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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공 무게를 엄격히 규제하는 이유

타계한 한국인 물리학자가 예측한 알갱이 현상

‘인생대역전’의 꿈을 추구하는 로또의 열기가 대단했다. 지난 2월 10일에 추첨한 제 10회차의 경우 복권의 판매액은 2천6백억원으로, 1등 당첨금은 8백35억원이었다. 13명이 공동 1위로 각각 64억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거머쥐게 됐다. 1등은 45개의 공에서 6개의 공을 무작위로 뽑는 경우의 숫자를 모두 맞춰야 하는데, 그 확률은 약 8백14만분의 1이다.

로또 추첨기로 사용되는 ‘할로겐’은 바닥의 회전판을 이용해 45개의 공을 섞는 방식을 사용한다. 각 공의 무게는 78g. 주관사는 공의 무게가 오차범위를 벗어날 경우를 대비해 4개의 예비공 세트를 보유하고 있다. 이처럼 공의 무게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무게가 각각 다른 경우에 특정한 공이 뽑힐 확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분유의 분말에서 토성의 띠 알갱이까지

만약 로또의 공이 크기와 무게가 다르다면 어떤 공이 뽑힐 확률이 높아질까. 언뜻 단순하게 보이는 이 문제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물리학의 난제 중 하나다. 최근 발표된 재미 한인 물리학자의 이론을 중심으로 물리학계에서 활발한 논쟁이 벌어질 정도다.

주위에서 다양한 알갱이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모래를 비롯해 흙, 자갈과 같은 건축자재, 쌀과 보리와 같은 곡식, 그리고 제약회사에서 생산되는 알약 등이 그렇다. 뿐만 아니라 설탕과 분유의 분말, 프린터와 복사기에 쓰이는 토너와 같은 작은 알갱이도 있고, 소행성대와 수많은 얼음덩어리로 이뤄져 있는 토성의 띠와 같은 거대한 알갱이도 찾아볼 수 있다. 로또의 공도 알갱이다.

물리학자는 이들 알갱이들을 연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알갱이는 크기가 마이크론(${10}^{-6}$m) 이상으로 분자들의 열운동을 무시할 수 있는 입자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이 모여있는 집단을 ‘알갱이계’라고 한다. 알갱이계 연구는 사일로에 곡식을 저장하거나, 원석에서 귀금속을 추출하거나, 분말로 된 원료를 섞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등 알갱이를 이용하는 산업에서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1997년 독일에서 사일로에 곡식을 담는 과정에서 폭발이 일어난 사건이 있었다. 곡식의 알갱이가 균일하게 압력을 가하지 않아 사일로의 일부분에 강한 압력이 발생해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처럼 곡식 알갱이를 저장하는 통인 사일로는 물을 채우는 물탱크보다 1천배 이상 불안정하다. 때문에 사일로는 알갱이계 연구 결과를 토대로 매우 정밀하게 만들어진다.

작은 건 아래로 큰 건 위로


브라질땅콩 현상을 보여주는 적외선 영상. 왼쪽에서 오른쪽 으로 갈수록 큰 알갱이가 더미 위로 떠오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알갱이계가 연구되는 또다른 이유는 이 계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현상 때문이다. 만약 로또에서 한개의 공을 제외한 나머지 공들이 크기와 무게가 모두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이때 ‘이방인’에 해당하는 공은 다른 공에 비교해 재질은 같지만 크기가 조금 크다고 가정하자. 로또 추천기 속 회전판을 돌려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외부에서 회전시키거나 진동하는 식으로 자극을 주면 이방인의 공이 표면으로 먼저 떠오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여러 크기의 알갱이들을 흔들거나 진동을 주면 큰 알갱이들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브라질땅콩 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하필 여러 알갱이 중에서 브라질땅콩이 이름으로 붙여졌을까. 이는 아침에 흔히 먹는 시리얼에서 유래했다. 아침식사로 다양한 영양분을 골고루 공급하기 위해 시리얼에는 여러 종류의 곡식이 섞여 있다. 시리얼을 그릇에 부었을 때 곡식들이 잘 섞여있는지를 관찰해보면 많은 경우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브라질땅콩과 같은 크기가 큰 곡식이 표면에 떠오르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브라질땅콩 현상은 시리얼처럼 여러 크기의 알갱이들로 구성돼 있는 계에 외부 자극을 가했을 때 큰 입자가 더미의 표면으로 이동하려는 현상이다.

1930년대 처음 발견된, 단순해보이는 이 현상은 많은 화학공학자와 물리학자들의 활발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현재는 다음 세가지 가설이 최소한 현상의 일부를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첫째는 큰 입자들 사이의 틈으로 작은 입자들이 통과하면서 더미의 바닥으로 이동해 상대적으로 큰 입자가 떠오른다는 주장이다. 두번째는 입자들이 움직일 때 주위에 빈 공간이 생기는데, 큰 입자의 아래에 형성된 공간에 작은 입자들이 채워지면서 큰 입자가 더미의 위로 이동한다는 주장이다. 이 경우에 작은 입자 주위에 형성된 공간으로는 큰 입자가 이동할 수 없어 큰 입자는 가라앉지 않는다. 마지막 주장은 대류현상으로 설명된다. 물을 끓이면 그 안에서 물이 순환하듯이 외부에서 진동을 가하면 알갱이계에서 대류가 일어난다. 이 경우에 대류를 따라 표면으로 이동한 후에 작은 입자는 아래로 흐르는 하강류를 따라 내려가지만 큰 입자들은 하강류의 폭보다 커서 표면에 남아있게 된다는 주장이다.

입자의 운동은 모양, 밀도, 표면과 같은 입자의 성질, 회전과 진동과 같은 자극의 종류, 용기의 모양과 재질 등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세가지 주장은 이들 중 일부의 경우만을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체계적인 이론이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다. 예를 들어 두번째 주장에 따르면 입자의 크기만이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입자의 성질이나 자극의 종류에 따라 큰 입자의 움직임 방향이 달라진다.

2001년 미국 레하이대 재미과학자 홍종한 교수팀은 이 현상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이전의 경우보다 복잡한, 즉 크기뿐 아니라 밀도가 다른 입자들로 이뤄져있는 알갱이계를 연구했다. 로또의 공들이 각 번호마다 크기와 밀도가 제각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럴 경우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양자역학의 눈으로 알갱이를 바라본다

홍 교수가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연구는 브라질땅콩 현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홍 교수의 관심은 같은 종류의 입자로 이뤄진 계가 외부에서 주는 자극에 따라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서였다. 다시 말하면 공들을 상자에 넣고 흔들 경우 그 세기에 따라 계의 상태가 어떻게 변할지를 예측하고자 했다.

고전역학에서는 입자들 사이의 반발력 때문에 같은 자리에 두개의 입자가 동시에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양자역학에서 전자, 양성자, 중성자와 같은 페르미 입자가 두개가 동시에 같은 상태에 있을 수 없는 ‘페르미 베타원리’와 유사하다. 홍 교수는 이 점에 착안해 고전적인 알갱이계를 양자역학의 방법으로 기술하려는 매우 독특하고 혁신적인 이론을 제안했다.

통 안에 채워진 알갱이들을 흔들어줬을 때 그 안의 알갱이들은 이동을 한다. 그러나 통에서 넘치지 않는 한 알갱이들의 전체적인 이동은 없다. 이처럼 입자들로 구성된 계가 전체적 이동이 없을 경우에 통상적인 의미의 온도는 분자의 운동에너지에 비례한다. 알갱이계의 경우에 이 온도, 즉 알갱이를 구성하는 분자들의 운동에너지는 입자들의 운동에너지에 비해 매우 작아 무시할 수 있다. 알갱이계에서는 입자의 운동에너지에 비례하는 ‘알갱이온도’(granular temperature) T가 역할을 대신한다.

홍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낮은 알갱이 온도에서는 입자들이 용기의 바닥에 결정의 형태인 응결상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T가 증가함에 따라 점차 유체의 들뜬상태로 변화해간다. 또한 입자의 크기와 밀도에 의존하는 임계온도 Tc가 존재한다. 그래서 T>;Tc인 경우에는 모든 입자가 유체상태가 된다. 이는 입자가 담겨있는 용기를 흔드는 세기를 증가시키면 입자가 바닥에 정렬하고 있는 상태에서 활발하게 운동하는 상태로 점차적으로 바뀌어간다는 말이다.

만약 두종류의 입자를 섞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임계온도 Tc가 입자의 크기와 밀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두종류의 입자는 각기 다른 Tc를 갖는다. 입자의 종류를 A, B라고 하면 이에 해당하는 Tc(A), Tc(B)가 존재하고 편의상 Tc(A)>;Tc(B)라고 하자. 계의 온도 T에 따라 (i)T>;Tc(A), (ii)Tc(A)>;T>;Tc(B), (iii)Tc(B)>;T의 세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올 1월 실험으로 검증된 역 브라질땅콩 현상


올 1월‘피직스리뷰레터스’ 에 게재된 역 브라질땅콩 현상 의 실험결과. 위부분의 사진은 브라질땅콩 현상, 아래쪽은 역 브라질땅콩 현상을 보여준다.


첫번째(T>;Tc(A))의 경우에는 두종류의 입자가 모두 유체상태이고, 세번째(Tc(B)>;T)의 경우에는 모두 응결된 상태로 존재한다. 가장 흥미있는 두번째의 경우에는 A종류의 입자는 바닥에 응결된 상태로, B종류의 입자는 유체상태로 존재해 두종류의 입자 사이에 분리가 일어난다.

결과적으로는 이같은 방식으로 입자의 밀도가 같은 경우의 브라질땅콩 현상에 대해서도 설명이 된다. 크기가 작은 입자가 바닥에 응결된 상태로 존재하고, 큰 입자는 들뜬상태로 되면서 더미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항상 큰 입자들이 더미의 표면으로 떠오를까. 홍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두입자의 밀도에 따라서 큰 입자의 임계온도를 상대적으로 높게 만들 수 있고 이런 경우에는 큰 입자들이 오히려 바닥에 응결되는 ‘역 브라질땅콩 현상’을 예측할 수 있다. 홍 교수팀은 분자동역학 시뮬레이션 방법을 통해 역 브라질땅콩 현상이 일어남을 보였고 이론적으로 예측된 경계값 또한 이 방법으로 검증했다.

홍 교수의 이론은 발표 즉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최고 권위의 학술지인 ‘네이처’와 물리분야의 주요연구결과를 보여주는 ‘피직스웹 뉴스’에 소개됐고, 미국의 일간지인 ‘보스턴글로브’, 독일의 일간지인 ‘자이트’에도 보도됐다.

독특하고 혁신적인 이론이기에 학계에서 반대 의견도 많았다. 2000년 9월 홍 교수가 참석한 ‘기체상태의 알갱이’(Granular Gases)라는 학회의 조직위원장인 독일 훔볼트대의 푀셀(Poschel) 교수는 “홍 교수의 연구가 학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토론된 주제였으며 이를 찬성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그룹이 확연히 구별됐다”고 당시의 상황을 올 1월에 열린 홍 교수의 추모학회에서 회고했다.

또한 이 이론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이 여러가지 기술적인 이유로 긍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논란은 계속됐다.

그런데 최근 독일 바이오이스대의 뢰베르그(Rehberg) 교수 그룹은 정교한 실험을 통해 역 브라질땅콩 현상을 포함한 홍 교수의 이론을 검증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올 1월 저명한 물리학 학술지인 ‘피지컬리뷰레터스’의 표지논문으로 발표됐다. 이제 홍 교수의 이론은 더욱 힘을 받게 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홍 교수는 이미 저세상에 가고 없다. 지난해 7월 46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자신의 이론이 실험으로 검증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 1월에 발표된 실험결과는 그의 죽음을 기리는 과학자들의 애도가인 셈이 됐다.

흔하지만 이해 안되는 좋은 예

브라질땅콩 현상은 알갱이계가 보여주는 다양한 흥미로운 현상 중에 하나일 뿐이다. 시카고대학의 나겔(Nagel) 교수는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이지만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좋은 예”라며 “좋은 물리학 연구에 반드시 거대한 입자 가속기 같은 고가의 장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얘기했다.

브라질땅콩 현상과 같이 여러 종류의 입자들이 섞여있는, 언뜻 단순해보이는 알갱이계가 보여주는 현상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홍 교수의 이론을 포함한 이 분야의 이론들은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며 지속적인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홍 교수가 기존의 이론보다 체계적이고 혁신적인 이론을 제시했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 이론에 관해 활발한 연구가 후학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뤄지기를 바란다.

역 브라질땅콩 현상 예측한 한국인 과학자 홍종한

역 브라질땅콩 현상을 예측한 홍종한(Daniel C. Hong) 교수는 1956년에 서울에서 출생해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학사,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에서 통계물리학의 대가인 스탠리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무질서계의 현상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과정 중의 활발한 연구결과를 널리 인정받아 현재 미국학술원의 부원장인 랭거 교수 그룹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보냈다. 이 기간에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사프만-태일러 핑거’(Saffmann-Taylor Finger) 문제를 해결했다. 이 문제는 두 액체 사이의 경계면에 손가락 모양이 형성되는 현상에 대한 것으로, 유전에서 원유를 뽑을 때 실질적으로 작용한다.

유전에서 원유를 뽑기 위해 두개의 시추공을 뚫는다. 그런 후 한쪽에는 물을 집어넣어서 다른 한쪽에서 원유를 뽑아낸다. 문제는 물과 원유의 경계면이 깔끔하지 않고 여러개의 손가락처럼 울퉁불퉁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유전 속 원유의 상당량을 뽑아내지 못했다. 홍 교수는 수십년간 지속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후 홍 교수는 에모리대를 거쳐 레하이대에 자리를 잡았다. 활발한 연구활동을 통해 72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2명의 석사와 4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그러나 건강문제로 고생을 하다가 2002년 7월에 46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올해 2월 고인을 추모하는‘알갱이계 및 복잡계 겨울학교’(APCTP Winter School on Granular Material and Complex Systems: in Memory of Daniel C. Hong) 학회가 강원도 평창에서 개최됐고 여기에는 해외인사 9명을 포함해 총 80여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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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이지수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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