축을 결정하는 염기서열은 포유류의 척추 형성에 관여하는 유전자에도 같은 형태로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유사한 염기서열이 계통적으로 아주 동떨어진 종에서도 매우 유사한 기능을 하게끔 보존돼 있다는 것이다.

사람 눈 유전자로 발생시킨 거미 눈

개체의 좌우가 대칭인 대칭동물의 호메오 유전자인 ‘혹스 유전자’(hox genes)는 우리를 또한번 놀라게 한다. 초파리의 혹스 유전자를 생쥐의 배아에 이식하면 어떻게 될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초파리의 어떤 혹스 유전자는 생쥐의 체내에서 정상적인 생쥐의 혹스 유전자가 담당해야 할 몫을 잘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pax6’는 더욱 흥미롭다. pax6는 척추동물에서 눈 발생을 조절하는 유전자다. 초파리의 경우에는 ‘eyeless’ 유전자가 이 기능을 담당한다. 물론 곤충의 눈은 겹눈으로 척추동물의 그것과는 구조와 구성 재료, 작동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만일 초파리의 eyeless 유전자를 생쥐의 배아에 이식시키거나 반대로 생쥐의 pax6를 초파리의 배아에 이식시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 놀랍게도 두 경우 모두 정상적인 눈이 발생한다. 즉 생쥐의 배아에서는 생쥐의 눈이, 초파리의 배아에서는 초파리의 눈이 정상적으로 발생한다. 심지어 사람의 pax6 유전자를 거미의 배아에 삽입해도 그 배아는 정상적인 거미 눈을 발생시킬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pax6와 eyeless 유전자가 배아 발생의 초기 단계에서 미분화된 세포의 운명을 조절하는 스위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pax6 유전자를 발견하는데 큰 공헌을 한 스위스의 발생학자 월터 게링은 이런 유형의 유전자를 ‘마스터 조절 유전자’(master control genes)라고 명명했다.

하나의 수정란에서부터 어떻게 복잡한 성체가 발생할 수 있는지는 생물학의 오래된 수수께끼다. 20년 전만 해도 이 난제는 발생학자들만의 업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최근 마스터 조절 유전자들이 발견되면서 이 문제는 발생학의 전통적인 영역을 훌쩍 넘어 버렸다. 우선 유전자 발현 메커니즘에 대한 분자생물학, 세포생물학, 발생유전학적 지식들이 필수적으로 필요하고, 염기서열을 확인하기 위한 유전체학도 요구되며 상이한 문(phyla)들 간의 상동성을 따져보기 위한 계통학도 개입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고생물학은 생명이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어떻게 새로운 ‘몸형성 계획’(body plan)과 ‘참신한 형질들’(novelties)을 획득하게 됐는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발생의 수수께끼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예컨대 고생물학자들은 화석 연구를 통해 초기 사지 동물의 발가락이 5개가 아니라 8개라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런 발견은 조상의 사지가 과연 어떻게 생겨났으며 사지의 발생이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대한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연과 자동차는 똑같은 모듈 구조


이보디보는 동물은 물론 식물, 미 생물 등을 모두 포함하는 생물학 의 새로운 종합을 꿈꾼다.


이와 같이 이보디보는 거의 모든 현대 생물학의 성과들을 결합해 생물학의 새로운 종합을 꿈꾸는 야심찬 기획이다. 여기에는 ‘모듈성’(modularity)이라는 핵심 개념이 진화와 발생을 통합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원래 ‘모듈’(module)은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인지과학 등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서, 어떤 기능을 가진 하나의 단위를 말한다. 이때 단위의 내부 구성원들 간에는 강한 상호작용이 존재하지만 외부, 즉 다른 모듈의 구성원들과는 매우 약한 영향을 주고 받는 특징이 있다.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어떤 장치를 만들 때 여러 종류의 모듈을 구성요소로 도입하는 방식은 공학자에게 매우 익숙한 개념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래밍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짜넣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이미 많이 사용되는 하부 기능 단위를 모듈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 생산 공정에서는 엔진 부분과 에어컨 부분은 각각 독립된 모듈로서 따로 조립된다. 따라서 에어컨이 고장난 차를 수리하기 위해 엔진까지 손을 봐야 하는 경우는 없다. 이처럼 공학적 관점에서는 모듈적인 구조가 매우 효율적이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대신하는 유전 구조

그렇다면 자연도 모듈적인 구조를 좋아할까? 흥미롭게도 그런 것처럼 보인다. 발생학자였던 와딩턴의 설명을 들어보자. 그는 같은 모형을 통해 발생과정에서 모듈의 중요성을 쉽게 설명했다. 그림에서 작은 구슬은 세포의 운명을, 계곡은 이 구슬이 굴러갈 수 있는 길(모듈)을 나타낸다. 발생 초기에는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기 때문에 세포는 다양한 길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발생이 진행되면서 구슬이 어느 한쪽 길(모듈)로 접어들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것은 유전적 변이가 늘어나도 전체 표현형에는 큰 변화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어떤 지점(모듈을 선택할 수 있는 갈림길)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유전적 변화라도 그 결과는 표현형의 커다란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이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빠른 진화도 가능하다.

이런 모듈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물론 모듈 구조는 상당히 효율적이다. 모듈 구조는 우연이나 다른 기제보다는 자연선택을 통해 얻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도킨스 같은 학자들은 모듈 구조가 ‘진화가능성’때문에 선택됐다고 주장한다. 즉 모듈 구조는 그 내부의 작은 잘못이나 오작동으로 인해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완충력을 가진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듈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 독립성을 지닌다. 완충력과 준독립성은 진화가능성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모듈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개체는 좀더 효율적인 모듈이 기존의 모듈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점점 진화된 개체를 완성한다. 모듈로 이뤄진 개체는 카세트를 갈아 끼워 새로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더 효율적인 모듈을 선택함으로써 좀더 진화된 개체가 될 수 있다.

최근에는 모듈의 완충 작용을 드러내는 실제 사례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예컨대 생쥐의 근육 형성에 관여하는 MyoD 유전자를 생쥐 태아에서 제거(낙아웃)하면 근육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별 이상 없이 근육이 형성된다. 왜냐하면 MyoD는 일반적으로 근육 발생을 지시할 수 있는 Myf5의 합성을 통제하는데, MyoD가 없으면 Myf5가 대신 합성되고 이 Myf5가 없어진 MyoD의 기능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Myf5는 MyoD의 대타이며 완충 작용제인 셈이다.

이처럼 한 체계 내부의 동적 평형은 한 구성원이 손상돼도 다른 구성원의 변조로 인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모듈의 이런 안정성은 전체 구성원의 네트워크나 상호작용 등을 통해 실현된다.

생명의 다양성과 학문 위계구조 추구


생물학의 세부 분야들을 수직적 형태의 위계구조로 만들려는 통 합생물학 움직임이 미국에서 활 발하다. 사진은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대의 통합생물학 과 학생들 모습이다.


이처럼 이보디보는 발생생물학과 진화생물학의 종합을 통해 주변의 다양한 생물학 분과들을 접목하는 통합생물학의 한 사례로서 최근 수년 사이에 생물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통합생물학이 추구하는 방향은 기본적으로 두가지다. 하나는 생물학이란 모름지기 궁극적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다양성이란 흔히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종 다양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각 생물종을 이루고 있는 유전자 다양성과 각각의 종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서식지의 다양성은 물론 그들 삶 자체의 모든 다양한 모습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또한 학문 분야들을 단순히 평면적으로 나열하던 기존의 방식으로는 이처럼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실체를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생물계가 본래 위계구조로 이뤄져 있듯이 이를 연구하는 단위도 같은 구조를 지녀야 한다. 이것이 통합생물학이 추구하는 두번째 방향이다. 물리학과 화학을 기저에 두고 생화학, 세포학, 유전학, 생리학, 생태학 등 그동안 평면적으로 나열돼 있던 모든 생물학 분야를 수직적 또는 피라미드 형태의 위계구조로 쌓아 올린 것이 바로 통합생물학이다.

이 같은 변화에 구조적으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였다. 여러 세부 분야들로 존재하던 기존의 생물학 학과들을 통폐합해 ‘통합생물학과’(Department of Integrative Biology)를 출범시켰다. 이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생물학자들은 ‘세포 및 분자생물학과’(Department of Cellular and Molecular Biology)에 남았다. 이어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캘리포니아대와 텍사스주립대가 발 빠르게 변신을 시도했고, 시카고대는 아예 수학, 물리학, 화학, 지구과학 등 다른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자들까지 포함하는 연구소를 설립했다. 원래 그 어느 대학보다 생물학 분야 전반에 걸쳐 상당히 균형잡힌 연구진을 갖추고 있던 하버드대도 정식 학과는 아니더라도 통합생물학 그룹을 따로 만들어 본격적으로 연구에 뛰어들었다.

국내에서도 통합생물학을 향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 동기야 어찌됐든 간에 생물학과와 분자생물학과, 미생물학과로 어색하게 나눠져 있던 구조를 생명과학부로 통합한 서울대와 역시 비슷한 학과를 통폐합한 국내 몇몇 대학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제 하나의 단위로 구성된 조직 속에서 지난 날 어렵던 시절 마치 고질병처럼 우리들 몸에 들러붙어 있던 학문 분야의 패권주의를 털어 버리고 어떤 생명 현상이든 위계구조를 따라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수직적 노력이 이뤄진다면 우리는 이미 통합생물학의 길을걷게 되는 것이다. 21세기 세계 생물학의 흐름에 맞춰어색하나마 우리는 이미 첫발을 디뎠다는 사실을 깊이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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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장대익 박사수료
  • 최재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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