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의 힘을 집결시켜 개인주의 PC가 흉내낼 수 없는 전체주의 파워를 자랑하는 것이 바로 슈퍼컴퓨팅이다. 슈퍼컴퓨팅은 ‘나도 할 수 있다’는 헝그리 정신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 컴퓨터가 엘리트 관료들의 전유물 신세를 탈피한 것은 지속적인 기술 혁명의 결과였다.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ENIAC) 이래 이어진 기술 혁명은 만인을 위한 컴퓨팅의 해방 전선이었던 것이다.
● ● 그렇다면 그 혁명의 완결에 해당하는 PC의 등장으로 컴퓨팅은 100% 평등한 해방을 맞았을까. 그것이 그렇지만도 않다. 여전히 힘의 결속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어, 자원과 힘을 집결시키고 중앙 통제해 개인주의 PC가 흉내낼 수 없는 전체주의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이 전체주의를 우리는 ‘슈퍼컴퓨팅’이라 부른다.
●● top500.org는 슈퍼컴퓨터들의 올림피아드다. 더 높은 플롭(FLOPS, 초당 부동소수점 연산 실행수)을 갱신하기 위한 결투장인 것이다. 일반 PC처럼 클럭 속도를 지정하지 않고 피크 타임의 성능을 수치 기록으로 재는 것도 이들의 경쟁심을 여실히 드러낸다. 현재 1등은 일본의 ‘지구 시뮬레이터’로, 1초에 40조번 계산을 수행해낸다. 야심찬 전체주의자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 더 큰 방을 빌려 더 센 기계와 더 많은 반도체를 집합시켜 밀어 넣는다. 이들의 구실은 가지가지. 지구를 흉내내겠다는 간 큰 계획에서부터 국가안전보장국(NSA)의 조심스러운 특별주문품까지.
●● 슈퍼컴퓨터 군단에는 다양한 부대가 속해 있다. 가장 값비싸고 강력한 정예 부대는 병렬 벡터 프로세싱. 벡터 프로세서란 병렬 처리에 강한 프로세서로, 쉽게 말해 수리 능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PC의 CPU 이상이 되는 대원들을 말한다. 그 외는 스칼라 프로세서로, 우리 주위의 마이크로프로세서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 마이크로프로세서들이 같은 메모리를 공유하면 대칭형 다중 프로세싱(SMP), 각자 메모리를 분산하면 초병렬 프로세싱(MMP)이라 부른다. 마지막으로 거의 예비군 수준으로 느슨해져서 PC 서버급의 기계들이 네트워크로 집합하게 되면 ‘그리드 컴퓨팅’이 되는 것이다.
●● 슈퍼컴퓨팅은 방식과 수준이 가지가지인 만큼 ‘나도 할 수 있다’는 헝그리 정신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1994년 시작된 베어울프(Beowulf) 운동이 대표적이다. 베어울프는 PC를 LAN으로 연결해 만든 PC 클러스터에서 병렬화한 프로그램을 실행시켜서 슈퍼컴퓨터를 구현한 것으로, LAN의 등장과 PC 대중화에 편승한 풀뿌리 슈퍼컴퓨팅이다.
16개의 리눅스 PC를 묶어서 책상 밑에 쌓아 놓은 것이 지금은 1천개의 프로세서도 수용하는 규모의 프로젝트로 성장해, 세계 각처의 방구석에 슈퍼컴퓨팅 열기를 불어넣어 왔다.
● ● 최근 서울대와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삼성전자가 산학협동 연구과제로 개발한 슈퍼컴퓨터 ‘페가수스’도 이러한 ‘누구나’ 슈퍼컴퓨팅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난해에도 고등과학원에서 76개의 AMD 애슬론 프로세서로 슈퍼컴퓨터를 자가 조립해 단백질 구조 연구에 쓴 사례가 있다. 중국 최대의 PC 메이커도 프로세서 5백26개를 엮어 테라 플롭을 돌파해 중국과학원에 도입시켰다.
●● 그야말로 유지(有志)들만 모은다면 마을회관에라도 용산제 PC를 차곡차곡 쌓아 슈퍼컴퓨터를 도입할 수 있는 시대가 찾아 온 것이다. 그러나 벡터 특수부대들의 관점은 다르다. 이러한 예비군 슈퍼컴퓨터의 활약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단언컨대 일용품다발(Commodity Cluster)들은 복잡다단한 거대 과제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인데, 신기록을 위한 최고성능(capacity)은 어떻게든 산출될지 모르나 실제성능(capability)은 성에 차지 않을 것이라 주장한다. 매우 큰 공유 메모리를 액세스하기 위한 메모리 대역폭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엉성한 조직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 오늘날 심지어 게임보이도 30여년 전의 크레이 슈퍼컴퓨터보다 빠르다. 4星 장군이 전략 미사일을 조종하던 시스템보다도 빠른 것이다.
그런데 왜 전체주의자들은 현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슈퍼컴퓨터를 만드는 것일까. 세계를 이해하려는 수준은 늘 욕심에 의해 향상되기 때문이다. 유전자나 단백질에 관한 데이터는 매달 테라바이트 단위로 늘어난다. 세시간이면 풀 수 있는 문제를 연구실에서 2-3주씩 걸려 프로그래밍하면서 해석하고 있는 입장이라면 이해가 가지 않겠는가.
●● 그런데 ‘진짜’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고 있는 곳은 IBM, NEC 등 미국과 일본업체뿐이다. top500.org 순위를 보아도 G7제국들의 독무대다. 슈퍼컴퓨팅이 각광받지 못한다는 것은 과학, 사회, 그리고 군사적인 면에서 그다지 심각한 일이 없다는 뜻일텐데, 정말 우리는 그러한 사회에 살고 있을까?
|프로세서|
프로세서는 컴퓨터 자료의 연산과 제어를 위해 명령어를 해석하고 처리하는 논리회로다. 프로세서라는 용어는 점차 CPU(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처리장치)라는 용어로 대체돼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