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정보가 염기서열에 담겨있다는 고정관념이 바뀌고 있다. 유전자가 발현되는데는 염기서열과 함께 메틸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DNA에서 메틸화 현상을 밝혀 유전자 조절 메커니즘을 밝히는 새로운 학문 후성학을 만나보자.
포스트게놈시대를 맞이해 게놈프로젝트의 연구결과를 의학이나 신약개발에 활용하는 일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물체의 기능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그 핵심은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의 기능과 조절 메커니즘을 밝히는 일이다.
유전자와 단백질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연구는 지난 수십년 동안 유전학(genetics)을 바탕으로 진행돼 왔다. 즉 어버이로부터 자손에게 전해지는 유전정보는 DNA라는 언어로 쓰여 있으며, DNA 염기서열의 변화와 재조합에 의해 형질의 변화가 발생한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DNA 염기서열에 변화가 전혀 발생하지 않으면서도 유전자 기능에 변화가 나타나고, 이 변화가 어버이로부터 자손에게 전해진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전현상의 이해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DNA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유전자 발현이나 기능의 변화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떻게 자손에게 전해지는지 밝히는 ‘후성학’(後成學, epigenetics)의 등장이다.
유전자 발현 막는 생체 비법
유전학에서 핵심이 되는 메커니즘이 DNA에서 염기가 바뀌는 돌연변이라면, 후성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DNA 염기에 메틸기(CH₃-)가 붙는 메틸화(methylation)다. 게놈의 염기서열 중 시토신(C)과 구아닌(G) 두 염기가 나란히 존재하는 것을 CpG라 하는데, 여기서 시토신이 메틸화가 될 수 있다. 인간게놈의 경우 메틸화된 시토신은 전체 시토신의 3-4% 정도다.
CpG는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진핵생물 게놈에서는 점진적으로 감소돼 온 경향이 있다. 하지만 포유동물 게놈에는 여전히 남아있다. 게놈 내 CpG의 메틸화 정도나 양상은 포유동물의 종에 따라 다르고, 조직에 따라서도 특이적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특히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의 염기서열에는 CpG가 밀집돼 있는 부위가 존재하는데, 이런 영역을 ‘CpG 섬’(CpG island)이라고 부른다. CpG 섬은 보통 0.5-4kb 정도 크기로, 포유동물 게놈의 유전자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CpG 섬이 유전자의 상위 부위, 즉 유전자의 전사를 조절하는 영역인 프로모터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밝혀진 인간게놈의 전체 염기서열에서 CpG 섬은 약 2만9천개로 추정되는데, 전체 유전자의 50-60%에 해당하는 유전자가 하나의 CpG 섬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 CpG 섬은 대부분 비메틸화상태(methylation-free)로 존재한다. 그러나 메틸화된 예외적인 경우가 존재해 CpG 섬의 메틸화가 지닌 의미를 밝히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부모로부터 하나씩 물려받는 상염색체의 경우 각 염색체의 유전자가 모두 발현되면 유전적 이상이 야기되는 수십종의 유전자군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들 유전자군은 어느 한쪽의 유전자만이 발현되도록 조절돼야 한다. 이런 현상을 유전체 각인(genomic imprinting)이라고 하며, 이렇게 조절받는 유전자를 각인유전자(imprinted gene)라 한다.
각인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생식세포 발생단계 초기에 해당 유전자의 CpG 섬이 선택적으로 메틸화돼 발현을 막기 때문이다. 결국 메틸화되지 않은 대립유전자만 발현됨으로써 유전자용량(gene dosage)이 조절되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여성의 성염색체 X에서도 나타난다. 여성이 갖고 있는 한쌍의 X염색체 중 한쪽의 X염색체에 존재하는 모든 CpG 섬은 메틸화돼 있다. 한쪽 염색체로부터의 유전자들의 발현이 억제됨으로써 X를 하나 갖고 있는 남성과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결국 CpG 섬의 메틸화 현상은 특수한 목적으로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특수한 분자적 네트워크로 발달된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생식세포 특이 유전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MAGE과 LAGE 등 유전자들은 남성과 여성의 생식세포 발생과정에서만 제한적으로 발현되다가 분화한 성체 조직에서는 CpG 섬이 메틸화돼 발현되지 않는다. 조직특이 유전자의 경우에도 인체 조직에 따라 특이적으로 CpG 섬의 메틸화가 발생해 발현이 조절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CpG 메틸화는 기생성 DNA 염기서열의 기능 억제에도 관여한다. 인간이 지구에 등장한 이후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외부로부터 트랜스포존(transposon)과 같은 전이성유전자들이 게놈에 끊임없이 유입됐다. 그러나 자체 방어시스템에 의해 외부로부터 유입된 유전자의 발현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전체 게놈 염기서열의 35%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는 외래 도입 염기서열의 유전자를 무력화시키는 주요 방어메커니즘이 바로 DNA 메틸화다. 즉 외래유전자들의 프로모터 CpG 섬이 메틸화돼 유전자 발현이 초기에 봉쇄됐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메틸기가 붙은 시토신은 티민으로 전환돼 결국 전이성유전자들이 점진적으로 무력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암 발생 원인을 찾아라
오랜 기간 동안 인체에 나타나는 다양한 암의 발생은 염색체의 수적·구조적 변화, 그리고 유전자 염기서열의 돌연변이 등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돼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암의 발생과정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전학뿐만 아니라 필수적으로 후성학적 관점을 도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정상세포에서는 암억제유전자 등이 정상적으로 발현됨으로써 세포분열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있다. 그러나 암세포의 경우는 암억제유전자가 기능하지 못해 세포분열의 조절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 이런 암억제유전자의 기능 소실은 이들 유전자의 CpG 섬에 나타난 비정상적 메틸화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이 다양한 암종에서 연속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프로모터 영역의 메틸화는 지금까지 돌연변이 또는 결실에 의한 암억제 유전자의 기능 소실만큼이나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그림1).
특히 생식세포 돌연변이에 의해 유발된 유전성 종양과 관련된 유전자의 50%가 비유전성인 다양한 암종에서도 메틸화에 의해 기능이 소실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그 좋은 예로 CDKN2A 유전자를 들 수 있다. 정상적인 세포에서는 세포분열을 정상적으로 조절하는 특정 경로(cyclinD-Rb)가 중요하다. 이 경로에 관여하는 유전자 또는 단백질의 기능이 소실되면 세포분열 조절기능을 잃게 돼 세포가 끊임없이 증식하게 돼 결국 암세포로 분화한다.
CDKN2A 유전자는 이 경로에 관여하는 특정 단백질(Rb)을 활성화 상태로 유지시켜 세포주기를 조절한다. 현재 많은 암세포에서 CDKN2A 기능의 소실 때문에 이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가 비활성화돼 세포주기 조절기능을 상실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CDKN2A의 기능 소실은 염색체 결실이나 점 돌연변이, CpG 섬 메틸화 등 독립적인 메커니즘이 함께 작용해 발생한다. 하지만 이들 메커니즘이 발생하는 상대적인 빈도는 암종에 따라 다양한데, 대장암의 경우 CDKN2A 기능 소실은 오로지 CpG 섬 메틸화만 관여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밝혀지는 유전자 메커니즘
그렇다면 DNA 메틸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DNA 메틸화는 인체 DNA를 변형시키는 유일한 메커니즘으로 DNA 메틸기전달효소(DNA methyltransferase, DNMT)에 의해 일어난다. 현재 포유동물 세포에서 3종류의 DNMT가 밝혀져 있는데, 가장 먼저 발견된 DNMT1은 세포분열과정에서 DNA가 합성될 때 DNA 메틸화 상태를 유지시키는 기능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추가로 발견된 DNMT3a와 DNMT3b는 새로운 메틸화를 촉매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처음에는 DNA 메틸화 자체가 단순히 전사인자의 결합을 방해함으로써 유전자 전사를 억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 여러 종류의 전사인자들이 자신의 인식 부위에 위치하는 메틸화 CpG에 민감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최근에 좀더 명확한 메커니즘이 밝혀지고 있다(그림 2).
일단 DNA가 메틸화되면 이 부위에 메틸기와 결합(Methyl-Binding Domain, MBD)하는 단백질이 유도된다. 메틸기결합단백질은 현재 5종이 알려져 있는데, 이중 MeCP2, MBD2, MBD3는 히스톤 탈아세틸효소(HDAC1, HDAC2) 등이 결합한 복합체와 반응한다. 여기서 히스톤 탈아세틸효소는 DNA를 감싸는 염색질을 구성하는 단백질 히스톤에서 아세틸기를 제거해 버린다. 또한 메틸기결합단백질은 히스톤을 메틸화시키는 효소(HMT)도 함께 유도한다. 결국 DNA 메틸화는 히스톤을 변형시키고 염색질을 리모델링시켜, 유전자 발현이 억제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 역방향으로도 신호가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뉴로스포라(Neurospora)라는 미생물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히스톤의 메틸화를 차단하면 DNA 메틸기가 제거됐다. 또한 히스톤 탈아세틸효소 억제제를 처리해 히스톤의 아세틸화를 증가시키면 DNA에서의 탈메틸화를 유도할 수 있었다.
암세포에서 관찰되는 유전자의 메틸화는 메킬기전달효소의 활성보다는 히스톤 변형이나 염색질 리모델링에 의해 전사과정이 억제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유전자 전사과정의 후성학적 조절 메커니즘은 DNA 메틸화, 히스톤의 메틸화와 탈아세틸화, 염색질 리모델링 등 세가지 서로 다른 메커니즘이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 암 환자를 관리하는데 암세포가 갖고 있는 DNA의 메틸 패턴이 매우 중요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특정 유전자나 게놈 수준에서의 CpG 메틸화 패턴을 밝혀 암 발생을 예측하거나 진단하는 표지자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후성학적 조절메커니즘에 기초해 메틸기전달효소, 탈아세틸화효소 등의 기능을 억제함으로써 기능이 소실된 유전자를 정상으로 회복시켜 항암 효과를 얻는 임상시험이 진행중이다.
한국인 메틸화 패턴 밝힌다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특정 암세포에서 후성학적으로 기능이 소실된 유전자를 찾아내, 그 정보를 토대로 환자에 가장 적합한 치료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실제로 DNA 메틸기전달효소의 활성을 억제할 수 있는 화합물(5-azacytidine과 2-deoxy-5-azacytidine)들이 배양된 조직세포에서 DNA 메틸화를 억제했으며, 특히 메틸화에 의해 기능이 소실된 일부 유전자의 기능을 회복시켰다. 또한 현재 최소한 4종류의 히스톤 탈아세틸효서 억제제(phenylbutyrate, SAHA, pyroxamide, cyclic tetrapeptide)가 동물모델에서 암세포 성장을 억제하는 것으로 밝혀져 임상시험 단계에 있다. 암세포에서의 기능이 소실된 유전자들은 항암치료를 위한 새로운 목표 분자로써 매우 중요하게 활용될 전망이다. 유전자와 기능 소실과 관련된 DNA 메틸화, 히스톤의 메틸화·아세틸화, 염색질 리모델링 등 후성학적 메커니즘의 정확한 이해는 이를 조절하는 저분자 화합물을 통해 효과적인 항암제 개발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DNA 메틸화 연구는 암세포에서 기능이 소실된 유전자를 발굴하는 일이었다. 최근에는 대규모의 검색시스템을 이용해 암 게놈에서 전체 메틸화 패턴을 분석해 미지의 유전자를 발굴하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이를 위해 다양한 검색 시스템이 개발돼 활용되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메틸환된 DNA를 찾는 여러 기술을 이용해 암발생과 관련된 암억제유전자, 세포주기 관련 유전자, DNA보수유전자 등을 밝혀냈다. 국내에서도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cDNA 마이크로어레이 기술을 이용해 암세포에서 기능이 회복된 유전자를 찾는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특히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인간유전체연구실에서는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의 일환으로 RLGS 기술을 이용한 후성학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인에게 많이발생하는위암과간암세포에서어떤유전자가DNA 메틸화에 의해 기능이 소실되는지 밝혀 항암치료를 위한 표적유전자로 활용한다는 야심찬 계획이다.