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4월 25일 세계적 과학전문지 ‘네이처’에는 ‘핵산의 분자 구조 : 디옥시리보핵산의 구조’라는 논문이 발표됐다. 논문의 저자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었다. 이 논문은 겨우 9백 단어 분량의 아주 짧은 논문이었지만, 과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논문에는 지구의 생명 부호 외에는 어떠한 것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이후 수많은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생물학자와 물리학자의 심상치 않은 만남
1951년 10월초 어느 날, 제임스 듀이 왓슨(1928- )이라는 젊은 미국 과학자가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캐번디시연구소에서 프랜시스 해리 콤프턴 크릭(1916- )이라는 좀더 나이가 많은 영국 과학자와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 다른 나라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격도 전혀 달랐고, 공통점이라고는 거의 찾을 볼 수 없었다.
미국인인 짐 왓슨(제임스 왓슨의 애칭)은 겉으로 보기에 상냥하고 겸손하며 대체로 조용해 보였다. 또 당시 영국인들이 볼 때 왓슨의 외모는 조금 특이했다. 그는 키가 크고 비쩍 말랐으며 전형적인 미국인처럼 보였다. 이와 반대로 크릭은 목소리가 컸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몇년 뒤 왓슨이 그의 저서 ‘이중 나선’ 첫머리에 “크릭이 얌전히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썼을 정도다.
두 젊은이는 전공 분야는 달랐지만 아주 영리하고 뛰어났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과학사에 영원히 남을 협력 관계를 구축한 것도 바로 그들의 뛰어남 때문이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조류학을 전공한 뒤 인디애나대에서 생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왓슨은 코펜하겐에서 생화학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비를 받아 유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위대한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생각을 바꿨다. 슈뢰딩거는 이 책에서 유전자가 생물학의 핵심 문제이며, 유전자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용하는지 발견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왓슨은 이런 연구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촌에 있는 캐번디시연구소라고 판단했다. 이 연구소는 X선 사진을 이용해 생물 분자의 3차원 구조를 해명해 내는데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기술을 갖고 있었다.
왓슨이 캐번디시연구소로 향할 때, 크릭도 슈뢰딩거의 책을 읽고 있었다. 런던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크릭은 2차 세계대전으로 미뤄진 자신의 박사 논문을 캐번디시연구소에서 마무리지으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책을 읽고는 자신의 전공을 생물학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왓슨과 크릭은 만나자마자 친구가 됐다. “짐과 나는 쉽게 친해졌다. 서로 관심 분야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고, 우리 둘 다 천성적으로 너절한 생각을 참지 못하는 냉정함과 성급함, 다시 말해 젊은이다운 오만함을 갖고 있었던 같다.” 크릭의 말처럼 21세기 생명과학의 운명을 결정지은 두 젊은 과학자의 만남은 이렇게 우연히, 하지만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 운명적으로 시작됐다.
멘델 이후 1백년 간의 난제 해결
왓슨과 크릭은 비록 전공이 달랐지만 관심 분야는 같았다. 그들의 대화는 1950년대 당시 과학계의 가장 큰 관심거리였던 생물학 문제에 집중돼 있었다. 바로 인간의 유전자를 이루고 있는 분자인, DNA라고 부르는 디옥시리보핵산의 구조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DNA의 구조를 알면 생물의 활동과 번식에 관한 수많은 기초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뿐 아니라 당시의 수많은 과학자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의 경쟁자는 역사상 최고의 화학자 중 한명인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과 런던대 킹스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었다.
1950년대 최고의 과학자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DNA 연구는 한세기 전의 그레고르 멘델이라는 오스트리아 수도사의 연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까지 유전은 피를 통해 이뤄진다고 생각됐다. 1859년 ‘종의 기원’을 썼던 진화학자 찰스 다윈조차 이런 생각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는 두마리의 동물이 짝짓기를 하면 혈액이 합쳐져, 이를 통해 부모의 형질이 자식에게 물려진다고 생각했다.
다윈과 19세기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지적한 사람이 멘델이었다. 그는 1856년부터 7년 동안 완두콩 교배실험을 통해 씨앗마다 어떤 유전형질을 갖고 있는지, 또 어떤 경우 잡종이 나오는지를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유전은 피가 섞이는 것과 같은 원리로 이뤄지지 않음을 증명했다.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키 큰 완두콩과 키 작은 완두콩을 교배하면 중간 크기의 완두콩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멘델의 실험에서는 중간 크기의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부모 중 한쪽의 형질만 물려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멘델은 부모로부터 각각 유전자(gene, 그리스어로 ‘자손을 낳는다’는 뜻)의 절반을 받기 때문에 자손은 부모와 같은 유전자수를 갖게 되며, 유전자의 우열에 따라 유전형질이 나타난다고 생각했다(멘델의 제1법칙). 그렇다면 유전자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이뤄졌을까. 또 유전자는 어떤 방법으로 자손에게 유전형질을 전달할까. 이런 비밀을 찾기 위해 과학자들은 멘델 이후 1백여년에 걸친 긴 탐구여행을 떠난다.
공동연구 위력 처음으로 입증
왓슨과 크릭이 DNA의 비밀 해독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유전자의 실체는 안개 속의 희미한 물체처럼 손만 내밀면 잡힐 듯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1910년 미국의 유전학자 모건은 초파리 돌연변이 연구를 통해 유전자가 염색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1924년에는 염색체가 단백질과 핵산(DNA, RNA)으로 이뤄져 있음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유전자가 단백질과 핵산 중 어디에 들어있는냐는 논쟁이 일어났지만, 1944년 록펠러의학연구소의 에이버리와 1952년 콜드 스프링 하버연구소의 허쉬는 잇따른 결정적 실험을 통해 유전물질은 DNA임을 입증했다. 하지만 일부 과학자들은 DNA처럼 단순한 물질이 어떻게 복잡한 유전형질을 전하겠느냐며 반신반의했다. 결국 DNA의 구조를 밝혀 유전자 복제 메커니즘을 설명할 도리밖에 없게 됐다.
왓슨과 크릭은 당시까지 얻을 수 있었던 다양한 사실을 종합해 DNA의 입체구조를 탐색했다. 이 과정에서 DNA 구조에 대한 연구를 경쟁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윌킨스와 프랭클린의 X선 사진, 폴링이 제안한 단백질의 폴리펩티드 사슬과 α나선구조에 대한 결과들, 그리고 DNA의 네가지 염기 성분이 일정한 비율로 구성돼 있다는 샤가프의 실험 결과가 결정적 힌트가 됐다. 물론 최종적으로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가장 먼저 밝힌 사람은 왓슨과 크릭이었다.
왓슨과 크릭의 이중나선 연구는 공동연구와 팀워크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최초의 사례다. 현대의 과학연구는 대부분 공동연구 형태로 이뤄진다. 전공분야가 다른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것도 이젠 흔한 일이다. DNA 구조 발견도 동물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수학자 등 다양한 학문 분야 전문가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연구의 성패를 결정했던 또다른 요인은 연구자간의 팀워크였다. 여러가지 면에서 캐번디시연구소보다 앞서 있던 킹스칼리지가 경쟁에서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공동연구자였던 윌킨스와 프랭클린 사이의 불협화음이었다.
DNA 구조 발견이 보여주는 또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과학적 발견 과정에서 모델의 역할과 기능이다. 왓슨과 크릭은 자신들이 가정한 DNA의 구조를 시험하기 위해 연구소 근처의 철공소에 부탁해 염기의 금속모형을 일일이 제작했다. 그들은 이 모형을 밤새 ‘끼워 맞추는’ 노력을 통해 마침내 이중나선의 DNA를 만들 수 있었다. 이 모델은 기존의 모든 관찰사실과 의문점을 해결해하는데 수만가지의 이론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발견은 아직도 진행중
DNA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진 후 생명과학은 말그대로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생명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고 응용하려는 분자생물학이 생물학의 총아로 떠오른 것은 물론, 각종 생명현상의 비밀들이 하나씩 풀려가기 시작했다. 올 4월이면 30억 염기쌍의 인간DNA분석 작업이 100% 완료되며, 미생물의 경우 수백종의 DNA 서열이 이미 밝혀졌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해독되고 있다.
지난 2000년 6월, 미 백악관에서 인간 유전자 지도의 초안을 발표하는 자리에 참석한 왓슨은 “50여년전의 발견이 이렇게 큰 파장으로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다”며 “우리는 신이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면서 사용한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에는DNA 구조 발견이 생물학의 파편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생물학 분야를 너무 세분화·정밀화시켜,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과학자 사이에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비판의 목소리다. 결국 이런 경향은 생물학을 생명현상의 이해라는 원래 목적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들며 생물학자를 연구 자체에 고립시키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는 생명이 하나의 현상이듯 이를 연구하는 생물학도 통합적 시각과 방법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왓슨과 크릭의 발견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50년전에 시작됐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며, 21세기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